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시선을 따라 그의 생을 걷다
김홍도의 시선을 따라 그의 생을 걷다
  • 강수경 기자
  • 승인 2019.05.23 1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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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최고의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의 생애와 작품을 복합 미디어 아트로 풀어놓은 <김홍도 Alive : Sight, Insight>가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 기념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진행 중이다.

원본과 더불어 인쇄 80점에 영상 34점, 총 114점으로 이루어진 미디어 아트를 통해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한 이번 전시회는 김홍도의 시선 변화에 따라 5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도입 부분인 ‘화원의 초상’을 비롯해 ‘박달나무 언덕’, ‘궁궐’, ‘금강산’, ‘저잣거리’, ‘단원의 방’ 순의 섹션이다. 각 섹션에 해당하는 그림에 그려진 사람들과 장소의 모습을 김홍도의 시선에 따라 자세히 관찰하고 상상해 보았다.

 

조선 시대의 뛰어난 화가, 단원 김홍도

김홍도는 1745년(영조 21)에 태어나 스승 강세황에게 안산에서 그림을 배웠다. 1765년 그의 나이 21세 이전에 이미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고 28세에는 영조와 세손(정조)의 초상 작업에 참여했다. 30대가 되어서는 신선 그림을 그려 화명을 날렸으며 동시에 서민들의 일상을 담은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36세에는 정조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했고, 1783년 38세에 안기찰방(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에 임명되었다. 이후 충청도 연풍 현감에 제수되었지만 정사는 돌보지 않고 매사냥이나 즐긴다는 상소로 인해 그의 나이 50세, 연풍 현감에서 3년 만에 파직을 당했다.

55세가 되던 8월 정조가 승하했다. 1805년 61세에 중국 송나라 문인 구향수의 쓸쓸한 가을밤의 서정을 읊은 시의도 <추성부도>를 제작했고, 그 이후 전하는 그림이 없어 죽음을 맞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그는 주로 조선 후기 영조(재위 1725~1176)와 정조(재위 1777~1800)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이 문화에 큰 발전을 가져다준 시기에 활동했다.

18세기에 대표적으로 활약했던 선배 화가로는 겸재 정선이 있었는데 주로 진경산수화에 치중하여 일가를 이룬 데 비해, 김홍도는 당시 회화의 삼대 조류인 진경산수화, 풍속화와 남종화는 물론 도석과 고사 인물, 영모화조, 사군자, 초상화, 기록화를 비롯해 불화, 판화에 이르는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두루 명작을 남기는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이고도 독특한 시정을 담아 재현한 진경산수화와 조상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포착하여 그 멋과 흥, 해학을 이끌어 낸 풍속화에서 고도의 예술성과 고유의 독창성이 드러났다.

국왕인 정조의 절대적인 후원 속에서 한국적 특성이 두드러진 ‘김홍도 화풍’을 확립하여 한 시대의 양식으로까지 확산시켜 동시대와 후대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더욱이 김홍도는 시와 글, 그림과 음악 등 다방면에 걸친 교양을 한 몸에 갖추었고 이러한 자질들이 작품의 전반적 품격을 드높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그림

전시회에 막 들어서면 김홍도에 대한 소개와 프롤로그가 쓰여 있다. 마치 가이드처럼 어떤 시선으로 김홍도 전시회를 봐야 할지 말해주는 듯하다. “한 사람의 시선을 따라간다는 건 한 사람의 우주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화가의 시선이 머무른 수많은 풍경과 사람들 속에는 어떤 생각과 감정 그리고 삶이 담겨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한 사람의 우주를 이해하는 것이라니, 화가의 시선을 따라 전시회를 관람한다는 것은 굉장히 거대하고 신비로운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전 시대 사람의 자취를 현 시대 후손들이 따라간다는 것이 참으로 경이롭게 느껴졌다.

 

화원의 초상 : 마주 보다

조선 시대 시인인 홍신유(1722~?)는 “김홍도는 그 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과연 속세 가운데의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이와 같은 고로 그림 역시 그와 같다.”고 <금강산시>에서 김홍도를 표현했다. 이 표현으로 보아 김홍도는 풍채가 반듯하며 오늘날의 박보검이나 정해인 정도의 훈훈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한 선비가 올곧은 자세로 앉아 있다. 단원 김홍도의 30대 모습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1997년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에 의해 김홍도의 자화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얼굴 표정과 선비처럼 단정하고 꼿꼿한 자세가 인상적이다. 옆에 놓인 물건들은 명류로서 김홍도의 사회적 위치와 취미를 보여 주고 있다.

 

김홍도의 자화상
김홍도의 자화상

 

전시회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월하취생>이라는 작품은 미디어와 그림으로 각각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 작품은 8세기 당나라 시인 나업의 생황시의 일부로 그림 속 사내의 심사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젊은 사내가 베잠방이 옷을 입고 망건을 쓰고 파초 잎 위에 웅크리고 앉아 생황을 불고 있다. 깊은 달밤, 방 안에 쏟아지는 달빛의 애잔함을 이기지 못하고 붓 대신 술잔을 기울인 모양이다. 미디어와 그림을 비교해서 보는 것은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색감이나 구조가 사뭇 달라 처음에는 같은 그림인지 몰랐다.

 

미디어로 표현된 〈월하취생〉
미디어로 표현된 〈월하취생〉

 

 

 

 

 

 

 

 

 

 

 

 

 

그림으로 표현된 〈월하취생〉
그림으로 표현된 〈월하취생〉

 

 

 

 

 

 

 

 

 

 

 

 

 

 

 

 

박달나무 언덕 : 올려다보다

하얀 공간 속 다섯 개의 네모 틀 모두 같은 크기이지만 점점 작아지는 착시 현상이 보였다. 첫 번째 섹션으로 넘어와 보니 깔끔하고 세련된 전시 공간이 펼쳐졌다.

 

섹션1의 전시 공간
섹션1의 전시 공간

 

안산은 김홍도가 어릴 때 시간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스승인 강세황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예술가들과 교류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김홍도가 초년에 인연을 맺은 안산의 예술인들과의 교류는 그의 작품 세계를 공고히 지탱하는 데 큰 힘을 주었을 뿐 아니라, 중인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와 화원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극복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김홍도는 사대부처럼 단원이라 이름 지은 정원을 경영하고 ‘진솔회’라는 아회(아집이라고도 하는데 문인들이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나누던 모임을 의미함)를 베풀기도 했다. 문인들의 흥취가 배어 있는 단원, 박달나무 언덕은 김홍도에게 상징적 장소인 셈이다. 당대 예술인들이 모여 교류했다니, 어떠한 말들이 오고 갔을지 그 모임에 필자도 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홍도가 그의 나이 37세 때 친한 지기와 함께 자신의 집 사랑방 마루에서 벌인 아회를 기록한 그림 <단원도>는 진솔회가 어떤 분위기였을지 필자의 상상을 도와주었다. 이 그림을 통해 알게 된 흥미로운 점은, 김홍도가 그림에 ‘단원 주인 김사능화’라고 적었는데 사능은 단원 말고도 김홍도의 또 다른 호라는 것이다.

 

단원도
단원도

 

표암 강세황(1713~1791)은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진 조선 시대 문인화가이다. 그림과 글씨에 대한 당대 최고의 감식안으로 삼절(시·서·화)이라 불렸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많은 화가들, 겸재 정선이나 관아재 조영성, 현재 심사정 등의 그림에 친필로 화평을 남기기도 했다. 김홍도는 어린 시절 강세황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앞서 김홍도의 소개에서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알게 되어서 어떤 인물일지 궁금했는데, 그의 자화상이 전시되어있어 호기심을 덜 수 있었다.

 

궁궐 : 살펴보다

두 번째 섹션에는 커다란 대형 스크린이 있었다. 규장각이 건설되는 과정이 영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정조와 김홍도의 어울림을 잘 보여 준 섹션으로 정조의 업적과 맞물려 소개했다.

 

섹션2의 대형 스크린
섹션2의 대형 스크린

 

정조 하면 떠오르는 화성 원행. 정조는 을묘년 1795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동갑이었던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이 있던 화성의 현륭원으로 행차하여 회갑연을 벌였다. 화성은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 도시로 키우려는 정조의 꿈과 야망이 담겨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정조는 화성 행차를 통해 그동안 이룩했던 위업을 과시하고 신하와 백성들의 충성을 결집시켜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려고 했다. 그래서 정조는 부모의 회갑연과 함께 화성 행궁에서 자신의 친위군대를 중심으로 군사 훈련을 벌였고 과거 시험을 치러 인재를 뽑았다. 이외에도 정조는 이 행사를 통해서 가난한 백성에게 쌀을 나눠 주었고 어머니와 같은 노인들을 위해서 성대한 양로연 잔치를 베풀었다. 김홍도는 행사의 기록을 총 책임지는 화원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지휘 하에 화원들이 합작으로 행사를 기록했다. <화성원행도병>은 이 행사를 8폭 병풍에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화성원행도병
화성원행도병

 

각 폭은 화성에서 이루어진 행사를 묘사하고 있다. 첫 번째 폭에는 정조가 화성에서 첫 번째로 치른 공식 행사로, 화성 안의 공자를 모신 사당에 참배하는 모습이 담긴 <화성성묘전배도>가 그려져 있다. 두 번째 폭은 낙남헌에서 문과와 무과에 급제한 사람을 임명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성단 가운데 정조의 자리가 있고, 그 아래로 임명장인 홍패안과 머리에 꽂는 어사화가 놓여 있는 <낙남헌방방도>가 그려진 것이다. 세 번째 폭에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잔치를 벌이는 <봉수당진찬도>가, 네 번째에는 연로한 대신과 수원에 거주하는 노인들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낙남헌양로연도>가, 다섯 번째 폭에는 <서장대성조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는 정조가 서울 호위 도시로 새롭게 조성된 화성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는 군산 훈련 행사 장면이다. 이어, 활쏘기를 하고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득중정어사도>, 시흥행궁으로 들어가는 어가 행렬을 묘사한 <시흥환어행렬도>, 정조의 가마가 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너는 <한강주교환어도>가 순서대로 그려져 있었다. 8폭 모두 그림 속 수천 명의 인물과 화려하고 웅장한 연출, 회화성이 뛰어난 작품이었고 삐뚤어진 곳이나 울퉁불퉁한 곳 하나 없이 어떻게 이렇게 일렬로 사람을 표현했는지 놀라웠다. 그림을 통해 당시의 장엄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옆 공간에는 화성 원행을 미디어로 표현해 놓기도 했다. 그 뒤편에 정조와 김홍도의 채팅 내용을 담은 영상을 보임으로써 관람객들에게 재미를 선사했다. 그 영상은 필자가 예전에 보던 웹툰 <조선왕조실톡>을 떠올리게 했다. <조선왕조실톡>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모바일 메신저의 대화로 재해석한 웹툰이다. 정조와 김홍도의 대화에서 정조의 반응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특히 “아 레알”, “오호, 역대급 띵작이로구나!”라는 말은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왕이 친근하고 인간미 넘쳐 보였다.

 

미디어로 표현한 화성 원행
미디어로 표현한 화성 원행

 

금강산 : 굽어보다

한 공간을 다 차지하던 큰 화면이 있었다. 금강산의 모습을 그린 영상으로 3D 느낌이 났다. 3D 안경을 쓰고 보면 정말 금강산에 와 있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김홍도의 금강산 화첩은 한국적인 산수화풍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발전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전에 나왔던 다른 화가들의 금강산 작품들에 비해 묘사가 훨씬 치밀하고 구체적이며 사실적이었다. 앞 세대의 사대부 화가인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김홍도의 그림을 비교해 보면 나무들과 거대한 절벽, 굴곡 등 세세하고 정밀하게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금강산 진경산수화
금강산 진경산수화

 

저잣거리 : 꿰어 보다

네 번째 섹션에 들어서니 거대한 영상이 펼쳐졌다. <행려풍속도 8곡병>이었는데 그림도 색감도 아름다웠다. 알록달록하지만 채도가 낮은 색들이 조화롭게 어울려 눈이 편하면서도 시각을 자극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행려풍속도 8곡병>은 프랑스 기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통적인 산수도나 경직도가 풍속화와 결합된 과도기적 형태를 보여 주는 작품이었다. 이전의 사대부적, 관념적 취향이 두드러진 풍속화에서 탈피해서 서민적, 현실적 취향이 확실하게 드러나 있다. 이 병풍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들은 당시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 흥미롭고도 귀중한 자료이다. 병풍 8폭 중 5폭이 한양 도시인들의 생활상을 담고 있어 당시의 한양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행려풍속도 8곡병〉 일부
〈행려풍속도 8곡병〉 일부

 

KBS <역사저널 그날> 69회의 ‘김홍도, 정조 시대를 화폭에 담다’ 편을 보면 김홍도의 그림은 민생 보고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김홍도에게 백성들의 일상을 그려 오게 한 정조는 이를 국정 참고 자료로 활용했다고 한다. 김홍도의 그림 속 의복을 보면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다. 민저고리, 바지, 도포, 초립 등 다양한 복장을 통해 평민과 양반 자제들이 함께 공부하는 서당의 모습은 경제 발달로 여유 있는 평민들이 늘어나면서 변화된 모습이었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각자 다른 표정과 행동들이 묘사된 해학적인 작품들로, 사회 각층의 발랄한 정서를 표현하여 보는 즐거움이 있다.

전시회 어느 한 구석에는 관람객들이 눈치채기 쉽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깨알 같이 조그마한 공간이 있었다. 공간 속에는 미니어처로 만든 술상과 서랍장이 있었는데, 모양이 귀엽고 마치 비밀의 공간을 찾아낸 느낌이 들었다.

 

미니어처로 만든 술상과 서랍장
미니어처로 만든 술상과 서랍장

 

단원의 방 : 응시하다

베옷을 입은 선비가 그려진 <포의풍류도>. 베옷을 입는다는 것은 벼슬을 하지 않고 산다는 뜻인데 이러한 선비를 일러 ‘포의처사’라 했다. 화원으로서 절정기를 거치고 생의 말년으로 접어든 김홍도의 초탈한 내면세계가 엿보인다.

 

포의풍류도
포의풍류도

 

<송하맹호도>와 <모구양자도>, <황묘농접도>는 동물들의 털을 표현한 섬세함과 사실적인 표현 기법을 통한 표정 등의 모습이 매우 돋보인다. 자연과 더불어 살았을 것 같은 김홍도의 말년을 염두에 두고 이 마지막 섹션에 배치한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김홍도의 초탈이 잘 드러난 그림으로는 그의 마지막 그림인 <추성부도>를 꼽을 수 있다. 이 그림을 보자마자 쓸쓸함이 전해지며 그가 정말로 인생을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왼쪽부터) 송하맹호도, 모구양자도, 황묘농접도
(왼쪽부터) 송하맹호도, 모구양자도, 황묘농접도

 

당신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프롤로그와 마찬가지로 에필로그 또한 인상 깊었다.

“수백 개의 눈을 가진 화가. 그가 포착해 낸 세상은 때론 웅장하고, 때론 소소하며, 때론 엄숙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에 밝음이 자리한다.”

김홍도의 그림은 카멜레온 같은 매력이 있다. <화성원행도병>과 금강산 그림을 보았을 때는 웅장했고 저잣거리를 표현했던 그림들은 소소했으며, <월하취생>의 그림은 어쩐지 엄숙했다. 이렇듯 각자 색다른 매력들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김홍도의 그림에는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밝음이 있었다. 그의 그림은 그림체라든지 색감이라든지 눈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필자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조선 시대 임금은 세종과 정조이다. 세종과 정조는 백성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개선하려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했던 임금들이었다. 정조라는 그 훌륭한 임금 옆에는 백성들의 일상을 보여 주는 화가 김홍도가 있었다는 것을 이번 전시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동안 필자가 국사를 공부할 때 무미건조하다고 느꼈던 김홍도라는 사람이 알고 보니 조선 시대 최고의 화가였고, 그의 인간적인 생애를 알게 되니 더욱 매력적이고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홍도 Alive : Sight, Insight

위치        용산 전쟁 기념관 1층 기획전시 1, 2실

관람 시간  2019년 2월 24일까지 / 10:00~18:00 (입장 마감 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 요금 무료

관람 방식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문화의 날’ 운영 시간~20:00 (입장 마감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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