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화유산 거리 탐방 1] 서울 정동, 근대문화유산 1번지를 찾아서
[근대문화유산 거리 탐방 1] 서울 정동, 근대문화유산 1번지를 찾아서
  • 이현정 기자
  • 승인 2019.07.0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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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청사에서 바라본 정동
구시청사에서 바라본 정동

 

근대문화유산이란 통상적으로 개항기인 1876년부터 1960년대까지 근대 시기의 건축이나 공간 유물 등을 통칭하며 1970년대 이후 것이라도 사회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보존 가치가 있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이 근대 시기는 서구 열강의 다툼과 문화의 유입, 일제 강점기 등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가장 격변했던 시기이며, 큰 아픔의 시기이기도 했다. 국가의 주권을 빼앗긴 침략의 역사라는 점에서 기억하기 싫은 가장 어두웠던 시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탄생된 많은 근대문화유산들은 당시의 문화를 생생하게 대변하는 역사적 전환기의 증거라는 점에서 꼭 보존해야 할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근대문화유산은 우리의 문화재 보존 정책에서 다소 소외되어 온 것이 사실이어서 안타깝게도 많은 근대문화유산들이 도시 개발과 산업화의 경제 논리에 밀려 지속적으로 사라지고 훼손되어 왔다. 그래서 2001년부터는 경제성이나 도시 개발로 없어지는 근대문화유산들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는데, 해당 문화재의 모습을 크게 변경하지 않는 범위에서 내부를 용도에 따라 변경이 가능하도록 했다. 등록 문화재를 역사관이나 박물관 카페 등으로 사용 가능한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보존과 활용을 동시에 얻음으로 지역 사회의 문화 발전에도 효과적으로 기여 하고 있다.

 

구시청사 전망대에서 바라본 정동 일대의 풍경

잘 보존된 근대문화유산 거리의 탐방을 통해 역사적 의미와 지역 문화 활용 방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길 바라면서, 필자는 서울 ‘정동’을 첫 번째로 근대문화유산 거리 탐방을 시작했다.

서울특별시 중구에 위치한 정동은 이성계가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을 조성하면서 생겨났다. 사냥 중이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물을 청하자 급하게 마시다가 물이 체할 것을 우려한 강 씨가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사대문 안에 무덤을 만들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깨고 정릉을 만들었으나 태종 이방원에 의해 도성 밖인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지고 정동은 정릉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정동에는 국가와 서울시 지정문화재 13개소가 한 거리에 밀집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시작된 근대적인 외교, 학교, 의료 시설 등이 즐비하여 근대문화유산 1번지로 불리고 있다. 구한말 개항과 함께 미국 공사관을 시작으로 각국의 서구 공관이 처음으로 들어서면서 국제 외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서양인들에게는 정동이라는 지명보다 공사관 구역이라는 뜻의 Legation Quarter로 불렸다고 한다. 이곳에는 최초의 신식 교육 기관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세워졌고 최초의 여성전문 병원인 보구여관이 있었다. 최초의 개신교회인 정동제일교회와 구세군 회관, 성공회성당이 세워진 종교의 중심지기도 했다. 또한 제국주의로 인해 비극적인 아관파천이 일어났고, 자주적 근대국가로 가기 위한 노력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곳이어서 역사적으로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곳이라고 하겠다.

 

러시아 공사관
러시아 공사관

 

아관파천의 비극적 현장

정동은 서양 외교의 각축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3년에 처음으로 미국 공사관이 들어오고, 1884년에는 영국 공사관이, 1885년에는 러시아 공사관이, 1889년에는 프랑스, 1891년에는 독일, 1901년에 벨기에 공사관 등 각국의 공사관이 차례로 들어섰다.

구 러시아 공사관은 사적 제25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885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하고 1890년에 완공되었다. 이곳에는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세자인 순종과 1년간 피신하여 머물렀던 아관파천의 아픈 역사가 있다. 건물 주변으로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땅굴도 발견 되었다고 하는데 유사시에 피신하는 비밀 통로로 사용 되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1902년 러일전쟁과 을사늑약(1905)을 거치면서 공사관으로써의 기능이 크게 축소되었고, 5천 평의 넓고 화려했던 구 러시아 공사관은 한국 전쟁 때 크게 파손되어 르네상스식 2층 건물의 일부와 터만 남아 있다.

 

영국 대사관
영국 대사관

 

120년간 한 자리를 지킨 유일한 공사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영국 공사관은 당시엔 드물게 현대식 공법인 콘크리트 기초 위에 붉은 벽돌로 지었다고 한다. 1890년에 관사를 기공하여 1891년 준공하였다. 당시 힐리어 공사의 부인이 놓은 정초석이 아직까지 남아 있으며, 120년간 그 자리를 지킨 유일한 공사관으로 큰 의미가 있고, 지금도 영국 대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당시 영국 공사관 주변엔 성공회성당인 장림교회와 수녀원 성 베드로 병원이 지어져서 많은 영국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배재학당
배재학당

 

최초의 신식 교육 기관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중등교육 기관으로 정동교회를 지은 선교사인 아펜젤러에 의해 1885년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정동의 한옥 한 채로 교육을 시작했는데, 1887년에 최초의 서양식 벽돌양옥으로 본관을 건축하였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은 1886년 6월 고종이 간판을 써 준 것이다. 당시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라는 설립 목적을 세웠다고 한다. 배재학당에서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하여 서재필, 윤치호, 주시경, 나도향, 김소월, 지청천 등 역사적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현재는 1916년 건립된 배재학당 동관이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피아노는 1930년대 초부터 배재학당 강당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그 가치가 높아 등록문화재 제480호로 지정 되어 있을 정도다. 배재학당 동관은 한국 근대 교육적 의미가 클 뿐만 아니라 건축물의 구조와 아름다운 창문, 벽돌 등 외장과 현관문과 양쪽 출입구의 기둥 돌구조가 잘 보존되어 있어서 1910년대 한국 근대 건축의 중요한 유물로 평가 된다.

 

이화학당
이화학당

 

최초의 신식 여성교육 기관

이화학당은 한국의 첫 여성 사립 교육 기관으로써 여성 지도자를 많이 양성한 곳으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1886년 한 명의 여학생을 가르친 것으로 시작하여 1887년 명성황후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이름을 내렸다. 당시의 스크랜튼 선교사는 “우리의 목표는 여아(女兒)들을 외국인의 의복 및 환경에 맞도록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들고자 노력할 뿐이다.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라고 교육 목표를 내세웠다.

당시의 봉건적 분위기 속에서 여자가 교육 받기는 쉽지 않아서 이화학당의 체조 수업을 두고 육체가 부덕해진다며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고, 며느릿감으로 이화학당의 여학생을 금지시키기도 해서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고 한다. 이화학당은 1904년에는 중등과를 먼저 신설하였는데 이는 당시 교사 양성이 시급했던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고 여성의 고등교육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1908년에는 보통과와 고등과를 만들어 보통·중등·고등과정의 일관된 과정으로 교육을 하게 되었고 1910년에는 4년제의 대학과를 설치했다.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단순한 자기 수양에만 그치지 않고 3·1 운동과 각종 항일 운동을 펼쳤고, 이화학당에서는 유관순 열사를 배출하였다. 현재는 1915년 지은 심슨 기념관이 남아 이화 박물관으로 활용되며 등록문화재 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

 

최초의 개신교 교회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한옥 한 채인 벧엘예배당으로 시작했던 정동제일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다. 점점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1897년 붉은 벽돌조 건물로 준공하였는데 뾰족 아치 모양의 창틀과 원형창, 트레이서리 등 빅토리아 시대의 전원풍 고딕 양식으로 만들었다.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세기 교회건물이다.

벧엘예배당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하란사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다. 하란사는 미국에서 처음 파이프 오르간을 알게 되었고 동포들의 모금 활동을 위해 순회강연을 하여 마련한 자금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고 최초로 연주하기도 했다. 1887년 12월 7일에는 한국 최초로 학생기도회가 시작되었고 정동교회는 가까운 거리였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의 교류의 장이 되어주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결혼식이 열렸고,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당시 몸을 숨기기에 용이했던 파이프 오르간 지하 송풍실에서 독립 선언문이 등사되기도 했다. 유관순 열사의 장례식이 치러진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국내 유일의 완전한 로마네스크 양식

정동의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은 서울시 유형 문화재 35호로 지정되어 있다. 1926년 조선 성공회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 주교와 영국의 건축가 아더 딕슨에 의해 준공되었다. 이 성당은 국내 유일의 완전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라는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건물의 기초와 뒷면은 화강석을 사용하고 벽면은 붉은 벽돌을 사용하였고, 성당 내부에는 12사도를 상징하는 돌기둥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정면의 반원 형태의 천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자이크 제단화를 새겼다. 조명에 의해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자이크 벽화는 화려하면서 성스러운 분위기를 보여 주며 뛰어난 예술성으로 등록문화재 제6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처마 장식과 창살 무늬, 기와지붕 등 한국 전통 건축 양식을 융합하여 한국의 전통문화와 조화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8년 100인의 건축가가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뽑은바 있고,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 내외와 1999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했을 때에도 이곳을 방문하였다. 또한 이곳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1987년 6.10 민주항쟁이 일어난 중요한 현장이기도 하다.

 

구세군 중앙회관
구세군 중앙회관

 

빈민 구제와 선교의 역사

서울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된 구세군 중앙회관은 1928년에 준공된 한국 구세군의 본관이다. 1989년까지는 구세군 사관학교로 새로운 인재 양성을 위해 쓰였으나 1959년 구세군 대한본영의 사무실 일부가 들어오면서 구세군 중앙회관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지나고 한국 구세군이 가장 크게 발전했던 근대화 과정에 이르기까지 빈민을 구제하며 선교에 힘쓰고 검소하게 살았던 구세군들의 정신이 깊게 배인 곳이다. 일제의 침탈로 빈민이 늘어나던 1928년, 구세군 냄비가 처음으로 등장하여 사람들은 없던 살림에서도 기꺼이 주머니를 열어 이웃과의 따뜻한 정을 나누었다.

건물의 외면은 화려한 장식이 없이 단순하지만 위풍당당한 인상을 주며 좌우 대칭의 균형감이 특히 돋보인다. 벽돌조의 외관과 중앙 현관의 4개의 기둥과 지붕은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현관 쪽의 바닥은 물갈기 슬래브이고 계단과 난간, 복도가 목조로 되어 있어서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정겨운 소릴 낸다. 1층은 사무실, 2층이 집회·예배당으로 목조 트러스가 이색적인 아름다운 예배당이다. 구세군 중앙회관은 건립 당시에도 서울의 10대 건물 중 하나로 손꼽혔고, 근대 건축의 좋은 사례로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은 공간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은 원래 1928년에 지어진 경성 재판소 건물이었고, 조선말 개화기에 평리원이라 불리던 한성 재판소가 세워졌던 자리이기도 하다. 1995년까지는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었다. 광복 후 대법원 건물로 사용되다가, 1995년 대법원 이전으로 건물 앞면은 그대로 보존하고 뒷면은 보수하여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이러한 정면 보존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의 보존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재탄생한 시립미술관은 하나의 건축물 안에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는데 역사적 건축학적으로도 높이 평가되어 2006년 서울시 등록 문화재 제237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근대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각이 진 날카로운 아치가 아닌 둥근 아치를 사용하여 부드러움과 위엄을 느끼게 하고 있다. 본관 내부에는 높은 천장의 유리창으로 자연광이 들어와서 백색으로 이루어진 내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덕수궁 석조전
덕수궁 석조전

 

격동의 시대상을 담다

석조전은 사적 제124호 덕수궁의 부속 건물인 양관이다. 덕수궁은 조선 시대의 궁궐로 경운궁으로 불렸다가 1907년 고종황제가 순종황제에게 왕위를 계승한 뒤에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원래의 궁궐들에서 1904년의 큰 화재가 나서 대부분의 궁궐들이 소실되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졌는데, 덕수궁은 조선 시대의 궁궐이었지만 근대 격변기의 역사적 현장이었고 서양식 건축과 조선의 전통목조건축이 공존하는 특별한 궁궐이 되었다. 덕수궁 안에는 석조전과 정관헌이 남아 있고, 미국 영사관 옆 개인 소유였던 중명전은 문화재청에서 매입하여 덕수궁으로 포함시켰다.

근대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순수 석조로 이루어진 가장 큰 규모의 건축물인 석조전은 영국인 G.R.하딩과 로벨이 내·외부를 설계하였다. 18세기 신고전주의 궁정건축 양식을 따라 정원과 건물을 지었는데 이오니아식 기둥 윗부분과 로코코풍의 실내 장식이 특이함을 준다.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과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고 정면과 측면에 박공을 붙인 현관을 만들었다.

석조전에서는 1946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고, 한국 전쟁 이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1992~2004년에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다가 2014년 10월 13일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 상고사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찬란한 영광도 어두운 아픔도 다 우리의 역사이기에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근대문화유산 1번지인 정동, 시린 바람을 따라 걸으며 길모퉁이에 자리 잡은 역사를 하나씩 마주해 보았다. 이렇게 잘 보존된 문화재들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현명한 해답을 던져 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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