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시인 기형도를 만나다
우리가 사랑한 시인 기형도를 만나다
  • 석보경 기자
  • 승인 2019.05.23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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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기형도의 집, 기형도 문학관을 찾아서

 

기형도문학공원
기형도문학공원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집>, 1985

 

연일 초미세먼지다. 버스 창밖의 희뿌연 풍경을 바라보다 소하동을 지난다는 안내방송에 문득 그의 시 ‘안개’를 떠올려 본다. 80년대 그 시절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했던 안개와 그 일대를 출퇴근하는 여공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딱딱한 건물들과 텁텁한 미세먼지 속에서 하얀 것으로 입을 막고 바삐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 같은 공간 다른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서로 낯설고 쓸쓸하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위치한 기형도 문학관에 도착한 후 먼저 주위에 조성된 기형도 문화공원을 거닐었다. 곳곳에 설치된 벤치에도 앉아 보고 나지막한 산책길을 둘러보니 이곳에 오고 갔을 다양한 모습이 그려진다. 어느 노부부에겐 정다운 산책길로, 아빠 엄마와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어린아이에겐 천진난만한 놀이터로, 친구나 연인들에겐 반갑고 설레는 만남의 장소로... 그게 무엇이든 기형도 문화공원을 채워가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벽화 속 기형도 시인이 해맑게 웃고 있다. 짙은 눈썹에 마냥 사람 좋아 보인다. 문학관 입구 바로 옆으로 그의 초상화와 대표작 ‘빈집’, ‘엄마 걱정’이 벽화로 만들어져 있다. 특히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 수록된 ‘엄마 걱정’은 시장에 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의 애틋한 마음을 그려낸 시로 중, 고등학교 검인정교과서 등에 수록돼 청소년들 사이에선 너무나 대중적인 시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 ‘엄마 걱정’ 중

경기도 광명에 위치한 기형도 문학관은 재작년 11월 개관하여 1층 전시실, 2층 북카페와 도서공간, 3층 강당과 창작체험실로 아담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정말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1층의 전시실은 크게 다섯 공간으로 구분해 시각적은 물론 청각적인 요소까지 공간을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복합문화공간을 구현했다. 전시실에 처음 들어서면 시인 기형도의 삶과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조감도가 펼쳐져 있으며, 작품 발표 연도 및 시인의 생애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기형도 문학관 전경
기형도 문학관 전경

 

어두운 유년 시절과 허무한 도시 속의 상념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시작(時作) 메모, 1988. 11’

병들어 누운 아버지, 시장에 간 어머니, 공장에 다니는 누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손윗 누이... 상실감에 둘러싸인 시인의 유년 시절을 좁고 어두운 골목으로 보여 준다. 그가 살았던 안양천 주변은 산업화의 그늘 아래 자주 안개가 덮였다. ‘엄마 걱정’, ‘안개’, ‘나리 나리 개나리’ 등 길목에선 만난 그의 시는 유년 시절의 환경을 내면화했을 것이다.

 

시 ‘안개’를 신비로운 공간으로 연출한 ‘안개의 강’

유년의 골목을 돌아 나오면 안개를 디지털로 표현한 신비로운 공간에 마주한다. 등단작인 ‘안개’를 텍스트 애니메이션과 영상으로 표현하였다. 이 공간에 들어오면 관객의 발아래로 시가 강물처럼 흐르고 양 사방의 벽면으론 ‘안개’의 시어들이 안개처럼 퍼져나간다. 청각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한 편의 시에 푹 빠질 수 있게,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감각적인 공간이다.

 

안개의 강
안개의 강

 

찬란했던 대학 시절, 은백양의 숲

두 번째 이야기는 그가 문학청년으로 찬란했던 시절이다. 연세대 숲길 ‘백양’의 이름을 따 ‘은백양의 숲’이라 지었고, 대학 시절 그가 시인이 되고자 치열하게 노력했던 흔적들을 여실히 보여 준다. 연세문학회 동인 활동과 자랑스러운 ‘윤동주 문학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시인과 신문기자로서의 삶, 희망을 노래하는 저녁 정거장에서

마지막 이야기인 저녁 정거장은 등단 이후 ‘시운동’ 동인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문단 활동을 했던 시기다. 이곳에는 그가 입었던 양복,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패, 신문기자로 일했던 일상의 단면 등 소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어두운 방, 빈집을 떠올리며

기형도 시인의 대표작 ‘빈집’을 실제 공간으로 형상화한 곳이다. 빈집에 머물며 짧았던 밤, 겨울 안개, 내 것이 아닌 열망 등 시에 나오는 구절들을 떠올리게 한다. 빈집을 실제 어두운 방으로 만들어 그 안에 홀로 선 관객이 영상으로 흘러나오는 시에 온전히 젖어들 수 있다. 창문 너머로, 그 빈집 사이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만나는 영원한 곳이 바로 ‘빈집’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기형도 문학관의 상징적인 곳이고 애착이 가는 곳이다.

1층 전시실 한쪽에선 시인을 추억하는 지인들의 인터뷰와 평문을 만날 수 있다. 필사 체험을 할 수 있는 체험공간도 마련되어 있고 후배 시인들이 낭송한 기형도 시를 헤드셋을 끼고 화면을 통해 직접 감상할 수 있다. 2층의 북카페에선 시인 기형도에 대한 이야기를 엽서에 써서 남기는 참여 프로그램을 상시 진행하고 있으며 2천권 이상의 시집으로 구성된 작은 도서관을 운영해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시집을 접하고 편안하게 즐기고 갈 수 있도록 쉼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

2017년 11월에 개관한 기형도 문학관은 시인 기형도를 사랑하는 광명시민들과 시인을 추모하는 여러 인사들과 유족의 뜻을 모아 유년기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던 광명시에 건립되었다. 개관 1주년을 맞아 문학관에는 현재 ‘기억나무’(1층 문학관)와 ‘시 한 컷’-안개의방(2층 북카페)을 기획전시 중이다. 재작년 10월까지 약 2만2천 명의 관람객이 방문, 시인에 대한 기억과 문학관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엽서에 남기도록 하여 그중 대표적인 것을 ‘기억나무’에 달아 관람객들과 함께 지난 시간을 함께 추억할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기억나무
기억나무

 

2층 북카페 옆으론 현대미술작가와 콜라보로 시 ‘안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시 한컷’-안개의방이 마련되어 있다. ‘솜’이라는 독특한 재료를 사용하여 한 편의 시를 한 컷의 장면으로 응축해 마치 미술관 같은 문학관을 떠오르게 한다. 기형도 30주기를 맞는 올해는 시인, 문인, 문학계, 광역시 등이 함께 참여하여 전국 단위의 추모행사가 기획되고 모교인 연세대와 연계한 굵직한 문학행사까지 선보일 예정이다. 사실 문학관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시인 기형도를 사랑하는 모임(이하 기사모)’이 있을 정도로 광명시에선 시인 기형도에 대한 자부심과 애틋함이 대단하다. 그의 문학적 업적과 정신을 기리고자 기사모는 자발적인 모금을 통해 ‘기형도 기념사업회’를 설립했으니 시민들의 힘으로 만든 문학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과 연계한 외부 활동도 다채롭게 진행 중이다.

광명문화원의 추모시 낭송회, 관내 도서관 ‘기형도 특별코너’, 광명시민회관에서 개최된 추모공연 그 외 이야기 콘서트, 시극 공연, 시인다방, 개관 1주년 기념 창착시 공모전 등 지역 주민들이 직접 후원자가 되고 주체가 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청춘을 상징하는 기형도 시인에 발맞춰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 연계 프로그램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관내 학교 대상으로 ‘찾아가는 문학관’, ‘기형도 동아리 프로젝트’, ‘시낭독공연’, ‘문학특강’ 등 청소년들에게 좀 더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자 한다.

기형도 문학관은 지난해 3월 경기도 1호 공립 문학관으로 등록되었다. 개관한 지 겨우 1년 남짓, 문학진흥법 이후 경기도에 등록된 최초 1호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 기존의 딱딱한 문학관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아이들부터 성인까지 전 연령층이 고루 참여하고 함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을 꿈꾸는 기형도 문학관, 지역을 뛰어넘어 경기도를 대표하는 문학관으로 도약 중이다.

문학관은 시인의 생애를 모은 ‘시인 기형도의 집’이다. 문학관을 지키고 있는 시인의 누이인 기향도 명예관장은 문학관이 곧 ‘빈집’이라고 했다. “시 ‘밤눈’의 시작 메모에서 형도는 ‘삶과 존재에 지칠 때 그 지친 것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비유는 자연(自然)’이라고 했다. ‘빈 집’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곳이자 자연의 일부다.이 ‘빈 집’을 방문객들이 서로 함께 채워가면 좋겠다. 이곳을 찾는 모든 분들이 곧 시인이라 생각한다.”

영원한 청년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한 시인 기형도,

우울함 속에 순수함이 가득한

아름다운 그의 언어.

그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젊음에서 영원으로 살아 있다.

 

문학관 앞 벽화
문학관 앞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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