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 세계를 지배하다?
색(色), 세계를 지배하다?
  • 김도윤 기자
  • 승인 2019.05.2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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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상징하는 바는 인류 문명에 따라 변화했다. 어떤 색은 귀족을 상징하는 색이었다가 폭력을 당한 여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액운을 내쫒는 상스러운 기운으로 인식되는 색도 있다. 색의 상징성은 그뿐만이 아니다. 과거 색이 소수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오늘날 색은 사람의 개성을 나타내거나 문화 현상을 상징한다. 때문에 요즘 세상은 색으로 정의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보라가 왕족을 상징할 수밖에 없던 이유

오래전부터 서양에서 보라색은 왕족을 상징했다. 오늘날 보라색은 빨강과 파랑을 섞으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색이지만 과거에는 가장 구하기 힘든 염료였다. 오죽했으면 ‘귀한 태생’을 영어로 ‘born in the purple’이라고 표현하겠는가. 보라색이 매우 까다로운 색이라는 것은 어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처음 보라(Purple)색은 페니키아의 도시 티레에서 나는 색이라고 해서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로 불렸다. 티리언 퍼플 1그램을 얻으려면 티레에서 서식하는 바다달팽이 1만2천 마리가 필요했다. 이는 양식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작 문제가 된 것은 까다로운 절차 방식과 노력 대비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을 얻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점이다. 티리언 퍼플은 으깬 바다달팽이에서 나온 점액을 양털에 태운 재와 오줌에 섞어 열흘 동안 발효시킨 다음 공기와 접촉시켜야만 얻을 수 있다. 바다달팽이 종에 따라 빨간색에 가깝거나 파란색이 나오기도 했다. 오늘날 보라색을 검색하면 ‘Purple’ 내지는 ‘Violet’이 뜬다. 이는 자주색, 자홍색, 암갈색 등 보라색에 대한 정의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라색의 합성 원료는 담자색(Mauve)으로 불렸다. 물론, 색 전문가들은 담자색을 보라색과는 전혀 무관한 색으로 주장하고 있다. 어쨌거나 티리언 퍼플은 금보다 20~30배 비쌌다. 서민들은 너무 비싸서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일부 귀족들은 티리언 퍼플 특유의 냄새 때문에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원료 특성상 생선 비린내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과거 왕족이나 교황만이 보라색을 사용했다. 대중화되어 희소성이 떨어진 오늘날에도 왕족이나 종교 행사에 보라색을 사용하는데, 전통 절차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같은 계층 사이에도 존재하는 색의 차이

서구에서 보라색이 왕을 상징했다면 동양에서는 황금색이나 빨간색이 천하 지존을 의미한다. 동양에서는 우주 만물의 기운을 오방색으로 나누는데 그중 황색은 대지를 뜻하며 중앙에 자리해 있다. 중국인들에게 중원 지대의 중앙 자리는 황제를 의미하기도 했다. 때문에 중국에서 황색은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한반도의 왕들은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지에 따라 왕의 곤룡포 색이 달라졌는데, 대체로 형제 관계 내지는 군신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적색 곤룡포를 입었다. 고려 시대 왕과 조선을 건립한 태조만이 황색과 푸른 곤룡포를 걸쳤다. 색의 차이는 서로 다른 계층뿐만 아니라 같은 계층 사이에서도 서열을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 시대 관료의 상복은 정1품부터 정3품까지는 홍색, 종3품부터 정6품까지는 청색, 그 아래부터는 녹색으로 규정됐다. 상복 색이 조금씩 달라진 조선 후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경국대전에 나온 규정을 따랐다. 이러한 관복에 대한 규정은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뒤 전부 변했다. 1890년대 갑신·갑오·을미 3차례의 의제 개혁으로 관복 색은 흑색 하나로 통일됐으며 1900년 4월에는 서구식 복식으로 대체됐다. 그리고 3·1 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 통치를 단행하면서 그마저도 사라졌다.

 

같은 색, 의미가 같기도 다르기도 해

색은 동양과 서양 혹은 나라마다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빨간색이 액운을 막아 주는 색이다. 귀신들이 싫어한다는 팥도 붉은색이고, 액운을 막아주는 부적의 글씨 역시 빨간색이다. 동양에서는 빨간색이 양기를 상징하는데, 붉은 양기가 음의 기운이 강한 액운이나 귀신 등을 막아 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빨간색은 악마의 색이다. 빨간색은 악마로 형상화됐으며, 요한 계시록에는 ‘붉은빛 도는 짐승’이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이는 빨간색이 ‘성’을 상징해 유혹의 색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됐기 때문이다. 재미난 사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이전 로마가 다신교를 숭상할 때에는 동양처럼 액운을 막는다고 해서 빨간색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빨간색처럼 인식이 극과 극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검정을 ‘암흑’ 내지는 ‘죽음’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미국권의 사신이나 동양의 저승사자도 검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이들이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됐기 때문이다. 2016년 처음 발생한 검은 시위 역시 여성 인권의 죽음 혹은 죽은 여성 인권을 애도하는 뜻으로 시위 참가자들이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왔다.

 

 

하나의 현상을 함축적으로 상징

때때로 색은 열 마디 말 그 이상을 의미한다. 색에 함축된 상징성 때문이다. 때문에 오늘날 시위 현장에서 대체적으로 색이 통일된 모습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노란 나비와 노란 리본이다. 노란 나비는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고, 노란 리본은 4·16 세월호 참사를 의미한다. 흥미로운 점은 국내외에서 노란 리본을 어떠한 메시지를 상징하는 데에 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사용됐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노란 리본에는 전쟁에 참가한 남편이나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반면, 페르시아어로 ‘노란 얼굴’은 ‘겁쟁이’를 뜻한다. 이처럼 노란색에 다양한 뜻이 숨어 있듯 오랫동안 귀족을 상징해 온 보라색은 오늘날 가정 폭력을 뜻하기도 한다. 보라색이 멍과 색이 비슷하다는 이유에서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 상당수가 여성이다 보니 간혹 일반 여성으로 상징 범위를 넓히기도 한다. 여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색으로 알려진 분홍은 사실 19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여성보다는 남성을 상징하는 색에 가까웠다. 실제로 분홍은 나치가 남성 동성애자에게 낙인찍은 역삼각형의 색이기도 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알록달록한 무지개 색이 동성애자를 상징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오늘날 ‘분홍=여성’이라는 인식으로 고착화된 것은 1927년 미국 아동 의류에서 색을 둘러싼 충돌을 완화하기 위해 소녀들은 분홍색이라고 선전하기 시작하면서 비롯됐다.

 

차별하는 인류를 ‘상징’

이처럼 하나의 색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그중에는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비롯된 선입견도 담겨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에는 살구색을 ‘살색’이라고 지칭했다. 살색은 살결 색을 뜻했다. 인류의 종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중 이 살색에 속하는 피부색을 가진 종은 백인종과 피부가 흰 편인 황인종뿐이었다. 흑인종을 업신여기는 우리의 그릇된 인식이 색을 규정할 때 나타난 것이다. 물론 근래 인권 위원회에서 이를 문제 제기하여 살색은 살구색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러한 차별은 사회에서도 나타난다. 오늘날 신분 제도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같은 관료들 사이에서도 관복 색이 달랐던 것처럼 직업군에 따라 상징 색이 다르다. 20세기 초 서구에서는 사무직 근로자가 증가했다. 이들이 입고 있던 와이셔츠 색이 하얗다는 점을 고려해 화이트칼라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와 달리 현장에서 작업복을 입고 근무하는 사람들은 푸른 작업복 색에 빗대어 블루칼라라고 불렀다. 이처럼 직업군을 특정 칼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은 오늘날 더욱 심화됐다. 컴퓨터 관련 직업을 뜻하는 그레이칼라, 영화감독과 CF감독 등을 나타내는 로얄블루칼라, 서비스직과 여성 근로자를 상징하는 핑크칼라 등 새로운 직업이 형성될 때마다 새로운 칼라가 탄생했다. 해당 직업군의 특성을 색으로 상징화했기 때문에 이들의 특징을 정형화하기 좋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직업군에 대한 선입견이 생길 것이며 이것이 살색처럼 그릇된 관념으로 고착화될 수 있다. 그만큼 색의 상징성은 강렬함을 지녔다. 우리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색에 대한 관념 속에 우리를 가둘 필요는 없다. 때문에 이처럼 차별을 야기할 수 있는 색에 대한 새로운 현상은 개선해야 할 여지가 보인다.

 

[사진] 픽사베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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