미스터 션샤인, 윤봉길
미스터 션샤인, 윤봉길
  • 김선아 기자
  • 승인 2019.05.23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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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전경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전경

 

올해 화제의 드라마는 단연 <미스터 션샤인>이다. 드라마 초반에 역사 왜곡 논란이 있었지만, 취지에 맞게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의병’의 존재를 깨닫게 했고, 그분들의 희생이 얼마나 값진지를 느끼게 했다.

의병의 존재 인식과 함께, 문득 ‘기록된 역사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기가 바쁘다는 핑계로 기록된 역사조차 잊혀 가는 게 현실이다.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낸 스스로를 반성하며 1932년 12월 19일에 순국한 윤봉길 의사를 찾아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방문했다.

 

기념관 문을 열자마자 중앙 홀에 자리 잡은 윤봉길 의사 동상이 시선을 붙잡았다. 광화문 앞에 있는 세종 대왕 동상을 만든 조각가 김영원의 작품인데, 의자에 앉아 있는 윤봉길 의사의 표정에서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전시실은 출생과 성장, 오치서숙, 농촌 계몽 운동,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등 23세까지의 삶을 보여 준다. 2전시실은 윤봉길의 상하이 발자취로 시작해서 한인 애국단 입단, 상하이 의거, 순국, 상하이 의거의 영향, 유해 봉환 등과 관련된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중앙 홀의 윤봉길 의사 동상
기념관 중앙 홀의 윤봉길 의사 동상

 

1전시실 시작
짧지만 뜨거웠던 윤봉길의 연표

가장 먼저 윤봉길 의사의 연표가 보였다. 그걸 보며 느낀 점은 스물다섯, 참 짧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들을 했다. 마지막으로 1932년 12월에 순국했으니, 실질적으로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한 번도 살아 보지 못했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짧았지만 그 누구보다 뜨겁게 불태웠던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본다.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이면 을사늑약과 한일 신협약(정 미7조약)이 이미 체결된 후다. 일제에게 재정권과 외교권을 빼앗겼고 군대는 해산되었으며, 실질적인 사법권과 경찰권마저 넘어간 그런 암울한 시기에 출생한 것이다.

 

12세, 식민지 교육 거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윤봉길은 11세 때 덕산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듬해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에 대한 열망은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고 덕산면도 마찬가지였다. 덕산 시장에 700여 명이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고 덕산 공립 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은 수업을 중단시켰다. 그 광경을 지켜본 어린 윤봉길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일본 사람 만들려는 학교에는 가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열두 살 윤봉길은 식민지 교육을 거부해 학교를 자퇴했다. 그렇다고 배움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오치서숙에서 사서삼경과 한시를 익혔다. 이렇게 유학을 배우면서도 <동아일보>, <개벽> 등 신문과 잡지, 신서적을 꾸준히 읽으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시야를 넓혔다. 이때 스승 성주록이 “한겨울 추위 속에서 향기를 내뿜는 매화의 고고한 기품과 충의 정신을 간직하라”는 뜻으로 ‘매헌’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윤봉길 의사의 연표
윤봉길 의사의 연표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나이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니 그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기념관에는 그가 쓴 <기사년 일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1929년 광주 학생 운동과 함흥 수리 조합 조선인 살해 사건이 나오는데, 그 일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위해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 듯해 보였다. 그는 집을 떠나기 전날 친정에 가시는 어머니를 배웅하면서 목에 두르는 큰 수건과 과자를 사드렸다. 당일에는 아내가 차려 준 마지막 밥상을 물리고 네 살 난 아들을 안아 뺨을 비볐다. 부엌에 들어가 아내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나서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집을 몇 바퀴 돌아보았다. 그렇게 윤봉길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이라는 글 을 남기고 고향을 떠났다.

사실 그는 열다섯 살에 배용순과 결혼해서 딸 안순, 아들 종과 담을 둔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중대한 결심을 했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식민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닐까? 기념관에 전시된 윤봉길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서, 그는 청도에서도 상하이에서도 단 한 번도 가족을 떠난 적이 없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몸은 멀리 있지만. 또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누구의 아들(딸)이고, 누구의 남편(아내)이고, 누구의 아버지 (어머니)였다는 당연한 진리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봉길이 어머니께 쓴 편지
윤봉길이 어머니께 쓴 편지

 

야학당으로 시작해서 농촌 부흥 운동으로... 그러나

오치서숙에 다니면서 윤봉길은 자신의 사랑방에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19세에 오치서숙을 수료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친구들과 함께 야학당을 개설해 마을 사람들을 가르쳤고, 직접 교재 <농민독본>을 저술하기도 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농촌 부흥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가난한 농촌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특용 작물 재배와 양돈, 양계 등을 장려하는 ‘증산 운동’을 펼쳤고, ‘공동 구매 조합’을 결성해 농민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공동 판매하고 필요 물품을 공동 구매 했다. 또 수암체육회를 만들어 청년들의 체력 증진에도 힘썼다.

윤봉길 하면 도시락형 폭탄만(실제로는 수통형 폭탄) 알고 있었는데,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부단히도 독립을 위해 애쓴 흔적에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2전시실
김구를 만나 때를 기다리다

2전시실은 윤봉길 의사의 발자취를 보여 주는 지도로 시작되었다. 집을 떠난 윤봉길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압록강을 넘기 전 선천 경찰서에서 모진 취조를 받았고, 칭다오에서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세탁소에서 1년 넘게 일을 했다. 상하이에 갈 여비 마련과 일본인의 습관과 문화를 익히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드디어 1931년 5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해 백범 김구를 만났다.

윤봉길은 홍커우 공원 근처 일본인 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를 면밀히 살피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상해일일 신문>에 상하이 침공 전승 축하식이 4월 29일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다는 기사가 실린 것이다. 홍커우 공원 행사장 안에는 매점이 없어 참석자들은 도시락과 수통을 지참한다는 내용과 함께. 윤봉길은 그날을 이용해서 일본의 수뇌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고, 김구는 이 의거의 결행을 위임했다.

 

윤봉길과 김구의 회중시계
윤봉길과 김구의 회중시계

 

상하이 의거
침략자를 향해 ‘정의의 폭탄’을 던지다

의거 당일 아침 식사는 고깃국이었다. 김구의 부탁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윤봉길은 6원을 주고 산 자신의 시계와 김구의 2원짜리 시계를 바꾸자고 했다. 자신에게는 1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서.

기념관에는 윤봉길 회중시계와 김구재단에서 대여해 온 김구 회중시계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그걸 보는데 마지막 길을 든든하게 먹여 보내고 싶은 김구의 마음과 남아서 더 힘든 일을 해야 할 김구의 시계를 좀 더 좋은 시계로 바꿔 주고 싶은 윤봉길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해졌다.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 일본군, 각국 외교 사절단과 초청자 등 3만여 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있었다. 그곳에 윤봉길은 7시 50분경에 도착했다. 김홍일이 비밀리에 제작한 도시락형 폭탄과 수통형 폭탄을 가지고 단상 뒤쪽 일반 군중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관병식이 끝나고 기미가요 합창을 부르는 11시 40분쯤 윤봉길은 도시락형 폭탄을 바닥에 내려 놓고, 수통형 폭탄을 단상 위로 힘껏 던졌다. 일제의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를 처단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중 공사 시게미쓰는 오른발이, 육군 제9사단 우에다 중장은 왼쪽 발이 절단되었다. 해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으며, 거류민단 서기장 토모노와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에게도 큰 부상을 입혔다.

 

윤봉길이 지니고 있던 폭탄
윤봉길이 지니고 있던 폭탄

 

순국

윤봉길은 일본 군중에 의해 무차별 폭행을 당한 후 헌 병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의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일본 상하이 파견군 군법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일제는 김구 등 임시 정부 요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사형을 미루다가 정전 협정으로 군대 철수 명령이 내려지자 삼엄한 경비 속에서 윤봉길을 일본으로 압송했다. 11월 20일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8일 상하이 침략 주력 부대 주둔지인 가나자와시 제9사단 위수구금소로 이감되었다.

12월 19일 시라카와 대장 사망 시간인 오전 7시 40분에 맞춰 사행이 집행됐다. 가나자와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 눈을 가린 윤봉길을 십자가 형틀에 손을 묶고 거적때기 위에 무릎을 꿇렸다. 그리고 총을 쏘았다. 교과서에서 봤던 사진을 기념관에서 다시 보는데 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식민지의 국민이라지만 한 달 만에 치러진 졸속 재판과 거적때기에 무릎을 꿇게 하는 등 정말 일제는 악랄하고 치졸했다.

 

윤봉길의 순국
윤봉길의 순국

 

상하이 의거의 영향
한국 독립의 불씨를 살려 광복을 이끌다

“물론 한두 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한다고 해서 독립이 쉽게 될 리는 없다. (중략) 단지 기대하는 것은 이로 인하여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아가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하게 하는 데 있다.”

- 윤봉길 신문조서 1932년 7월 내무성 보안과

윤봉길 의사는 순국했지만 그의 희생은 꺼져 가는 독립의 불꽃을 횃불로 바꾸었다.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 세계 각국의 주요 신문이 곧바로 상하이 의거를 보도했다. 이를 통해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국 민족이 독립을 강렬하게 바란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특히 중국의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크게 감명 받았다. 이후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김구를 만나 뤄양 군관 학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해 주는 등 항일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이들 졸업생 등을 중심으로 항일 투쟁을 펼쳐 나갔고, 이들이 한국광복군의 기반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한국은 끈질긴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승리로 광복을 맞이했다.

 

상하이 의거를 보도한 세계 각국의 신문들
상하이 의거를 보도한 세계 각국의 신문들

 

윤봉길 의사의 유해
자유로운 조국에 묻히다

광복 후 ‘임시 정부 유해 발굴단’은 일제의 화장했다는 거짓말에 속지 않고,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1946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드디어 찾아냈다.

알고 보니 일제는 사형 집행 후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비밀리에 암매장했다. 가나자와시 노다산 공동묘지의 관리 사무소에서 쓰레기 하차장으로 가는 통로에 봉분도 없이 묻어 버렸다. 유해가 발굴되기까지 12년 동안 일본인들은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묻힌 곳을 밟고 지나다닌 것이다.

발굴한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5월 15일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부산에 도착했다. 6월 15일에 열린 추도식에는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함께했다. 그리고 다음 날 서울로 봉환되어, 7월 6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마침내 자유로운 조국의 품에 돌아온 것이다.

 

효창 공원 삼의사 묘
효창 공원 삼의사 묘

 

다 둘러보고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나서는데 겨울의 따사로운 햇살이 느껴졌다. 바로 옆 양재 시민의 숲에서는 아이와 함께 놀러 온 가족, 달콤한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로 활기찼다. 우리가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이 일상의 행복, 다시 한 번 윤봉길 의사에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모든 미스터 션샤인에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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