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문화재 환수에 대한 이야기 1
빼앗긴 문화재 환수에 대한 이야기 1
  • 이성관 기자
  • 승인 2019.05.2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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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 소재 문화재 환수의 원칙에 대해서는 국외 소재 문화재 환수의 원칙 1, 2에서 정리한 바 있다. 그 기사들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말을 간추려 이야기하자면 국외 소재 문화재라도 무조건 환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환수 자체보다 보존 및 연구, 교육 등 활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간추린 설명만으로는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부디 앞선 두 기사를 보고나서 이 글을 읽기를 바란다.

 

국외 소재 문화재 환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와 관련하여 여러 미디어에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혜문스님’이다. 혜문스님은 현재 환속하여 김영준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혜문이라는 이름을 벗은 후 문화재 환수 활동이 예전보단 활발하지 않아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라는 단체가 있기 때문에 관련한 거의 모든 일을 재단에서 총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개별 사안에 따라 환수위원회 등을 만들어 운영했다. 자세한 활동 내용은 국외 소재 문화재 환수의 원칙 2에서 소개한 바 있다. 혜문스님의 환속 이후 미디어의 관심도 예전 같지 않게 됐다. 국외 소재 문화재 환수는 명확한 원칙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 그 원칙 중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그 문화재가 국외로 나가게 된 경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필요에 의해 일부러 내보낸 문화재를 구태여 환수할 필요는 없고, 그런 환수에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힘을 실어 주어야 할 명분도 없다. 하지만 만약 문화재를 억울하게 약탈을 당했다든지, 어떤 시기의 국제관계와 힘의 논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내줄 수밖에 없었다면 환수를 위해 노력할 명분과 당위성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재 환수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간곡하게 호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약탈당한 문화재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리고 그간 환수된 국보급 문화재는 어떻게 활용·보존되고 있을까?

먼저 환수해야 할 문화재에 대해 알아보자. 물론 빼앗긴 문화재가 한두 점이겠냐 마는 그중에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이순신 장군의 쌍룡검과 다보탑의 돌사자상을 택하겠다. 그 많은 약탈 문화재 중 이 둘을 택한 이유는 국민의 관심이 높을 만한 문화재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온전한 모습으로 확인되었다가 그 후 사라졌기 때문에 여전히 보관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 그리고 약탈 문화재임에도 외교적 이유로 그간 환수 노력에 소극적인 측면이 의심된다는 점 때문이다.

먼저 쌍룡검을 살펴보자.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현충사에는 장군의 검이 보관되고 있는데, 이는 실제 사용한 검이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검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두고 말이 많았던 현충사의 검은 그 길이가 197.5㎝에 무게가 5.3㎏에 달하는 큰 검이다. 이는 의전용 검으로써 전장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검의 사용 여부가 논란이 되었던 것은 난중일기에 적힌 이순신 장군의 시에 ‘큰 칼 옆에 차고’라는 언급 때문이었다. 큰 칼은 얼마나 큰 칼인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근 2m가량의 검만 남아 있으니 사람들은 실제로 이순신 장군이 이 칼을 옆에 찬 것으로 생각하기 쉬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키가 3m정도라면 모를까 그 칼을 옆에 찬다면 땅에 질질 끌면서 걸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 이순신 장군의 키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수군의 평균 키가 150㎝도 안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순신 장군의 키가 3m 가까이 되었을 것이란 가정은 있을 수 없다.

 

이충무공 장검
이충무공 장검

 

그렇다면 과연 이순신 장군이 진짜 사용했던 검은 어디에 있을까? 이순신 장군의 검은 1910년까지 조선왕실의 궁내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에 발간된 <조선미술대전>이라는 도록에 이순신 장군의 칼이라고 소개된 쌍룡검의 사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쌍룡검에는 ‘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라는 명문이 적혀 있는데, 이를 풀이하자면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이다.

 

1910년까지 왕실에 보관되었던 이순신 장군의 쌍룡검
1910년까지 왕실에 보관되었던 이순신 장군의 쌍룡검

 

쌍룡검은 이름에 걸맞게 두 자루인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쌍룡검 두 자루 모두 사라졌다. 혜문스님은 환속 전에 쓴 자신의 저서에서 이 쌍룡검을 나라의 신물이라 칭하면서 그것을 찾는 것이 “진리와 구도의 길을 찾는 것과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필자는 진리와 구도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일본 어딘가에 이 검이 존재한다면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제자리를 찾도록 힘쓰는 것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선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는 다보탑의 사라진 돌사자상을 들 수 있다. 다보탑은 불국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서도 특이한 형태를 가진 석탑인데 그 구조가 목탑을 연상시킬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이 다보탑에는 돌사자상이 4개 있었는데, 이 중에서 3개는 일제강점기 이후 사라지고 현재는 하나만 남아 다보탑을 지키고 있다.

 

다보탑의 돌사자상
다보탑의 돌사자상

 

돌사자상은 1902년에는 4개가 다 존재했다는 증언이 있다. 또한 1916년에 발행된 <조선고적도보>에는 상태가 좋았던 돌사자상 2개가 사라지고, 2개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29년 소설가 현진건이 동아일보의 기고한 글에는 남은 두 개 중 한 개가 사라지고 없다고 전했다. 결국 일제강점기 내에 세 개 모두 도난당했다고 볼 수 있다. 현진건은 그 기고 글에서 돌사자 둘은 동경의 한 요리집 앞에 있고, 하나는 영국에 있다고 하더라는 말을 썼다. 앞으로 돌사자상의 행방을 찾아 환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기록이지만 이 기록을 토대로 적극적인 환수 활동에 나선다는 이야기는 아직 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로 돌아온 조선왕조실록과 조선 왕실의궤 등은 무엇이며, 어떻게 보존·연구·활용되고 있을까?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일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일부

 

먼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에 대해 알아보자. 사고는 실록을 보관해놓은 창고로 오대산사고는 1606년(선조 39)경에 설치됐다. 기록을 중시했던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나머지 실록들이 소실되자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4부를 다시 간행한다. 그리고는 강화·태백산·묘향산·오대산 등지에 사고를 새로 건축하여 서울의 춘추관사고와 함께 5곳의 사고에 실록을 보관하도록 했다.

오대산 사고에는 태조에서 철종까지의 실록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관동대지진 당시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됐다. 현재는 서울대에 이관된 27책과 관동대지진 때 연구소로 옮겨져 소실을 면한 47책이 2006년에 환수되어 총 74책이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오대산 사고본이 아니더라도 2,077책이 국내에 남아 있어 환수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있기도 했으나 환수 즉시 국보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수시로 전시하여 대중들이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선왕실의궤
조선왕실의궤

 

조선 왕실의궤란 조선 시대 왕실·국가 행사가 끝난 후에 논의·준비과정·의식절차·진행·행사·논상 등에 관해 기록한 책을 뜻한다. 그림을 그려 재현하고 그 그림에 설명을 붙여 실제 모습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 왕실의궤는 2011년 프랑스에서 외규장각 의궤 297책을 임대의 형식으로 반환한 것과는 달리 일본에서 보관하고 있던 1,205책 모두를 완전 반환받은 환수문화재 운동의 쾌거였다. 그리고 의궤 반환을 하는 과정이 남북한의 공조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점은 더욱 뜻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의궤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을 열어 환수된 책 모두가 2011년 7월 19일부터 9월 18일까지 2달여간 전시됐고, 현재는 이를 본떠서 그대로 재현한 영인본도 제작하고 있다.

문화재는 환수보다 환수 이후 보존 및 활용이 더 중요하다. 향후에도 약탈에 의한 반출문화재 환수는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지만 환수 이후 그 문화재 의미와 가치를 적극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대책 마련 및 계획 수립도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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