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사, 김구 얼굴 안에 있소이다!
한국의 근대사, 김구 얼굴 안에 있소이다!
  • 김선아 기자
  • 승인 2019.05.23 16: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9년 기해년이 시작됐다. 연초가 되면 새해에 대한 부푼 희망으로 혹은 심심풀이로 토정비결 같은 운세를 본다. 그 점괘가 좋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기분만 상하게 되는데, 백범 김구도 그랬다.

김구는 한때 관상학을 공부했고 가장 먼저 자신의 얼굴을 점쳤다. 그리고 그 결과에 절망했다. 과연 점괘는 맞아떨어졌을까? 김구의 일생을 통해 확인해 보고, 더불어 사나운 운세와 맞닿았을 때의 마음 자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까 한다.

 

 

역사적 순간에 그가 있었다

‘김구의 삶 자체가 한국의 근대사’라고 할 만큼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그가 있었다. 김구가 태어난 해는 한국의 근대사가 시작되는 1876년이었다. 그해에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때 그의 이름은 김창암(金昌巖)이었고, 이후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하면서 김창수(金昌洙), 김구(金龜), 김구(金九)로 바꾸었다.

그 다음 역사적 현장은 1892년에 치러진 조선의 마지막 과거 시험장이었다. 17세 김구는 그곳에서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현장을 목격했다. 과거 시험은 허울 좋은 형식일 뿐 이미 합격자는 정해져 있었다.

그동안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했던 것이 모두 허사가 되었다. 양반한테 당한 집안의 한을 풀고자 했던 출세 목표가 시작도 해 보지 못한 채 와장창 깨져 버린 것이다. 크게 실망한 김구는 시험을 보지 않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빌어먹을 거지 팔자 VS 호심인

그 쓰라린 현실에 마냥 아파할 수 없었다. 그는 앞으로 생계를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아버지의 권유로 관상학을 접하게 되었다. 공부를 하면 바로 실천하는 김구, 그는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점괘는 ‘가난하다(貧相), 천하다(賤相), 흉하다(兇相)’였다. 한마디로 빌어먹을 거지 팔자였다.

과거 시험에 연이어 맛보는 좌절. 점괘처럼 가난하고 천하고 흉해서 이렇게 관직과 인연이 없는 것 같고, 또 앞으로 인생은 더욱 꼬일 것 같은 불안이 휩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봤던 관상학 서적 중에 <마의상서>가 있었다는 것. 그 책은 당나라 때 마의선인이 관상에 관한 내용을 집대성한 것으로, 끝부분에 자신이 겪었던 일화와 깨달음이 적혀 있었다.

어느 날 마의선인이 나무하러 가는 머슴을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날 것 같으니 무리해서 고생하지 말게”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머슴은 계곡에서 탄식을 하고 있었는데, 나뭇잎에 매달려 떠내려오는 개미 떼를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운명과도 같은 느낌이 들어, 개미 떼를 살려 주었다.

며칠 후 선인은 다시 그 머슴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관상에서 죽음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부귀영화가 보이는 것이었다. 마의선인은 머슴의 이야기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가장 마지막에 한 문구를 추가했다.
 

얼굴 좋은 것은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은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이 문장이 김구를 살렸다. 김구의 관상은 거지 팔자이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되기로 결심했다.

 

백범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김구의 좌상
백범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김구의 좌상

 

떠돌이 인생 시작 VS 호심인이 되는 길

김구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에 매료되어 동학에 입도했다. 열정적인 활동으로 어린 나이인 18세에 접주까지 되었다. 그런 그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는 선봉장이 되어 해주 전투를 이끌었다.

그러나 일본군과 연합한 관군에게 패하고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그를 집에 숨겨준 이는 동학군 토벌에 나섰던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 진사였다. 소문을 통해 김구의 사람 됨됨이를 알고 있던 안 진사가 그를 도운 것이다. 호심인이 되고자 노력해서 운명이 달라진 걸까? 동학군 김구가 그들을 진압하던 관군의 도움을 받은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것에 관대한 것은 아니다. 그건 바보다. 김구는 을미사변이 터지자 크게 분노했다. 그러다가 치하포에서 수상한 사람을 보았다. 서툰 조선 말투에, 한복 도포 자락에 숨긴 일본도. ‘이건 틀림없이 음모를 꾸미는 일본군이다’라는 생각에 김구는 쓰치다 중위를 맨손으로 죽여 버렸다.

이 일로 김구는 붙잡혀 고문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한 나라의 왕비를, 그것도 궁궐까지 침입해서 죽인 일본 자객들은 아무도 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대조적인 판결이었다. 다행히 1897년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고종의 특사로 살아났지만, 일본의 방해로 출옥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김구는 탈옥을 선택했다. 또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어 떠돌아다녀야 했다.

 

광복을 맞이한 후 서대문 형무소에 함께 투옥된 동지들을 만났다.
광복을 맞이한 후 서대문 형무소에 함께 투옥된 동지들을 만났다.

 

애국 계몽 운동으로 다시 형무소에 갇히다

감옥서에서 김구는 수많은 책을 읽다가 깨달았다. 일본군 한 명을 죽인다고 나라의 운명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모든 조선인을 깨우쳐야 세계열강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국 계몽 운동에 뛰어들었다. 봉양학교, 서명의숙,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전국 강습소를 돌아다니며 교육의 필요성과 애국심에 대해 강의를 했다.

이런 그의 노력과 다르게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에 놓인 촛불이었다. 일본은 한일 의정서를 체결할 때 조선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외교권을 뺏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그 선두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이에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거짓을 일삼는 그를 단죄했다. 이 사건으로 김구는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났다.

조선의 끊임없는 독립운동에 일제는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다. 그 감시망에 안중근 사촌 동생 안명근이 걸려들었다. 군자금을 걷다가 발각되고 만 것이다. 일제는 이를 이용했다. 가짜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깡그리 잡아들였다. 전국적으로 600여 명이 검거되었고, 그 중 105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안악 105인 사건, 그 명단에 김구가 들어 있었다. 그는 내란 음모죄로 17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다시 교도소에 갇히게 된 것이다.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그리고 충칭까지

1919년 3·1 만세 운동의 영향으로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김구는 압록강을 건너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 정부에 합류했다. 임정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 통치를 청원했는데, 그 사실이 알려지자 창조론과 개조론이 격렬하게 부딪쳤고 많은 동지들이 임시 정부에 등을 돌렸다. 그리고 10년, 20년, 30년 길어지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에 대한 희망을 버린 동지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매헌 윤봉길 기념관에 전시된 김구의 〈백범일지〉
매헌 윤봉길 기념관에 전시된 김구의 〈백범일지〉

 

그러나 김구는 최후의 순간까지 임시 정부를 지켰다. 초대 경무국장으로 시작해서 최후에는 국무 회의 주석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 길은 순탄치 않았다. 임시 정부는 남의 나라에 세워져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까지 옮겨 다녀야 했다. 이런 떠돌이 생활에 아이들이 함께 할 수는 없는 일. 김구는 함께 살지 못하는 어린 자식들에게 글을 남겼다. <백범일지>는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또 다들 짐작하듯이 경제적 사정도 열악했다. 임시 정부 설립 당시에 반짝 인재와 자금이 모여들었지만 그 이후에는 늘 가난했다. 김구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해외 동포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써야 했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인들이 채소를 다듬다 버린 쓰레기를 모아 음식을 만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일본의 국제적 영향은 점점 커져 갔고, 독립에 대한 동지들의 열망은 식어 갔다. 치하포 의거 후 애국 계몽 운동 노선을 펼쳤던 그였지만, 절박한 상황에 청년들을 모아 한인 애국단을 조직했다. 이창봉과 윤봉길의 피로 한국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렸고, 동지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도 다시 불붙었다. 거기에다 중국 정부의 지지도 받아 한국광복군을 창설할 수 있게 되었다.

 

귀국 전에 임시 정부 요인들과 청사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귀국 전에 임시 정부 요인들과 청사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광복되었지만 개인 자격으로 귀국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광복을 맞이했다.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터지자 일본이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한 것이다. 그 바람에 8월 18일을 목표로 준비한 한국광복군의 서울 진공 작전이 쓸모없어졌다. 그리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한반도에 민족을 가르는 위도 38선이 그어져 버렸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에서 자유주의자도 아니고 사회주의자도 아닌 민족주의자는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미군정은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요인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11월 23일에 조국의 땅을 밟았다. 그것에 대해 서운해할 여유는 없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의 신탁 통치가 결정되었다. 이에 자주독립의 통일 정부 수립이 소원이었던 김구는 반탁 운동에 앞장섰다.

 

김구, 포기는 없다

광복된 조국, 대한민국에서도 김구는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신탁 통치 반대, 미소 양군의 철수, 위도 38선 철폐 그리고 진정한 자주독립 정부 수립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했다.

처음 위도 38선은 일본군 무장 해제를 명목으로 생겼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북한은 김일성이, 남한은 이승만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고착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 두고 보다가는 두 개의 정부가 한반도에 생길 판이었다. 김구는 결단을 내렸다. 1948년 4월 19일 김규식과 함께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등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런 그의 노력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남한은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해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고 북한도 9월 9일 조선민족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데도, 늘 그렇듯이 김구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다. 암살되기 한 달 전에 이승만 정부와의 합작은 통일 정부가 들어설 때만 가능하다고 말하며 “동족상잔의 유혈과 국토 양단의 위기를 방지하고 자주·민주의 원칙하에 조국의 완전 독립을 쟁취하려는 나의 주장과 태도는 변함이 없다”고 소신을 밝혔다.

 

효창 공원에 안장된 백범 김구의 묘
효창 공원에 안장된 백범 김구의 묘

 

그래서일까?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육군 장교 안두희가 쏜 총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7월 5일 서울 운동장에서 거행되었으며, 효창 공원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딱 1년 후 1950년 6월 25일에 우리 민족의 끔찍한 비극인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빌어먹을 거지 VS 민족 지도자

살펴본 것처럼 대한민국의 흥망성쇠와 김구의 운명이 맞닿아 있었다. 나라를 팔아 호의호식한 친일 세력이 아니라면, 대부분 사람들의 운세도 김구처럼 나라의 운명과 비슷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래서 김구의 점괘가 더욱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가난하다(貧相), 천하다(賤相), 흉하다(兇相)’


이 점괘를 받은 김구는 ‘마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했다. 그렇다면 개미를 살려준 머슴처럼 그의 운명은 바뀌었을까?

김구는 동학 농민 운동 때부터 한곳에 편안히 안주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거기다 끔찍한 고문과 형무소 수감 생활도 겪었다. 임시 정부 핵심 요인이었지만 해외 동포들에게 편지로 독립 자금을 구걸했으며, 어머니 곽낙원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먹는 것도 좋진 않았을 것이다. 또 광복 이후에 자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양쪽 진영에서 천대를 받았으며, 더군다나 나라를 지키는 현역 군인에게 저격을 당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빌어먹을 거지 팔자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아니 오히려 고단한 삶으로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정말 가난하고 천하고 흉한 인생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김구의 서거를 애도하기 위해 경교장에 모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김구의 서거를 애도하기 위해 경교장에 모였다.

 

그러나 거지는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사람도 어쩌다 한두 명 있을 뿐. 이와 대조적으로 김구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이 치러지는 서울 운동장에는 구름 같이 사람들이 모여들어 통곡했다. 효창 공원으로 안장되기 위해 가는 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서거한 지 70년이 되어 가는데도 아직까지 사람들은 백범 김구를 기억한다. 이런 것을 보면 분명 거지와의 삶과는 다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관상 점괘가 맞았다고 하기에도, 운명이 바뀌었다고 결론 내리기에도 애매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구가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주도적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점집이 흥한다고 한다. 불안한 미래와 답답한 현실에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점집에 가는 것이 아닐까? 혹시 점괘가 안 좋게 나와 속상한 사람이 있다면, 김구의 관상과 그의 인생을 생각해 봤으면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