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령리에는 제주도의 이면이 공존한다
월령리에는 제주도의 이면이 공존한다
  • 서민지 기자
  • 승인 2019.05.23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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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틈에 자라난 선인장
바위 틈에 자라난 선인장

 

제주도 한림읍에는 월령리라는 마을이 있다. 한적한 동네로 길목 사이사이에는 예쁜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멀지 않는 거리를 두고 제주도의 서로 다른 이면을 볼 수 있다. 바로 천연기념물 제429호 월령리 선인장 군락지와 진아영 할머니 삶터이다. 월령리 선인장 군락지에는 작은 크기의 선인장이 검은 돌 틈에서 빼곡히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국적인 풍경과 짧은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어 가볍게 걷기에 더없이 좋다. 그리고 마을의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보면 제주 4·3의 피해자인 고 진아영 할머니의 생가가 있다.

 

천연기념물 제429호 제주 월령리 선인장 군락

우리에게 이제는 익숙한 식물인 선인장이 해안가와 돌담 사이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곳, 제주 월령리 마을에 있는 선인장 자생지이다. 월령리는 제주도 한림읍에 있는 한적한 마을이다. 찾아오는 방문객도 그리 많지 않아 조용하게 산책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선인장 군락지를 만나 볼 수 있는데 푸른 바다와 검은 돌 사이에 자리 잡은 선인장은 특별한 풍경을 만들어 내기 부족함이 없다. 이 마을에 있는 선인장은 일부러 심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려 만들어진 군락지이다. 그렇게 선인장류 가운데 유일한 자생종으로써 천연기념물 제429호로 2001년 9월 11일에 지정되었다. 선인장의 씨앗이 쿠로시오 난류를 따라 열대지방에서 이곳까지 실려와 해변의 바위틈에 안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선인장의 다양한 쓰임

제주도는 지리적 특징으로 해류에 떠밀려와 자생한 식물이 꽤 있다. 4면이 바다이기 때문에 선인장뿐만 아니라 해녀콩, 문주란, 순비기나무 등 여러 식물들이 해류를 타고 제주도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중 월령리 선인장의 경우는 멕시코가 원산지이다. 관상용으로 재배되지만 민간에서는 소염제, 해열제로 사용되기도 한다. 쓰임 많은 선인장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월령리 선인장은 4~5월경에 파란 열매가 열리며 5~6월경에는 열매에 노란 꽃이 핀다. 그리고 꽃이 진 11~12월경에는 열매가 커지면서 보라색으로 익어 가는데 이 열매가 우리에게 친숙한 백년초이다. 실제로 마을 주변에 있는 카페 여러 곳은 백년초를 이용한 음료를 판매하고 있어 선인장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먹거리로도 즐길 수 있다.

제주도에서는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제주도 대표 농산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 왔다. 그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서 선인장을 이용한 가공품이 많이 개발될 수 있었다.

 

선인장 열매
선인장 열매

 

제주 월령리 선인장 군락의 가치

예로부터 손바닥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손바닥 선인장’이라고 불렸는데 월령리 마을 주민들은 쥐나 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집 돌담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 그게 지금에 와 마을 곳곳에 선인장이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농가에서 재배하고 있으며 마을에 들어서면 집 주변 밭에 선인장이 빼곡이 들어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건성이 강한 선인장은 가뭄에도 잘 죽지 않아 제주도의 환경에서도 자생할 수 있었다.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밀려온 선인장은 그렇게 제주도 검은 돌 틈에 자리를 잡아 지금 우리에게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월령리 선인장 군락지는 국내 유일의 선인장 야생 군락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손바닥 선인장
손바닥 선인장

 

또한 선인장을 보면서 걸을 수 있는 해안 산책로도 짧지만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서 가벼운 산책을 즐겨도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마을 곳곳에 퍼져 있는 선인장은 주민들에게는 유용한 식물이기도 하며 관광객에게는 특별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준다. 월령리 선인장 군락은 천연기념물로써 높은 가치를 지니며 강인한 생명력으로 제주도의 푸른 바다 곁에서 싱그러운 색을 띠며 오래도록 살아가고 있다.

 

선인장 군락 산책길
선인장 군락 산책길

 

제주 4·3과 진아영 할머니

푸른 바다와 오밀조밀 모여 있는 선인장을 보며 즐거운 산책을 했다면 이번에는 마을 중심 쪽으로 걸어가 보자. 그곳에서 제주도의 아픈 면을 보게 된다. 마을 골목에 그려져 있는 벽화를 구경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고 진아영 할머니 삶터가 눈앞에 있다.

무명천 할머니라고도 알려져 있는 진아영 할머니는 제주 4·3의 피해자이다. 제주도는 어디를 가도 4·3의 악몽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제주 4·3은 1948년부터 1954년까지 무려 7년 동안 이루어진 군경에 의한 집단 학살사건이다.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게 된다)’는 말을 새기며 피해자들은 살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불이익을 당했고 가족의 죽음을 말하지 못하고 숨기며 침묵 속에서 슬퍼해야 했다. 그 당시 희생자는 3만여 명으로 당시 제주도민의 1/10에 해당하는 인구가 없어졌다. 한마을 사람 모두가 죽어 130여 개의 중산간 마을이 사라지기도 했다. 그만큼 피해 규모는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이 이어졌고 당시에 목숨을 건졌다고 하더라도 그때의 기억 속에서 피해자들은 영원히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 중에는 턱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평생을 턱 없이 무명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살았던 진아영 할머니가 있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고 이야기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때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평생을 약 없이는 견딜 수 없었다.

 

진아영 할머니 삶터의 문패
진아영 할머니 삶터의 문패

 

진아영 할머니의 삶

할머니는 1949년 서른다섯 살 때 고향 판포리에서 경찰이 쏜 총에 턱을 맞았다. 당시에 제대로 된 치료는 받을 수 없었으며 가족들의 손에 겨우 목숨만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할머니는 하얀 무명천을 얼굴에 두르고 다녔다. 할머니는 총탄과 함께 삶의 한 부분이 없어져 버렸다. 이후 고운 이름 대신 ‘무명천 할머니’로 불렸다. 할머니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판포리를 떠나 언니가 있는 월령리로 거처를 옮겼다. 평생을 약 없이는 고통을 잊지 못하였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나마 먹는 음식도 턱 총상으로 제대로 씹지를 못해 소화시키기 어려웠다. 때문에 몸은 너무나 말라 있었다.

진아영 할머니는 2004년 가을에 91세의 나이로 양로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총탄을 맞은 사건 이후 55년간 후유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던 한 많은 할머니의 인생은 우리가 돌아봐야 할 역사의 한 부분이다.

 

진아영 할머니 삶터
진아영 할머니 삶터

 

할머니가 돌아가신 2004년 이후 몇 년간 방치되어 온 삶터는 2007년 삶터보존회를 만들어 할머니가 생전에 지냈던 집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삶터보존회는 할머니가 생전 생활하던 곳을 그대로 남기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할머니가 지냈던 모습 그대로 남겨 두는 것에 중점을 두고 돌멩이 하나까지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월령리 380번지에 위치한 8평의 집은 소박하면서 슬픈 모습으로 조용히 우리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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