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추사관에서 만난 조선의 천재 김정희
제주 추사관에서 만난 조선의 천재 김정희
  • 이영혜 기자
  • 승인 2019.05.2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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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를 본떠 지은 추사관 전경
세한도를 본떠 지은 추사관 전경

 

세모난 지붕에 동그란 창 하나, 작고 소박한 집, 그 옆을 감싸듯 심어진 몇 그루의 소나무. 외로운 가운데 서로를 의지하듯 기대고 있는 집과 나무의 모습이 <세한도>와 꼭 닮은 제주 추사관에서 김정희를 만났다.

 

제주 서귀포의 대정읍에 가면 <세한도>와 비슷한 모습의 현대식 건물인 추사관이 있다. 세모난 지붕과 둥근 창, 자그마한 집 옆에 심어 놓은 소나무들까지 2차원의 그림을 3차원의 공간에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곳은 추사 김정희의 기념관이다. 그가 제주에 유배되어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곳을 기념하여 마련한 곳으로 지금도 꾸준히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입구에서 전시관으로 내려가는 길은 김정희의 유배길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라는 의미로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계단을 만들었고, 그 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힘이 넘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판전(版殿)’이라는 현판 글을 중심으로 두 개의 전시실이 나뉘어 있다.

 

전시장 중앙에 위치한 판전 글씨
전시장 중앙에 위치한 판전 글씨

 

전시실에서는 추사가 정약용의 제자 이학래에게 써주어 지금도 강진의 다산초당에 걸려 있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현판 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글은 ‘다산 정약용을 보배롭게 생각하는 산방’이라는 뜻으로 세상 사람들이 다산의 유배지를 그렇게 기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한다.

전시품 중에 눈길을 붙잡는 것이 있는데 추사 특유의 유머와 파격을 주어, 한자 글씨라기 보다는 그림으로 보이는 '소창다명(小窓多明)’이라는 현판 글씨다. “작은 창가에 빛이 밝으니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하네”라는 서정적인 심상이 마치 그림인 듯 표현되어 있다.

 

유머와 파격이 느껴지는 소창다명
유머와 파격이 느껴지는 소창다명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충남 예산의 화암사에 써주었다는 ‘무량수각(无量壽閣)’이라는 현판과 대정향교에 준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은 유배 시절에도 제주의 유생들과 교류했음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또한 제주도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자신의 곳간을 열어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낸 김만덕의 선행을 기리고자 그 가문의 3대손인 김종주에게 써주었다는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는 뜻)’라는 글에서도 그의 마음이 전해진다.

1층으로 올라가면 추사의 고고한 성품과 깊은 학식을 잘 드러낸 반신상을 마주하게 된다. 최고의 재능과 학식으로 당대의 높은 벼슬에 오르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서체를 만들어 그 이름을 떨친 그이지만 조용히 아래로 숙인 그의 모습에서 겸손을 배운다. 밖으로 이어진 뜰을 지나면 그가 귀양살이를 한 작은 초가가 나온다. 안거리와 밖 거리로 나뉘어 있는 전형적인 제주도의 옛집으로 마치 지금도 추사가 먼 길을 찾아온 벗, 초의선사와 마주하여 담소를 나누고 있는 듯 사랑방에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마당에는 그가 좋아했다는 수선화가 심어져 있고, 외로운 귀양살이의 시름을 달래주었을 까마귀 울음소리도 간간이 들려온다. 추사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쯤에서 그의 삶이 무척 궁금해진다.

 

초의선사 초상 (출처 포털사이트)
초의선사 초상 (출처 포털사이트)

 

그림, 시, 금석학 등 최고의 경지에 이른 천재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였던 김정희. 그는 개성 뚜렷한 자신만의 서체인 추사체를 만든 명필이지만, 그 이전에 그림과 시, 문장, 고증학과 금석학, 차, 불교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인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이것이 “추사 김정희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다.”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 실학의 한 갈래인 실사구시학파로서 금석학과 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어, 당시까지 주인이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산비가 바로 신라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낸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해동 유마거사’라고 불릴 정도로 불교학에서도 깊은 수준에 이르렀고, 그림 또한 붓글씨만큼이나 뛰어나 흥선대원군이 2년 동안이나 찾아가 난초 그림을 배울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김정희는 당시 청나라의 학자들이 한 번 만나기를 소망할 만큼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으며, 효명세자의 스승이기도 했다. 또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청산하고 위태로운 조선 후기의 정치를 바로 세우려 노력한 개혁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안동 김씨의 세도에 밀려 제주 유배길에 오르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정조 10년 예산에서 태어났다. 고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는 영조의 사위였으며,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왕가의 사돈 집안 종손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실학자인 박제가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24세 때는 동지부사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가서 석학 옹방강, 완원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이때 금석학을 배웠으며 ‘완당’이라는 호를 스승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완당선생해천일립상
완당선생해천일립상

 

추사는 당시 청나라 학문의 신사조였던 고증학과 금석학을 조선에 들여왔고 이후에도 연경의 학계와 끊임없이 교류하였다. 34세의 나이에 대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학문의 수준이 매우 높아 국제적인 명성을 날리며 ‘완당바람’을 일으킨 주역이 되었다. 추사는 55세 되던 해에 병조참판으로서 동지부사가 되어 다시 청나라 연경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것을 기회로 삼아 안동 김씨 세력은 이미 10년 전에 마무리된 사건을 다시 꺼내어, 세도 정치에 반기를 들던 김정희에게 대역죄를 뒤집어씌운다.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으며 생사를 오가던 중 그의 벗이 상소를 올린 덕에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제주도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배지로,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우암 송시열, 광해군, 면암 최익현 등 지식인과 정치인 200여 명이 귀양살이를 했던 섬이다.

당시 제주도로 가는 뱃길은 바람이 많이 불고 무척 험해서 사람들은 대개 목숨을 내놓고 배에 올랐다고 한다. 추사가 배에 탄 날도 날씨가 매우 안 좋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울부짖었지만, 추사는 높은 파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뱃머리에 앉아 큰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의 대담함과 침착한 성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허둥대는 사공에게 방향을 지시하며 배가 바람을 타고 수월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하여, 아침에 출발한 배가 저녁에 이미 제주에 닿을 수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배가 날개라도 달고 날아서 온 것 같다며 놀라워했다는 기록이지금도 전해진다. 그렇게 제주에 닿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바람 많고 돌 많은 제주의 산길을 걸어 서귀포 있는 대정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대정으로 가는 길은 절반은 돌길이어서 사람과 말이 발붙이기 어려웠고 (중략) 간혹 모란꽃처럼 빨간 단풍 숲도 있어 육지의 단풍잎과 달리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정해진 일정에 황급한 처지였으니 무슨 아취가 있었겠는가”라고 아우에게 쓴 편지에 토로하고 있다.

 

추사체를 완성하고, 학문과 예술에 전념한 9년의 귀양살이

김정희에게 내려진 형벌은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무겁다고 알려진 위리안치형이었다. 집을 가시 울타리로 둘러싸서 집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 하는 벌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도 가시 울타리가 있는 집에서 지냈으나, 얼마 후 대정현 안성리 강도순의 집(현재 추사 거적지)으로 옮겨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고 한다.

추사는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맞지 않는 기후와 음식, 잦은 질병으로 고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일껏 해서 보낸 반찬은 마른 것 외에는 다 상하여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일곱 달 만에도 오고 빨리 와야 두어 달 만에 오는 것이 어찌 성할까 보오 (중략) 서울서 보낸 김치는 워낙 소금을 지나치게 한 것이라 맛은 변했으나 김치에 주린 입이라 견디고 먹습니다.”라며 괴로움을 토로한 내용도 보인다. 하지만 유배 기간 동안 가장 괴로웠던 것은 같이 학문과 예술을 논할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수많은 편지를 썼는데 <완당선생전집> 10권 중 5권이 편지일 정도로 많다.

“하루가 한 해같이 긴데 온종일 듣는 것은 단지 참새와 까마귀 소리뿐”이라고 한탄하며 “그대의 서신을 접하면 마치 쑥대가 무성한 산길에서 담소 소리를 듣는 듯한 기쁨이 있다”며 벗들의 서신을 반겼다.

추사가 귀양살이를 하던 대정의 집 주변은 지금도 인구가 적은 고즈넉한 마을이다. 예전에 추사가 머물던 당시의 모습은 더욱 황량하기 그지없었을 듯하다. 제주에는 육지와 다르게 까마귀가 많다. 추사가 머물던 초가에도 종일 까마귀가 찾아와 그의 신세를 가엾게 여기며 울어주었던 듯하다.

남달리 금슬이 좋았던 부인 예안 이씨마저 추사가 귀양살이를 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평생 동안 절친이었던 초의선사(다도를 정립한 조선 후기 대선사)가 아내를 잃고 시름에 빠져 있는 추사를 찾아왔다. 선사는 귀양살이를 하는 친구의 곁에서 6개월을 머물고 돌아갔는데, 추사는 아쉬워하며 한사코 더 머물라고 붙잡았단다. 초의선사가 돌아간 뒤, 말을 타다 살갗이 벗겨졌다는 소식을 편지로 전하자 추사는 자기 말을 듣지 않고 돌아가 그런 일을 당했다며 자못 고소해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상처에 사슴 가죽을 잘라 붙이면 낫는다고 알려주고는 어서 나아서 다시 돌아오라며 그리운 마음을 편지에 담기도 했다.

 

문인화의 명작 <세한도>가 그려진 까닭

기록에 따르면 추사의 귀양살이가 내내 절절한 외로움 속에서만 이어졌던 것은 아닌 듯하다. 인품이 훌륭하고 인복이 많았던 덕에 많은 벗과 제자들이 멀고 먼 유배지까지 종종 찾아와 말벗이 되어주곤 했다고 전해진다. 제자 중에 역관이었던 이상적이란 이가 있었는데 그는 청나라에 갈 때마다 최신 서적을 구해서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최신 학문과 동향을 편지로 전해주어 추사의 학문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런 제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어 그린 그림이 바로 그 유명한 <세한도>이다.

<세한도>에 쓰여 있는 발문을 보면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고생을 하여 얻은 책들을 권세가에게 주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네. (중략) 공자께서 말하기를 ‘날이 차가워진 뒤(세한歲寒)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고 하셨네.”라며 제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있다.

 

세한도 (출처 포털사이트)
세한도 (출처 포털사이트)

 

헌종 14년(1848년) 12월,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 김정희는 9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이듬해 1월 서귀포 대정을 떠났다. 말년에는 과천의 한 초당으로 들어가 살다가 71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일흔 평생 벼루 열 개를 구멍 냈고 붓 1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할 만큼, 천재이기 이전에 지독한 노력파였던 그는 예술과 학문에 두루 업적을 남기고 삶을 마쳤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 귀양살이를 했던 집
제주에서 가장 오래 귀양살이를 했던 집

 

최고의 권력가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 또한 높은 벼슬에 올라 엘리트로서의 삶을 살았던 추사 김정희.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돌과 바람만이 벗이 되는 외로운 섬에 갇혀 살면서도 자신의 서체를 완성하고, 학문의 깊이를 더해가는 귀한 시간을 살았다. 이것이 1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마음과 발길을 붙잡는 까닭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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