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CSI, 흠흠신서 속 사건파일
조선판 CSI, 흠흠신서 속 사건파일
  • 정세진 기자
  • 승인 2019.05.23 1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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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 중인 흠흠신서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 중인 흠흠신서 필사본

 

흔히 조선 시대 서민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풀길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양반들보다 이들이 정치의 혜택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살인 등 강력범죄로 인한 피해를 나라가 모른척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 조선판 CSI라고 부를 법한 사건들 몇 가지를 소개한다.

 

1798년 황해도 수안군에서는 같은 동네에 사는 최주변과 민성주라는 두 남성이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 민 씨가 최 씨를 칼로 찔러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최주 변의 아내 안 씨는 복수심으로 민성주를 죽이고 만다. 이 사건을 조사한 사람은 바로 조선의 다빈치로 불리는 정약용이다.

 

다산 정약용 초상화 (출처 한국 데이터 진흥원)
다산 정약용 초상화 (출처 한국 데이터 진흥원)

 

그는 당시의 법의학 서적인 <무원록>으로 사건의 진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무원록에 따르면 칼에 찔린 상처는 약소해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최주변의 경우 한 달 이상 과로하며 몸을 혹사해 작은 상처가 점점 번지면서 죽음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은 추리를 기반으로 그는 최주변을 죽인 것은 민성주가 아니며, 아내 안 씨의 복수는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정약용의 대표 저서 중 하나인 <흠흠신서>에 기록된 것이다. 신중하고 또 신중하라는 의미의 흠흠신서에는 그가 맡았던 다양한 형사 사건들과 이를 처리 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다시 말해 조선판 CSI 과학수사대인 셈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는 오늘날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과학 수사 수준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무원록에는 칼로 사람을 죽이고 피를 닦아 놓았을 때 식초를 발라 숯불에 달구면 빨갛게 흔적이 나온다고 적혀 있다. 루미놀 반응과 유사한 기법이다. 또한 독살일 경우 시신의 목구멍에 은비녀를 넣어보면 검게 변하는데, 그 비녀를 조각수로 닦은 후 에도 검은 채로 남아 있다면 독살로 판단했다.

흠흠신서는 단순히 기록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고 판결의 근거와 적절한 형량,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정약용의 애민 정신과 철학을 담고 있다. 다산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 외에도 가해자 혹은 피해자의 심리 상태와 도덕적 수준을 가늠해 그 경위를 분석 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물을 담은 책이 바로 흠흠신서이다.

흠흠신서에 나오는 또 한 가지 사건을 보자. 1799년 4월, 정조는 정약용에게 강원도 평창에서 있었던 함봉련 사건을 재조사하라는 명을 내린다. 사건의 발단은 ‘모갑’이라 는 이름의 나졸이 양인 김태명의 집에 환곡을 독촉하러 가서 송아지를 보고 이를 훔쳐 온 데서 시작된다. 마침 집으로 돌아가던 김태명은 이 장면을 보게 됐고, 송아지를 빼 앗으려다 싸움이 나서 모갑은 김태명에게 공격을 당한다.

이때 김태명 집의 머슴이었던 함봉련이 땔감을 지고 돌아오는데 김태명은 그에게 “내 송아지를 훔친 사람이니 혼을 내주라”고 말했다. 함봉련은 지게를 진 채 모갑의 등을 떠밀었는데 그는 밭고랑에 넘어졌다가 곧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모갑은 뒤늦게 집에서 피를 토해내며 “나를 죽인 자는 김태명”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모갑의 아내는 이 사실을 관아에 알렸고 곧 수사가 시작됐다.

 

충남 부여에 남아 있는 홍산현 관아 모습
충남 부여에 남아 있는 홍산현 관아 모습

 

초검과 시체검험서에서는 가슴 한 곳이 검붉고 딱딱하며 둘레는 3촌 7푼이고 코와 입이 피로 막힌 것 외에는 별로 다친 자국이 없어서 맞은 것을 사인으로 분석 했다. 그런데 범인으로는 함봉련이 지목됐으며 김태명은 목격자로 판단을 내렸다. 정약용은 이 사건을 재조사한 결과 거짓 진술에 의한 오판이었음을 밝혀냈다. 유족의 진술, 시체검험서의 증거, 공변된 증인이 판결의 근거인데 이 경우 검험서의 다친 자국과 유족 진술이 일치했는데도 김태명이 아닌 함봉련이 범인으로 몰렸다. 검험서에 따르면 가슴을 짓찧은 자국이 있는데 이는 김태명이 무릎으로 누른 것이다. 반면 함봉련이 떠밀었다는 시신의 등에는 다친 자국이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김태명과 다른 증인인 김태명 집안 머슴들도 함봉련이 범인이라고 진술했다. 즉, 김태명은 자신의 죄를 머슴에게 뒤집어씌운 셈이다. 이와 같은 보고서를 받은 정조는 곧 함봉련을 석방하고 김태명을 대신 체포했으며, 함봉련에 대한 사건 문서 자체를 태워 없애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의 무고가 밝혀질 경우 기록 자체를 없앴던 정조의 애민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고의성이 없으면 정상 참작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기록도 있다. 1798년 황해도 황주의 엿장수 선착실은 모갑이라는 인물을 살해했다며 재판을 받았다. 모갑은 외상으로 선착실에게 엿 두 개를 사 먹었고, 연말까지 돈을 갚지 않으며 버텼다. 선착실은 다툼 끝에 모갑을 떠밀었는데 마침 넘어져 있던 지게뿔이 모갑의 항문에 맞아 복부를 관통해 사망했다.

사건을 심사한 이들은 겨우 두 닢의 돈으로 사람을 죽였으니 죄질이 나쁘다고 했으나 정약용은 “지게뿔은 곧고 예리하지 않으며 항문은 은밀한 곳에 있는데 그 런데도 찔려 죽었다는 것은 고의적인 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는 선착실에게 사람을 떠민 죄만을 묻고 살의가 없었다며 석방했다.

정약용이 이렇게 살인 사건과 그 판결 지침을 책으로 써낸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당시 지방 고을에서 살인 사건이 한번 발생하면 수령이 검시에 들어가고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겪는 고통이 적지 않았다. 아전들은 혼란을 틈타 백성들의 세간을 약탈했으며 무고한 백성이 감옥에 갇히는 등 많은 폐해가 있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이런 잘못된 관례를 바로잡고 관리들을 계몽하기 위해 흠흠신서를 지었다고 한다.

총 30권 10책으로 350여 건의 사례를 담고 있는 흠흠신서에는 타살과 자살 판별법, 정신이상자 구분법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적어 실제 현장에서 혼란을 최대 한 줄이고자 했다. 정조가 승하한 후 유배 중에 저술했다는 흠흠신서는 이후 대량 인쇄돼 목민관들의 지침서로 활용됐으며, 각종 사건 해결의 단서를 찾는 데 큰 공헌을 한다. 흠흠신서가 우리 역사에 남긴 영향은 적지 않아서 오늘날 현역 판사들이 ‘판결에 참고로 삼은 책’ 중에도 포함돼 있다.

한편 정약용은 흠흠신서를 통해 조선 후기 근본주의로 흐른 유교 윤리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효제자의 덕에 대한 지나친 교육과 통제가 오히려 무지하고 맹목적인 백성으로 하여금 과격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표출하도록 종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이 놓인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자식이 죽은 부모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거나 절개를 지키지 못한 아녀자가 자결하는 것에 대해 정약용은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해 “덕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강박으로 인해 예(禮)에 맞지 않는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조선을 바꾸고자 한 실학자 정약용의 개혁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의 다산 초당
전남 강진군 도암면의 다산 초당

 

[사진] 포털사이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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