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최초의 황제국, 고종의 길에서 복수를 꿈꾸며 탄생했다
한반도 최초의 황제국, 고종의 길에서 복수를 꿈꾸며 탄생했다
  • 박영진 기자
  • 승인 2019.05.2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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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회피하거나 외면하는 역사라 한다면 아마 근현대사가 아닐까. 지금으로부터 불과 150~200여 년밖에 되지 않은 가까운 과거이지만, 외세의 침략이 가속화되고 나라의 이권을 빼앗기며 결국 주권마저 박탈되는 비극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자부심마저 무너진 채 36년간 일제 강점기라고 하는 역사상 가장 아픈 시대로 접어드는 길목이었다.

 

그러나 진흙탕 같은 아픈 시간 속에서도 우리 역사에서 유일했던 시간 13년이 있다. 바로 한반도의 최초 황제국인 ‘대한 제국’이다. 지난해 7~9월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궜던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대한 제국 시기에 있었던 의병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이 덕분에 우리의 아픈 역사가 다시 조명 받고 있다.

기원전 5000년 전 고조선이 처음 탄생했던 순간부터 지금 2019년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는 대부분 왕권 국가가 자리 잡아 왔지만, 1897년 고종이 대한 제국을 선포한 순간부터 1910년까지 짧은 13년 동안은 왕이 아닌 황제가 군림하는 황제국이 한반도에 들어서 있었다. 비록 결말이 우리가 원하던 자주독립은 아니었지만 그 시간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황제국이 들어섰던 때였고, 이는 근대화와 개혁을 위한 새로운 물결의 중심이었다. 그 출발은 아내를 잃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몸만 간신히 빠져나와야만 했던 고종의 아픔에서 시작된다.

 

고종의 길 입구
고종의 길 입구

 

대한 제국의 탄생, 고종의 길에서 찾다

대한 제국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찾아본다면 1897년에서 시간을 2년 전 1895년 을미사변 때로 되돌려 봐야 한다. 1895년 당시는 청일 전쟁이 끝난 직후 로 조선 내에 일본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던 시기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했던 일본은 타이완 섬을 비롯해 랴오둥반도를 얻으며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으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다. 그런데 이때 러시아가 일본에 제동을 건다. 러시아는 만주로 진출하기 위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일본이 들어오면서 위협을 느낀 것이다. 이에 독일, 프랑스 등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여 일본이 청을 위협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랴오둥반도의 권리를 돌려줄 것을 권고하고 일본은 굴복하는데, 이것이 삼국 간섭이다.

이 모습을 본 조선의 고종과 중전 민씨(명성 황후)는 ‘인아거일’ 정책을 내세워 청나라 대신 새로이 등장한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배척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내각에도 모두 친러 쪽 인사들을 대거 기용한다. 청일 전쟁으로 한반도는 물론 중국에까지 진출할 절호의 기회를 얻은 일본으로서는 한순간에 상황이 역전돼 위기감을 느꼈고, 결국 인아거일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중전을 제거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세계 역사상 한 나라의 왕비가 다른 나라 사람에게 살해당한 유례 없는 일이었다.

을미사변 당일 일본은 경복궁의 남(광화문)과 북(춘생문, 추성문)을 에워싸고 조선 군대를 15분 만에 진압해 왕과 왕비의 숙소인 건청궁으로 무단 침입했다. 수색 과정에서 고종과 순종을 밀치거나 칼로 위협하는 등 극악무도한 행동을 저질렀고, 결국 중전 민씨를 찾아내 잔인하게 살해했고, 그가 실종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시신마저 불태웠다. 자신의 아내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사람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고종은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다. 사건 직후 그는 수라도 제대로 들지 못했으며, 오로지 자신의 눈앞에서 뚜껑을 열고 먹을 수 있는 통조림과 날달걀 등만을 섭취했다.

결국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자신의 안위를 맡기기로 결정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러시아 공사관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이듬해였던 1896년 2월 새벽에 건청궁을 빠져나와 이동하는데, 이것이 아관 파천이다. 지난해 10월 31일부터 덕수궁에서는 ‘고종의 길’이라고 하는 새로운 장소를 공개했는데, 이 곳이 바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까지 걸었던 그 길이다.

 

러시아 공사관
러시아 공사관

 

이 길은 서울 중구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건너편부터 정동공원을 지나 구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120m 길이의 좁고 조용한 길이다. 공개된 이 길이 다시 우리나라에 돌아오기까지는 너무나 긴 시간이 걸렸다. 이 길은 오랜 기간 미국 대사관저 내에 있던 땅을 2011년 토지 교환을 통해 땅을 반환받으면서 2014년에야 비로소 한국 땅으로 돌아왔다. 이후 3년여 동안 석축을 다시 쌓아 복원 및 재정비해 우리에게 이제야 공개된 것이다.

 

고종의 길
고종의 길

 

그렇게 긴 시간이 걸려 우리의 품에 안긴 것만큼이나 고종은 이 길을 걸으면서 얼마나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참담했을까. 여기에 우리를 더욱 아프게 만드는 건물 하나가 고종의 길 중간에 있다. 바로 조선 저축 은행 사택이다. 얼핏 보면 그냥 낡은 일본식 건물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지만, 알고 보면 일제의 수탈이 진행됐던 중심인 것이다. 남의 나라 손에 의해 아내를 잃고 국권은 나날이 쇠약해지고 외세의 침략은 끝없이 이어지면서, 도망치듯 왕궁을 빠져나오며 걸었던 이 길이 유독 더 춥고 외롭게만 느껴진다.

 

조선 저축 은행 사택의 모습
조선 저축 은행 사택의 모습

 

황제의 자존심, 대한 제국 의복에 담다

고종은 아관 파천 후 1년 만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대한 제국을 선포한다. 이제는 더 이상 빼앗기지도 짓밟히지도 않겠다는 마음으로 왕이 아닌 ‘황제가 지배하는 나라’를 백성들과 전 세계에 선포했다. 그런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 중 하나가 의복이다. 덕수궁 석조전에서는 <대한 제국 황제 복식>이라는 특별전을 열고 황제국이라는 자부심을 옷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전시전에는 고종의 생애 흐름을 따라 조선의 왕이 입었던 홍룡포, 대한 제국 성립 이후 만들어진 대한 제국 황제의 새 복식, 고종 퇴위 이후 만들어진 태황제 예복 등 고종의 복식 8종과 근현대 복식 유물 8종 등 총 16종을 소개하고 있다.

본래 조선의 왕들은 붉은색이 바탕이 된 홍룡포를 주로 입었다. 고종 역시 대한 제국 수립 이전에는 홍룡포를 입었고 전시관에는 그가 홍룡포에 선글라스를 끼고 외출하는 사진이 전시돼 있기도 하다. 전통의 홍룡포와 당시 신문물이었던 선글라스가 고종의 몸 하나에 모두 담겨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후 고종은 1894~1895년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등을 통해 서구 복식인 대례복을 수용하며 문호를 넓혀 간다. 그리고 대한 제국을 세우면서 고종은 황실 의례에서 입는 면복을 구장복에서 십이장복으로 고쳤고, 기존 조선의 왕이 입었던 홍룡포도 황제국에 맞춰 색깔을 금색으로 바꿨다. 전시관에는 황제로 즉위했을 당시 처음으로 지었던 옷인 통천관복, 황룡포, 익선관 등도 있다. 한반도가 황제국이 됐음을 당당히 알리고 새로운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홍룡포
홍룡포

 

고종의 홍룡포
고종의 홍룡포

 

고종은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지를 표현하기라도 한 듯 서양식 복장도 준비했는데, 바로 대원수 예복과 상복이다. 마치 정장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 이 옷은 평상시 집무를 볼 때 착용하는 옷이며, 가슴에는 태극 문양과 금장 장식들이 어우러져 있어 위엄 있는 대한 제국의 황제임을 잘 보여 준다.

 

대원수 예복
대원수 예복

 

이후 고종은 1900년 문관의 대례복 규정이 마련되는 것을 바탕으로 서양식 관복으로 입기 시작했다. 서양의 스타일과 함께 옷에는 오얏꽃 무늬와 무궁화꽃 장식이 돼 있는데, 오얏꽃 무늬는 대한 제국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즉 서양과 대한 제국의 만남이 관복을 통해 표현돼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종 서양식 의복들
각종 서양식 의복들

 

의복의 변화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당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고종은 외교권이 박탈되고 친일 인사들로 인해 대한 제국의 내각이 마비되면서 사실상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로 감금된다. 이때부터 고종은 비밀리에 밀서를 보내거나 특사를 파견하는 일을 시작했고, 그중 대표적인 사건이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이다. 당시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을 특사로 파견했는데, 이미 회의장에 있었던 일본인들 때문에 입장도 하지 못했다. 대신 이들은 전 세계 기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일본의 만행을 알렸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후 고종은 태황제 신분으로 덕수궁에서 생활을 이어 갔고 의복 역시 태황제 신분에 맞추어 입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태황제 의복과 관련된 자료는 남아 있지 않고, 고종의 사진으로만 유추가 가능하다. 사진 속 의복을 자세히 살펴보면 황제복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장신구 등이 조금 간소해진 것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이 퇴위하면서 옷의 장신구를 빼낼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내를 비명에 보낸 아픔, 나라가 무너져 가는 아픔, 외교권마저 박탈돼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아픔까지 고종의 어깨와 가슴을 강하게 짓눌렀을 텐데 옷마저 권위가 추락했음을 보여 주니 그 심경을 어떻게 글로 말할 수 있을까.

 

태황제 예복
태황제 예복

 

시간의 흐름에 따라 13년간 대한 제국의 모습을 전시를 통해 살펴봤다. 덕수궁에서는 전시 이외에도 대한 제국의 숨결을 곳곳에서 느껴 볼 수 있다. 자주적 근대화를 외치며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만들어진 석조전을 비롯해, 고종이 주로 외부 손님을 접대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를 즐겨 마셨던 정관헌, 대한 제국을 선포했던 중화전 등이 그러하다. 또한 고종이 숨을 거뒀던 함녕전도 이곳에 함께 하고 있다.

 

덕수궁 석조전
덕수궁 석조전

 

덕수궁 정관헌
덕수궁 정관헌

 

본래 18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덕수궁에는 70개가 넘는 전각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 대부분의 건물이 헐리면서 현재는 몇 건물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일본이 할퀴고 간 상처가 찬 바람이 부는 덕수궁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아픈 역사라고 치부되며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 버린 대한 제국. 비록 고종과 대한 제국이 꿈꿨던 자주독립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들은 조선 후기에 부각됐던 여러 문제들을 타파하고 강한 개혁을 통해 새로운 나라로 탈바꿈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끝까지 일본의 침략에 맞서며 전 세계에 부당함을 주장했다. 고종의 길을 따라 아관 파천으로 피신하던 굴욕의 순간에 복수를 다짐한 것은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황제국을 세우는 밑바탕이 됐다.

 

황제의 모형
황제의 모형

 

그리고 세계만방에 당당히 출사표를 던지고, 홍룡포에서 황룡포와 대원수 예복 등으로 바꾸며 제국의 위엄과 꿈을 표현했다. 이후 억울하게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전 세계에 일본의 부당함을 알린 순간에도, 제국을 상징했던 의복은 황제 그리고 대한 제국의 백성들과 항상 함께 했다. 그저 아프고 결말이 좋지 못하다 하여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덮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우리 역사가 바로 대한 제국이다. 1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외치며 세계 지도에 새겨져 있었던 대한 제국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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