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통영 1] 동포루가 동피랑으로, 다시 쓴 마을의 역사
[내 이름은 통영 1] 동포루가 동피랑으로, 다시 쓴 마을의 역사
  • 김세원 기자
  • 승인 2019.07.0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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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명소 동피랑 벽화마을은 본래 조선 시대 삼도수군통제영 산하의 일종의 기지 방어설비라고 할 수 있는 동쪽의 포루가 있던 자리였다. 요컨대 이름하여 ‘동포루’라고 불리던 그 포루가 일제 강점기와 이후 이어진 숱한 난개발의 시대를 거치며 제 모습을 잃고 허허벌판이 되어 버린 그곳에 들어선 아기자기한 마을이 바로 지금의 동피랑 마을인 셈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촌도 어떠한 힘을 지닌 권력자의 무엇도 아니었던 작고 조용한 마을, 그렇기에 동피랑 마을은 평범한 우리네 서민들이 보내던 매일매일의 일상이 담긴 장소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저 통영시 중앙에 자리한 어시장인 ‘중앙시장’과 통영 앞바다를 무대로 간신히 하루 생계를 꾸리는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담은 이야기의 장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건너편에 자리한 서피랑 마을과 더불어 경상남도 통영시의 온갖 플레이스를 아우르는 굵직한 스토리,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한 고(故) 박경리 선생의 소설이 펼쳐진 바로 그 무대이기도 했다.

 

한국의 나폴리, 통영의 진짜 아름다움은 어디서

이랬던 동피랑 마을의 역사를 잠시 뒤로하고, 동피랑을 품은 경상남도 통영시의 이야기를 잠시 보태자면 다음과 같다. 많은 이들이 통영을 일컬어 ‘한국의 나폴리’라 부른다. 충분히 이유가 있는 수식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통영시를 구성하는 숱한 섬과 다도해, 이와 한데 어우러진 에메랄드빛 아름다운 푸른 바다, 거기다 해안가에 점점이 늘어선 통영의 새하얀 시가지는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한려 수도 해상 국립 공원의 세계적 위상을 실감케 할 만큼 아름답다. 특히나 이 모든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통영시 전통의 명물, 케이블카 위에 올라 있노라면 비단 이탈리아의 나폴리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그리스 산토리니의 풍광마저 얼핏 느껴질 정도다.

본래 오랫동안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 왔다는 통영 사람들, 지금도 건어물과 활어를 파는 상점으로 그득한 중앙시장은 바로 그런 통영의 오랜 역사와 일상이 담긴 장소였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덩달아 날로 치솟는 인건비 등의 비용으로 국내에서 어업을 영위하며 살기에는 지나치게 채산성이 맞지 않는 순간이 왔다. 게다가 국내외적으로 점점 경쟁력을 잃어 가는 지역 조선업은 날로 쇠퇴일로를 걸었다. 종래의 통영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바로 이러한 대내외적인 불안 속에서 2008년 통영시는 중대 결심을 한다. 국내 최초로 거금을 들여 2선 자동 순환식 곤돌라 방식의 스위스 최신 기술을 도입한 한려 수도 해상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등 지역을 살릴 제3의 ‘굴뚝 없는 공장’으로서 관광 산업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빈한한 달동네 중의 하나로서 동피랑 마을이 맞이해야만 했던 위기는, 바로 이러한 통영시의 관광 인프라 확충 개발 사업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만나며 더욱 현실화되었다.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데까지는 사실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통영의 한려 수도 해상 케이블카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내에 설치된 케이블카 설비 중에서 유일하게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는 등의 고무적인 성과를 내고 있으니, 가히 통영의 자랑이라 말할 법했으니까. 어찌 보면 나름 성공적이라고 해도 좋을 통영시의 관광 육성 계획,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동피랑 마을에 크나큰 위기를 불러오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동피랑 마을이 있기 전, 역사적 장소로서 통제영 동포루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삼도수군통제영 본영 성곽, 그 유구한 히스토리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과 북산동 일대에서 볼 수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은 모두 통제영의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 이래 1907년 일제에 의해 해산되는 수모를 겪기까지 역대 조선 수군의 총본영으로 자리매김했던 통제영의 흔적을 보여 주는 유적이다. 기록에 따르면 통제영 성곽이 지어진 시기는 숙종이 즉위한 지 네 번째 해를 맞이한 1678년도로, 당시의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윤천뢰가 이를 축성했다고 전해진다.

통제영의 본영이라고 부를 법한 건물은 현재 통영시 문화동에 자리한 세병관이다. 충무공으로 역사에 남은 이순신 장군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이곳은 또한 당시의 우리나라 해군 참모 총장 급에 속했던 조선 삼도수군통제사가 단 위에 올라 저 멀리 펼쳐진 통영 바다와 더불어 조선 수군을 사열했던 역사적 흔적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나 고단했을 전체 수군 사열식과 훈련이 끝난 이후면 세병관 단과 마당을 포함, 온 통제영 성곽 안이 조선 수군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위로 포상 연회 준비로 분주했었다는 문화해설사의 이야기를 꼭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통제영 건물에 얽힌 옛이야기, 우리 선조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그저 고풍스러운 한옥 건물로만 세병관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아는 순간 달라지는 통영의 아름답고도 고즈넉한 시가지, 그렇기에 문자 그대로 당시 조선 시대의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 그 자체였다.

지금이야 나라의 군대로서 따로 국가 예산이 집행되는 상황이라지만 당시 조선 왕조의 국고 사정은 오랜 기근과 가뭄으로 매우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임진왜란 직전, 율곡 이이가 주창했던 ‘10만 양병설’이 좌초되었던 것도 이러한 현황과 맥이 닿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그 지독히 끔찍했던 전쟁을 겪고도 조선 수군의 삶은 여전히 팍팍했다. 두 번의 왜란을 모두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공헌을 담당했지만, 국가로부터 예산을 받아 집행하기보다 현재의 빈곤한 사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분주한 그들이었다. 통제영 세병관의 좌우로 수군 본진의 자급자족을 담당했던 여러 공방 건물이 들어선 것은, 바로 조선 수군이 처했던 이렇듯 열악한 현실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좋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통제영 공방에서 생산하는 은제품을 비롯한 숱한 물건들이 예상외로 시장이 선호하는 고급품으로 인정받았다. 덩달아 공방의 성격 역시 조금씩 변화했다. 본래는 수군 내에서 필요한 화살과 무기 등의 군용품들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시설이었지만, 차츰차츰 시장에 내다 팔 ‘상품’을 생산하는 수익적인 시설로 변모해 간 것이다.

그러나 1907년 공식적으로 일제에 의해 조선의 군대가 해산된 이후, 충무공 이래 오랫동안 조선 수군의 핵으로 기능했던 삼도수군통제영과 통제영 공방 역시 결코 무사하지 못했다. 1985년, 통제영이 폐지되고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통제영 성곽을 구성하던 석성의 성벽과 문루가 훼손되고 없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성채가 온전히 존속하고 있던 조선 왕조 시절에는 동서남북의 4대문과 2암문이 있었으며, 동·서·북쪽에 3개의 포루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바로 ‘암문’이라는 한국 전통 건축의 축성 설비다. 본래 석성, 그중에서도 산성에는 암문 설치가 많다. 암문이라고 말하면 군수 물자나 군사들의 이동 등 성내에서 비밀리에 움직이기 위한 일종의 ‘비밀 문’으로, 그 명칭조차도 ‘어두울 암(暗)’을 사용해서 비밀스러움을 더욱 부각했다.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이러한 암문을 구별하는 종류에는 각각 홍예식과 평거식이 있다고 한다. 홍예식 성문과 평거식 성문의 판별은 성문을 설치하기 위해 축성자가 성벽에 만든 개구부의 모양에 따라 결정되는데, 평거식은 문자 그대로 개구부 양쪽 성벽에 평평하고 긴 장대석을 가로질러 일종의 평석교처럼 만든 성문을 말한다. 반대로 홍예식은 오늘날의 아치형 성문을 의미한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기록 등을 참고해 유추할 때 통영에 있었던 당시 조선 삼도수군통제영 본영 성곽 성문은 문루가 있었던 4개의 대문 모두 개구부의 모양이 아치형인 홍예문이었다고 추측된다. 다만 2개의 암문은 군사 기밀을 다루는 그 본디의 목적에 부합하게끔 문루를 따로 설치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통영의 역사, 동포루만이 정녕 정답이었을까

동피랑 마을이 있기 전부터 자리하고 있었다는 통제영 동포루의 다른 이름은 ‘동장대’이다.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된 연원은 경기도 수원을 상징하는 수원 화성에 있는 성곽 구조물 중의 하나인 서장대와 마찬가지의 이유가 있다. 수원 화성의 서장대는 당시 정조가 문루에 올라 자신의 특수 상비군인 장용영 외영의 군사들을 사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마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성곽의 동포루 역시 이에 상당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어쩌면 세병관에 있을 삼도수군통제사가 가끔 이곳 문루에 올라 통영 동쪽 바다의 조선 수군을 지휘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최고의 해양 관광 산업의 메카를 꿈꾸는 통영시로서는 동포루를 비롯한 3개의 포루를 포괄하는 통제영 성곽에 얽힌 통영 고유의 ‘역사성’을 다시금 손에 넣기를 간절히 염원할 수밖에 없었다. 문자 그대로,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 삼도의 수군을 지휘했던 통제사의 본영이라는 히스토리는 역시 함부로 다룰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통영 서민들의 조그만 달동네였던 동피랑 마을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이해관계 속에서 태동했다. 바로 동피랑 마을을 뜯어내고 옛 삼도수군통제영의 방어 시설물과 성곽을 복원하려는 통영시의 대대적인 사업이 예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동포루 복원 사업의 시작으로 말미암아 마을 맨 위쪽의 집 세 채가 먼저 철거되었다. 동포루가 있던 자리라고 했다. 순조롭게 시작되는가 싶었던 복원 사업이었지만, 통영시가 구상한 이 웅대한 통영 역사 복원 프로젝트는 이내 곧 커다란 암초에 부딪혔다. 덩달아 동피랑 마을 공동체도, 그 거대한 소용돌이 가운데 이리저리 찢어지고 분열되었다.

 

지역의 위기, 시민 단체의 중재로 갈무리하다

바로 그즈음 2007년 10월, 당시 활동했던 ‘푸른통영21’이라는 명칭의 지역 시민 단체가 이 난투전에 뛰어들었다. 푸른통영21은 공공 미술의 기치를 내세우며 통영시를 설득했다. 이른바 ‘달동네’도 가꾸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풍전등화의 상황 속에서 어렵게 탄생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통영의 망루, 동피랑의 재발견’ 프로젝트였다. 이는 모두 동피랑 마을 주민 공동체 일원 50명을 비롯해 주민들과 종래 긴밀하게 공조를 이어 가고 있었던 지역 자원봉사협의회와 지역 학교, 충무여자중학교의 학생들과 시민 단체 푸른통영21이 함께 발굴해 낸 참으로 의미 있는 성과였다.

이들은 동피랑 백일장 및 전국 벽화 그리기 공모전을 열었고, 그렇게 전국의 미술대학 재학생과 개인 등 18개 팀이 동피랑 마을의 색조차 바랜 낡은 담벼락에 옹기종기 모여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역사의 시작이었다. 마을 담벼락을 수놓은 아름다운 벽화는 이 작고 고요한마을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입소문이 나면서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었고 덩달아 이 낭만적인 동네가 곧 통영의 핫 플레이스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줄을 이었다. 마을을 보존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가운데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지역의 민심에 부응하듯 그동안 ‘복원 사업 원안 고수’를 강력하게 주창하던 통영시의 태도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사업 계획안은 수정되었고, 결국 이미 마을 꼭대기의 집 세 채를 철거함으로써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였다는 이유로 동네의 나머지는 보존하기로 결론이 났다.

이후 통영시와 더불어 벽화마을로서 동피랑의 오늘을 있게 하는 데 일조한 시민 단체, 지역 주민의 생활 협동조합 그리고 봉사자 협의회 등 지역 커뮤니티의 구성원이 한데 모여, 통영의 새로운 명소로서 동피랑 마을이 거둔 성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아이디어를 모았다. 한때 전국적으로 큰 이슈를 모았던 작가 마을 조성 등의 아이디어가 바로 여기에서 처음 선을 보였으며, 지금은 2년마다 벽화 그리기 공모전을 전국적으로 열어 마을을 함께 가꿔 나가고 있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보통의 동피랑 마을, 전국적인 핫 플레이스가 되다

평범한 시골 달동네가 오늘날 전국적인 이슈를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핫 플레이스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이 지나온 일련의 궤적은 근래 지방 자치 단체 주도로 거대한 공모 사업이 되어 진행되는 ‘도시 재생’ 사업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표를 제기한다. 과연, 이 사업을 구상하는 데 있어 ‘지역 주민’의 이해관계가 진정 반영되었느냐이다. 이와 관련해서 참고하면 좋을 동피랑의 장소가 한 곳 있어 지면을 빌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동피랑 마을의 맨 꼭대기 위층, 다시 복원된 통제영의 동포루를 머리에 이고 자리한 작은 카페가 하나 있다. 물론 동네 곳곳에 멋진 루프탑 카페를 비롯해 각양각색의 카페가 화려하게 자리한 동피랑이기에 더욱 작아 보일 수도 있지만, 오직 당신만이 보낼 ‘특별한 여행’을 위해 그 수많은 카페 중에서 이 맨 꼭대기 카페를 굳이 가 보라고 필자는 권하고 싶다.

메뉴판조차도 간편한 이곳이 유독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동피랑 지역 주민 공동체인 ‘동피랑 마을 생활 협동조합’이 직접 운영하는 카페라는 점에서다. 그렇기에 이 가게의 수익은 사업자가 모든 수익을 독점하는 일반적인 카페와 달리 동피랑 마을 공동 기금으로 쓰이며, 이를 재원으로 마을 주민들이 매달 쌀과 생필품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더욱 뜻깊다. 관광객이 유입되어 이 카페에서 돈을 쓸수록 지역 주민이 이득을 보는 셈이다. 물론 최근 관광객의 지나친 유입으로 지역 주민이 겪는 불편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오버투어리즘’이라는 단어가 관광 산업이 빚어낸 그림자 중의 하나로 조명받는 가운데, 동피랑 마을 역시 마찬가지의 아픔을 겪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아울러 자신의 일상을 관광객의 눈요깃거리로 팔아야 하는 현실에 대한 마을 주민의 문제 제기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지역 경제의 장기적이고도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단순히 공장을 유치하고 기업을 부르는 일만으로는 지방의 조그만 마을에서 더는 자체적으로 자급자족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작금의 상태이다. 따라서 어디서나 영위할 수 있는 ‘굴뚝 없는 산업’으로서 관광이 지닌 힘을 하루속히 인지하고, 단점을 최소화하면서 장점을 더욱 극대화할 방안을 지역커뮤니티와 지방 자치 단체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관광의 문제는 결국 관광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단순히 관광객이 지역에 와서 지불하는 돈이 몇몇 개인의 주머니를 채우는 상황이 아니라, 이왕이면 지역 주민 공동체를 함께 살찌우는 자양분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서 진정 비롯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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