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 맞은 백제 왕실 사찰, 그 속에서 발견된 악귀
벼락 맞은 백제 왕실 사찰, 그 속에서 발견된 악귀
  • 손아라 기자
  • 승인 2019.05.23 16: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악귀상 두부(惡鬼像頭部) (출처 국립전주박물관)
악귀상 두부(惡鬼像頭部) (출처 국립전주박물관)

 

털로 뒤덮인 얼굴, 튀어나온 눈, 들창코와 악다문 이빨, 백제의 악귀다. 강한 인상을 쓰고 있는 악귀의 입체감 있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바로 익산 제석사지에서 발견된 악귀상이다. 제석사는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 잘 만든 소조상이 있을까?

 

'제석사'명 기와 (출처 문화재청)
'제석사'명 기와 (출처 문화재청)

 

백제 무왕의 사찰, 제석사

제석사지는 백제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유적으로 손꼽힌다. 1993년 익산 왕궁면 일대 절터에서 ‘제석사’명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된다. 이후 최근까지 이루어진 발굴 조사를 통해 제석사지에 관한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제석사는 7세기 백제 사비기에 창건되었다.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왕궁 부근에 창건한 절이다. 제석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기록으로는 <관세음응험기>가 유일하다. 여기에는 사찰 이름과 함께 화재로 소실된 시기, 탑 초석 안에 부처의 사리를 보관한 사리 장엄구를 수습하여 다시 절을 세운 내용 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래는 <관세음응험기>의 한 대목이다.

 

“百濟武廣王 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歲次己亥 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 佛堂七級浮圖 乃至廊房 一皆燒盡 (후략)”

 

해석하면 “백제 무왕이 지모밀지(익산의 옛 지명)로 천도하면서 새로 절을 짓다. 정관 13년(무왕 40년, 639년) 11월에 하늘에서 커다란 벼락이 떨어져 불당과 7층 목탑 및 승방이 모두 불탔다.”고 전한다.

2005년에는 제석사지에서 북동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서 중요한 유적이 발견된다. 바로 제석사가 화재로 탄 건축 부재, 불상 조각 등 쓰레기를 한데 모아 버린 폐기장 유적이다. 이로써 <관세음응험기>의 내용이 사실을 기반으로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익산 천도에 대해서는 아직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실제 천도했는지, 별도의 도읍인지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확실한 점은 무왕은 정치적 중심지를 익산 지역으로 삼았고, 새로이 경영하는 데 있어서 제석사를 사상적 기틀로 삼고 계획적으로 설치했다는 것이다.

 

하늘의 우두머리 ‘제석천’

고대 건축물은 권위를 나타내고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제석사는 불교의 수호신 ‘제석천’이 중심이 되는 절이다. 그렇다면 무왕은 천도에 있어 ‘제석천’을 사상적 중심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석천은 ‘하늘인 도리천의 주인으로, 수미산 중턱의 사천왕을 거느리고 불법과 불제자를 보호한다’는 불교의 천신이다. 더불어 <삼국유사>에도 ‘제석천’에 관한 기록이 있다.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이는 “옛 기록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함)의 서자 환웅이란 자가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고 하여 국조 신앙의 단군의 할아버지 환인과 제석 신앙의 제석천을 결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환인과 제석천의 공통점인 ‘하늘’ 그리고 ‘통치’의 신으로서 동일시된 것으로 본다.

제석사는 왕실의 원찰이면서, 제석 신앙이 국조 신앙과 결부된 관점에서 보면 백제의 국조를 모신 매우 신성한 사찰이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익산 경영에 필요한 정신적 이념을 공고히했을 것으로 본다. 결국 제석사는 왕실의 전통성을 나타내며 왕권과 국가의 번영·영속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된 절인 셈이다. 이후 백제는 패망하고 제석사는 통일 신라 시대에 정역사(丁易寺)로 개칭된다. 이는 통일 신라 왕권이 제석사의 존재감을 의식하고 전통성을 흐리게 하는 목적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소조상의 황금기

신성한 사찰인 제석사에서는 불상 하나, 건물의 작은 장식 하나도 소홀히 만들지 않았다. 특히 악귀상은 손으로 빚은 소조상으로 사실감 있는 표현이 눈에 띈다. 온 얼굴에 털이 뒤덮여 있고 무엇에 놀랐는지 눈과 코가 커져 있다. 그러나 비명은 지르지 못하고 이를 꽉 물고 있다. 입술에는 긴장감까지 느껴진다. 마치 윽! 하고 고통스러운 마음과 놀란 심정을 형상으로 표현한 것 같다.

이 악귀는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할까? 다시 자세히 살펴보면 한쪽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이는 악귀상이 생‘ 령좌’의 일부 조각으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생령좌는 사람에서부터 악귀, 동물 등 모든 생물을 표현하는데, 악(惡)을 표현하기 위해 형상을 무섭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사천왕과 팔부중의 발 아래 밟혀 있다.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절, 즉 부처를 수호하기 위해 악을 밟음으로써 악은 신성한 부처에게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익산 제석사지에서 출토된 천부상 두부(天部像頭部) (출처 국립전주박물관)
익산 제석사지에서 출토된 천부상 두부(天部像頭部) (출처 국립전주박물관)

 

제석사에서 만들어진 악귀상은 백제 사람들이 생각했던 악의 모습이었다. 악귀에서는 생동감이 느껴졌다면, 반면에 제석사지에서 발견된 천부상에서는 고요함이 느껴진다. 단정하게 올린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가늘게 감은 눈, 작은 입술, 부드러운 얼굴형에서 우아함이 느껴진다. 악귀상과 천부상의 극명한 모습을 통해 백제 소조상 장인의 예술적 미가 최고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제석사지에서 출토된 소조상은 손으로 만들어 섬세하게 표현됐다. 더불어 소조상을 크고 단단하게 하기 위해 상 내부 점토에 섬유질의 끈, 새끼줄, 마포를 넣어 경도를 단단하게 했다. 또한 주목할 것은 소조제자입상의 옷의 표현에서는 여러 겹의 점토층을 덧대어 소조상의 내부를 단단하게 했는데, 이는 독창적인 기술력이다.

익산 제석사지와 더불어 익산 미륵사지, 부여 정림사지, 부여 능산리사지 등 소조상이 출토된 유적지를 통해 백제의 소조상은 6세기대에 만들기 시작해 7세기대에 황금기를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제석사지 폐기장에서는 최근에도 다양한 소조상들이 출토됐다. 동물 모양의 악귀상, 찡그린 나한상 소조상은 백제 예술의 정점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의 악귀상을 통해 백제의 악귀를 사실적으로 보고 느끼게 되었다. 또한 이렇게 다양하고 화려한 소조상들이 장식된 제석사는 무왕의 사찰로써, 당시 최고의 기술력과 정성이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작은 편의 일부지만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유는 특이한 외모뿐만 아니라 그 속에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