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보다 강했던 조선 민초의 혼을 엿보다
권력보다 강했던 조선 민초의 혼을 엿보다
  • 정세진 기자
  • 승인 2019.07.0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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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 속 격전지 광성보 탐방

 

초지진 입구에 선 소나무가 신미양요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말해 준다.
초지진 입구에 선 소나무가 신미양요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말해 준다.

 

“적군은 참패의 와중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결사 항전 중이다. 패배가 빤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다. 창과 칼이 부러진 자는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려 저항한다.”

지난해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첫 방송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 미군에게 끝까지 항거하는 우리 군인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무력하게 외세에 무릎 꿇는 상황에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민초들의 투쟁은 사극이나 역사책에서 익숙한 그림이다.

국왕이 가장 먼저 도망친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에도 남아 있는 백성들은 의병을 조직해 싸웠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중 상당수가 천민이나 승려 같은 하층 계급이었다는 점이다. 국가로부터 오히려 핍박을 받은 이들이 국가를 목숨 걸고 지키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 보고자 필자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날, 1871년 신미양요의 격전이 있었던 강화도를 찾았다.

신미양요의 직접적 계기는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던 제네럴 셔먼호가 평양 주민들에 의해 불타 버린 사건이다. 때마침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으로의 팽창을 꿈꾸던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한 뒤, 5년 후인 1871년 조선 조정에 개항을 요청했으나 대원군이 이를 거부했다.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 원정대는 그해 5월 14일 나가사키에서 출항, 21일경 조선에 도착했다. 하지만 조선은 여전히 개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며 6월 1일 강화도와 본토를 잇는 손들목에서 우리 측은 먼저 경고 포격을 했다. 당시 400문에 이르는 화포가 서로 불을 내뿜었으나 피해는 미군 부상 1명, 조선군 전사 1명에 그쳤다. 미국은 선제 포격에 항의하며 재차 협상을 제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6월 10일 덕진진과 초지진을 점령하고 어재연 장군이 지키던 광성보를 공격해 왔다.

미 해군은 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조선 군이 쉽게 백기를 들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도 당시 우리 측 병력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광성보에 배치된 조선 군은 미 군함 상륙 3일 전에야 간신히 현장에 도착했으며, 어재연 장군을 제외하면 강화도에 와 본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구식 대포는 미군에게 거의 피해를 미치지 못할 정도로 화력이 미미했다.

하지만 조선군의 저항은 남북전쟁을 겪은 베테랑 미군들마저도 혀를 내두를 만큼 독하고 끈질겼다. 이들은 미군의 압도적인 전력에도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무기가 없는 자는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렸다고 한다. 한 미군 수병은 전투 개시 전 조선군의 군가를 듣고 “무섭도록 슬프고 장엄하다”는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결국 화승총으로 무장한 500여 명의 조선군은 절반가량인 243명이 전사하고 100명이 익사했다. 살아남아 포로로 잡힌 이들은 20명에 불과했다. 반면 미군의 피해는 전사 3명, 부상 10명으로 사실상 우리 군은 미군에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한 셈이다. 다만 광성보가 함락된 후 남은 병사들은 초지진 등지에서 첨사 이렴의 지휘 아래 야간 기습을 가했고, 미 해군 함정 한 척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군은 광성보 점령 후 하루만인 11일에 철군했으며 이로써 대원군의 척화 정책은 힘을 얻게 된다.

오늘날 신미양요의 흔적은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 유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강화도 동쪽 육지와 인접한 곳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세 곳의 유적지가 차례로 나타나는데, 이 중 아래에 있는 초지진은 숙종 42년인 1716년 세워졌으며 사적 225호로 지정돼 있다. 1871년 4월 23일 미 해병이 처음으로 상륙한 곳이기도 하다. 초지진 내 군기고와 화약고 등 군사 시설은 미군에 의해 모두 파괴됐으며 40여 문의 대포 역시 부서지거나 강화해협으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1973년 들어 초지진 중 초지돈만 높이 4m, 장축 100여m 규모로 복원됐다. 초지돈에는 포좌 3개소와 총좌 100여 개, 조선 시대 대포 1문이 전시돼 있다. 성채와 돈 옆 소나무에는 포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제국주의 침략자와 맞선 시절의 모습을 알려 준다.

 

초지돈 안 포각 속에 전시된 조선 말의 대포
초지돈 안 포각 속에 전시된 조선 말의 대포

 

우리 군사들이 숨어 적을 공격했던 총좌의 흔적
우리 군사들이 숨어 적을 공격했던 총좌의 흔적

 

사적 226호인 덕진진에는 문루, 포대와 성곽, 돈대가 남아 있다. 병자호란 후 축조된 12진보 중 하나인 이곳은 용두와 덕진 등 2개 돈대와 남장, 덕진 2개 포대를 관할하는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한 포대였다고 한다. 신미양요 때 덕진진의 성첩과 문루는 모두 파괴됐으며 문루지만 남은 상태에서 1976년 돈대와 성곽 보수 공사가 이뤄졌다. 지금은 아치형의 문 홍예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새롭게 세워져 있다.

 

1970년대 복원된 덕진진 문루
1970년대 복원된 덕진진 문루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던 광성보는 사적 227호로 지정됐으며 역시 강화 12진보 중 하나이다. 광성보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는데 고려 시절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 천도 당시 성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광해군 때 중건된 광성보는 숙종 대인 1679년 완전한 석성 형태를 갖추게 된다. 파괴된 문루와 돈대는 1976년 복원됐고 어재연 장군의 전적비와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서해안의 절경과 소나무 숲, 잘 정리된 산책로가 생소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유적은 쌍충비와 손돌목 돈대, 광성 포대, 용두 돈대, 무명용사비와 신미 순의총 등이다.

 

광성보 소속 3개 돈대 중 하나인 광성 돈대
광성보 소속 3개 돈대 중 하나인 광성 돈대

 

용두 돈대로 향하는 길
용두 돈대로 향하는 길

 

광성보 전투 당시 순국한 이들이 묻힌 신미 순의총
광성보 전투 당시 순국한 이들이 묻힌 신미 순의총

 

한편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은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를 약탈해 갔는데 이 유물은 지난 2007년부터 10년 대여 조건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다.

강화에서 두 번의 양요를 물리친 역사는 우리 민초의 강한 힘을 보여주는 예로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대원군이 이후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 정책을 강화한 것으로 볼 때, 이들의 목숨을 건 투쟁이 결과적으로는 조선의 발전을 더디게 만들었다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한다. 실제로 10년 뒤 대원군이 실각하고 나서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외세에 점령당했다.

다만 조선군이 미군에 전멸당한 일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모두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는 통상 거부 정책의 한계성을 재인식했고, 척사파 또한 양이의 군대가 강하다는 것을알고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2년 뒤, 대원군이 실각하게 된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50년 전, 조선군이 이처럼 맹렬하게 저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고 하니 이런 질문은 사실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피로써 스스로를 지킨 민초들의 정신만큼은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졌고, 오늘날에도 국가 위기에 가장 먼저 나서는 이들은 서민층인 것을 보면 그 시절의 DNA는 여전히 우리 민족의 혼에 남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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