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 숭복사지(崇福寺址)를 가다
폐사지 숭복사지(崇福寺址)를 가다
  • 박기상 기자
  • 승인 2019.05.2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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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는 토함산 기슭에 있는 절로서 곡사(鵠寺)로 창건하였다가 이 자리로 옮겨 오면서 숭복사로 개칭하였고, 최근까지 일명 말방리 사지라고 불려 왔던 절이다. 신라 51대 진성여왕(887-897) 때에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되었으나 유구한 세월 속에서 절은 없어지고 석탑도 무너진 상태로 폐사지가 되었다가 석제들을 수습하고 석탑을 복원하였다. 현재 원성왕릉을 연계하는 역사문화 환경에 한층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세상살이에 지치거든 폐사지로 떠나라 했던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 대체 뭐 하러 가느냐고 할 수 있지만 폐허가 된 절터는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폐사지로 떠나는 답사 여행은 단순히 무너진 옛 절터를 둘러보는 것이 아니다. 비어 있으므로 말미암아 사라진 것들을 떠올리며 시간을 거슬러 당시의 사상과 문화 또는 민초들의 꿈을 퍼즐 조각 맞추듯 상상해 보는 것이다. 절터의 흔적을 들여다보면서 머릿속 상상의 나래를 펴다 보면 왠지 모를 쓸쓸함을 뒤로하고 헛헛한 마음을 채울 수 있다. 오늘은 숭복사지가 충만의 울림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얼마 전에 길을 헤매다가 찾지 못하고 돌아온 숭복사지를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전봇대에 붙어 있는 ‘숭복사지’ 라는 안내 표지판에 따라서 좁은 시골길을 한참 지나 봐도 사진으로 봐왔던 숭복사지는 보이지 않는다. 농사일을 하는 사람에게 묻기도 하면서 겨우 마지막 좁은 골목 언덕길에 올라서니 작은 기둥에 숭복사 00m라는 표식이 보인다. 옛날 외국 영화에서 보던 서부개척시대에 목장 울타리에 걸린 표식하고 많이 닮은 것 같다. 이제다 왔는가 생각하고 아무리 둘러봐도 사진으로 보아 왔던 숭복사지 석탑들은 보이지 않고 바로 옆 현대식 2층 조립식 건물에 숭복사라는 간판이 보인다. 절이라고 보기에는 좀 이상하다 생각하고 그 건물 옆으로 돌아서 들어가니 황량한 들판 저 멀리 서탑이 먼저 보이고 그다음 동탑이 보인다.

 

숭복사지 동 서 양탑
숭복사지 동 서 양탑

 

원래는 말방리사지(末方里寺址)였다

절터가 있는 곳 마을 이름이 말방리였기 때문에 최치원의 숭복사 비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말방리사지(末方里寺址)라고 불렀으며 이 절터의 북쪽에는 불국사가 있다. <삼국유사>와 숭복사 비문에 의하면 신라 선덕왕 이전에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하여 곡사(鵠寺)라고 했는데, 경문왕(861∼874 재위) 때에 원성왕의 원찰(願刹)이 되면서 크게 확장되었다고 한다. 헌강왕 때 절 이름을 대숭복사로 바꾸었으며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말방리는 토함산 남쪽, 조항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다. 비교적 고도가 낮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탄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는 지형이며, 서쪽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있다. 조선 시대에 말방 마을에는 마방(馬房)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을 마방이라 불렀고, 그 후에 말방이라고 변형되었다고 한다.

현재 동탑의 높이는 약 4.3m이고 서탑의 높이는 약 3.2m이다. 크기와 모양이 거의 같은 두 탑은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몸돌을 놓고 지붕돌을 올려 놓았다. 동탑은 2층 몸돌, 서탑은 2층과 3층 몸돌 그리고 3층 지붕돌이 없어지고 두 탑 모두 윗부분인 상륜부(相輪部)도 없다.

 

탑의 상륜부가 없는 서탑
탑의 상륜부가 없는 서탑

 

1층 기단은 우주와 2개의 탱주로 조각하였고 2층 기단에도 우주와 1개의 탱주로 조각하였다. 2층 기단에는 각 면이 탱주로 인해 2개 구역으로 구획되어 4면에 8개의 구획이 있으며, 4개면 구획 안에 통일신라 시대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팔부신중상(八部神衆象)을 각각 2구씩 조각하였는데 비교적 윤곽이 선명한 이 석상은 좌상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우수한 조각 솜씨를 보여 준다. 그리고 동탑과 서탑의 간격은 약 10m쯤 떨어져 있다.

 

비교적 윤곽이 뚜렷한 팔부신중상(八部神衆象)
비교적 윤곽이 뚜렷한 팔부신중상(八部神衆象)

 

좌측은 아수라 우측은 건달바
좌측은 아수라 우측은 건달바

 

또 동쪽으로 숭복사 복원비(崇福寺復原碑)가 서 있다. 숭복사비(崇福寺碑)는 숭복사 터 금당 터에서 동남쪽으로 10여m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석을 올려 놓았던 쌍귀부는 원래 자리를 떠나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앞뜰에 놓여 있다. 숭복사비 귀부는 다른 귀부와는 달리 쌍귀부 형태로 되어 있는데 이처럼 쌍귀부 형태를 한 비석 받침은 숭복사터 외에도 경주 인근 여러 절터에서도 볼 수가 있다. 가장 이른 것이 애장왕 1년(802년)에 조성된 것으로 무장사 터의 쌍귀부와 이수가 있고, 그다음이 숭복사터의 것이며, 포항시 신광면의 법광사 터 쌍귀부와 경주 남산 창림사 터 쌍귀부는 같은 형태이나 조성된 시기는 명확하지가 않다. 숭복사지 귀부의 머리가 가장 온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세월을 그대로 반영하듯 제법 검은색으로 변하였는데 그 윤곽은 아직도 또렷하고 선명해서 최근에 제작한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이다. 하나의 바탕 돌 위에 두 마리의 거북을 만들어 올렸는데, 두 마리의 거북 등을 연결하여 비석이 놓일 자리를 만들었다. 거북의 머리 모양은 쌍둥이처럼 닮았고, 얼굴 양옆으로는 수염이 귀 위쪽까지 두텁고 길게 나 있으며, 형태는 용의 머리와 구분이 되지 않는데 앞을 응시하면서 서로를 향해 약간씩 머리를 기울이고 있다.

 

경주박물관 앞뜰에 있는 숭복사지 쌍귀부 비석받침
경주박물관 앞뜰에 있는 숭복사지 쌍귀부 비석받침

 

최치원(崔致遠)의 숭복사비(崇福寺碑)

지금 현재 남아 있는 주춧돌로 살펴보면 가람의 배치는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으로 금당 앞에 2개의 탑이 있다. 대지를 3단의 석축으로 구분하여 맨 윗단에는 당탑(堂塔)이 자리 잡고 있다. 금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건물로 2중 기단 위에 있었으며, 금당의 북쪽으로 40m 떨어진 곳에 동서로 긴 기단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강당지로 추정된다. 이러한 금당지와 석단의 규모는 불국사와 매우 비슷하다. 이곳에서 발견된 국사대웅(國寺大雄)과 개와대웅(蓋瓦大雄) 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하여 쌍두귀부, 금동제 금구(金口)와 비석의 조각 등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절터에는 동탑과 서탑, 2개의 탑이 남아 있다.

이 절터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최치원(崔致遠)의 사산비(四山碑) 가운데 하나인 숭복사비(崇福寺碑)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사산비(四山碑)로는 숭복사비를 포함하여 보령 성주사터, 문경 봉암사, 화개 쌍계사의 비석들을 말하는데, 다른 비들은 지금도 건재하지만 신라의 중심지 경주에 있었던 숭복사의 비석만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절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다행히 해방 전인 1930년대부터 1978년까지 현지 지표조사에서 최치원이 쓴 숭복사비의 파괴된 비편 13개가 수습되었고, 이를 통해 99자가 해독됨으로써 이 절의 역사도 밝혀지게 되었다.

숭복사비는 신라 사산비명(西山碑名) 중의 하나인 ‘유당신라국초월산대숭복사비명(有唐新羅國初月山大崇福寺碑名)’을 말한다. 이 숭복사 비문은 헌강왕이 최치원에게 명하여 짓도록 하였으나, 헌강왕과 정강왕이 잇달아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에 왕명을 받은 지 한참 뒤인 진성여왕 때 완성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원성왕(元聖王)의 능을 조영하면서 풍수상 길지이던 곡사(鵠寺) 터를 왕릉자리로 지목하니, 이에 따라 절은 원래의 터를 비워주고 현 숭복사지로 옮겨 개창하였다. 그러나 그 후 70여 년간 절은 큰 형세를 이루지 못했다가, 경문왕이 즉위하여 중수하기 시작하여 헌강왕 11년(885)에 절 이름도 숭복사로 바꾸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숭복사 비문에는 경문왕과 그의 자녀들인 헌강왕, 정강왕, 진성왕으로 이어지는 2代에 걸쳐 4王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많이 담겨져 있다. 숭복사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이 대체로 선사들의 탑비인 것과는 달리 왕실에서 세운 절에 대한 기록이어서 왕실과 중앙귀족들의 불교신앙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숭복사지 비석 조각의 글씨에는 해서와 행서 두 가지가 있다. 해서는 구양순(557∼641)의 해서를 따랐으며, 행서는 왕희지(307∼365)의 행서체와 비슷하다. 숭복사비는 현재, 다수의 비편이 수습되어 보존되어 있고, 비문은 필사본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현재 복원된 숭복사비(崇福寺碑)와 쌍귀부
현재 복원된 숭복사비(崇福寺碑)와 쌍귀부

 

현재 경주시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비문을 교감(校勘)하고 최치원의 비문을 집자(集字)하여 비신에 새겼다. 또한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던 귀부를 복제하여 이 비석을 2014년 2월 복원 후 숭복사지에 세웠다. 비석 전체의 높이는 381㎝이고 비신의 높이는 204㎝이다. 두께는 33㎝, 폭은 100㎝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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