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근대화의 시작을 알리다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호텔
인천, 근대화의 시작을 알리다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호텔
  • 손주희 기자
  • 승인 2019.05.2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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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개항박물관 전시물. 대불호텔 모습
인천개항박물관 전시물. 대불호텔 모습

 

1883년 인천항. 격동의 근대화를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변화의 물결은 작은 어촌마을에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매일 수많은 외국인이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위한 숙박시설도 들어섰다. 그중에 오랜 여행 끝에 낯선 조선 땅을 밟은 이방인들의 노곤함을 달래주던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이 있었다.

 

2017년 우리나라의 커피 소비량은 10조 원을 돌파하였다. 이는 국민 전체가 똑같은 양의 커피를 마신다고 가정했을 때 1인당 연간 512잔을 마시는 정도의 물량이다. 커피업계에서는 유럽과 비교한다면 국내 커피 시장의 규모는 아직도 더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매혹적인 서양음료 가배에 매료된 사람들

현대인들의 대표적인 기호식품으로 사랑을 받는 커피는 언제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일까? 기록을 살펴보면 커피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1890년 전후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흔히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마신 고종이 그 맛에 매혹되어 경운궁에 돌아온 후에도 정관헌에서 서양음악과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사실과 조금 다르다. 미국인 여의사 애니 앨러스 벙커는 1886년 가을에 명성황후의 진찰하기 위해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차와 커피를 마신 것을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다. 이는 궁중에 커피가 들어온 시기가 아관파천보다 무려 10년이 앞섰음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양반들과 부유층 사이에서도 1880년대 이미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는 기록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고종 역시 아관파천보다는 한참 전에 커피를 접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시대에도 지금처럼 일반인들이 출입하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던 장소가 있었을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방이 활성화된 것은 1920년대부터였다. 그보다 앞선 19세기 말, 커피를 보급하는 데 앞장선 장소가 있었으니 당시 새롭게 등장한 근대식 호텔이었다. 지난해 성황리에 종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왔던 ‘글로리 빈관’, 조선 시대에 정말로 이런 곳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된 근대식 호텔이 등장하였다. 이 건물의 모델이 되었던 곳은 바로 덕수궁 옆 현재 서울 정동에 위치해 있던 ‘손탁호텔’이다. 1902년 독일 여성 손탁이 고종으로부터 가옥을 하사받고 그 자리에 새롭게 건립한 서양식 호텔로 외국인들을 위한 집회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건립된 서양식 호텔이 개항지 인천에 있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대불호텔’은 인천항을 대표하던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다. 이런 서양식 호텔들은 당시 ‘가배’ 또는 ‘양탕국’이라고 불리던 신비롭고 매혹적인 음료인 커피를 전파하는 데 앞장섰던 호텔식 다방이기도 하였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출처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출처 tvN)

 

조선의 숙박 시설과 호텔의 등장

조선 시대에는 비교적 숙박시설이 활성화되기 어려웠는데 농업이 중시되고 상업이 천시되었던 사회적 구조의 영향이 컸다. 더군다나 당시 양반집에서는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라 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숙박이 필요한 양반들은 어느 지역의 양반집을 찾아 쉴 곳을 청하면 되는 일이었다. 재력이 있던 양반들의 수요가 없었으므로 숙박업의 발달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조선 시대에 숙박시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분과 기능에 따라 숙박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나누어져 있었는데, 흔히 알고 있는 ‘주막’이 그중 하나였다. ‘국밥 한 그릇이면 숙소가 공짜’였던 주막은 식당과 주점, 그리고 여관의 기능을 겸비한 숙박시설이었다. 비록 숙박시설은 취약했지만 가장 서민적이며 대중적인 숙소로 애용되었는데 보부상이나 과거를 보러 가는 양반들이 주 고객이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잠시 쉬어간다고 하여 ‘봉놋방’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객주’와 ‘여각’은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숙박시설이었다. 주요 목적은 상인들의 물건을 위탁받아 매매를 주선하거나 물건을 보관 또는 운송하는 일이었으나 숙박도 같이 겸하였다. 조선 후기 유통경제가 발전하면서 성장하게 되었으며, 19세기 말 개항 이후에는 외국 상인들과의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공적인 임무를 갖는 숙박시설로 ‘원’과 ‘관’이 있었는데, ‘원’은 지방에 파견된 관리나 상인 등 내국인들을 위한 편의시설이었다. 현재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도성 근교에 위치한 보제원, 홍제원, 이태원 등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관’은 외국 사신들을 대접하기 위한 특별한 숙소였다. 명나라 사신은 ‘태평관’에서 여진 사신은 ‘북평관’에서 일본 사신은 ‘동평관’에서 머물렀으며 묵는 대상에 따라 위치와 시설이 달랐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서양의 문물이 물밀듯 들어왔다. 부산, 원산항에 이어 1883년 인천항이 세 번째로 개항되었다. 작은 어촌마을이었던 제물포로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와 외교관, 장사꾼들이 밀려들어왔다. 도성 한양 가까이에 인접해 있던 인천항의 개항은 실질적인 조선의 개항이었다.

조선에는 점차 교통, 통신, 의료 등 각 분야에 근대 문물이 들어왔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 모습도 바뀌어갔다. 그리고 조선에는 낯선 문화를 가진 외국인들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서양식 숙박시설도 생겨났다. 서양식 호텔의 시발점은 1888년 인천에 세워진 ‘대불호텔’이었다.

 

인천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 들어서다

1883년 인천항(옛 제물포)을 개항하였으나 조선 땅을 밟은 대부분의 외국인은 한양으로 가고자 하였다. 당시 인천에서 한양까지는 말을 타고서도 한나절이 걸렸다. 결국 오랜 여행 끝에 인천항에 도착한 외국인들에게는 하루 동안 묵을 숙소가 필요했지만 당시 작은 어촌마을이었던 제물포에는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일본과 청은 1883년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을 체결함으로써 인천항에 조계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인천항 인근에 거주가 가능해진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 히사타로는 1884년 현재의 인천 중구 중앙동에 2층짜리 목조건물을 지어 호텔을 개업한다. 이후 호텔을 찾는 수요가 늘어나자 1888년 붉은 벽돌로 된 3층짜리 서양식 건물을 신축하고 본격적인 호텔사업에 들어가게 된다.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의 시작이었다. 대불호텔은 서양인들을 위한 호텔로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이했고 총 11개의 침대와 테이블을 갖춘 객실과 연회장을 별도로 갖췄으며 서양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였다. 비록 주변의 다른 호텔보다 객실료는 비쌌지만 편안한 시설과 서비스로 인기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불호텔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기록은 몇 군데서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배재학당을 세운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의 비망록 <한국에서 우리의 사명>에서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호텔 방은 편안할 정도로 넓었다. 테이블에 앉자 잘 요리되어 먹기 좋은 서양 음식이 나왔다.”고 한다.

1900년 인천과 경성을 잇는 철도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철도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으며 인천항의 숙박산업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경인 철도의 개통으로 인천에서 경성까지는 고작 1시간 40분이면 갈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외국인들이 더 이상 인천항에서 숙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대불호텔 (출처 인천역사문화총서16(근대문화로 보는 한국 최초 인천 최고))
대불호텔 (출처 인천역사문화총서16(근대문화로 보는 한국 최초 인천 최고))
인천개항박물관 전시물. 대불호텔거리
인천개항박물관 전시물. 대불호텔거리

 

또한 러일전쟁 이후 서양인들의 왕래는 급격히 감소하였고 결국 대불호텔은 경영난으로 인해 문을 닫게 되었다. 1918년 중국인에게 인수되어 북경음식점인 중화루로 운영되면서 다시 한 번 명성을 얻게 되지만 60년대 이후 청관거리(현 차이나타운) 쇠퇴로 1978년 건물이 철거되고 최근까지 주차장으로 사용되었다.

 

다시 돌아 온 대불호텔

2011년 주차장이었던 곳에 상가를 짓기 위한 신축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작업을 하던 중 붉은 벽돌 구조물 잔해를 발견하게 되면서 공사는 중단되고 만다. 문화재청은 발굴 조사를 통해 지자체에 원형 보존 조치를 권고하였다. 그 후 ‘대불호텔 터 활용 사업’으로 사업비 26억 원을 투입하여 진행된 대불호텔 재현사업은 2018년 3월 완공되어 현재 시민들에게 박물관으로 개방되었다.

철저한 역사적 고증 없이 문화재를 복원하면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현재 대불호텔은 평면도와 일부 설계도만이 남아 있어 호텔 내부를 그대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복원이 아닌 ‘재현’사업으로 추진되었다. 그럼에도 무분별한 복원인지 가치가 있는 재현인지에 대한 평가는 여전한 논란의 여지로 남아 있다. 현재 대불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라는 타이틀로 당시 근대식 호텔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박물관의 모습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관리하고 보존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역사적 가치는 물론 지역사회의 실익을 골고루 살폈을 때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를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40년만에 어렵게 돌아온 대불호텔이 그 가치를 잃고 더 이상 사라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불호텔 객실 재현
대불호텔 객실 재현
대불호텔 연회장 재현
대불호텔 연회장 재현

 

인천항이 개항된 지 135년이 흘렀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그렇게 시대는 급변해 왔다. 조선이 5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을 감안하면 지난 100년의 역사는 실로 놀라울 정도의 변화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천 중구 역시 그 흐름에 따라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였다. 작은 어촌 마을에서 근대화의 시초를 이루면서 발전했으나 한때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대사회와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현재 중구는 다시 요동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나라에 얼마 남지 않은 근대건축물에 대한 관심과 지역적 특색을 잘 보존한다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장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대불호텔과 생활사박물관
대불호텔과 생활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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