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정림사지, 백제 마지막 날이 새겨지다
부여 정림사지, 백제 마지막 날이 새겨지다
  • 송영대 기자
  • 승인 2019.07.0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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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지 전경
부여 정림사지 전경

 

보름달이 서서히 기울듯이 백제 또한 과거의 영광을 뒤로 안고 저물어 갔다. 의욕적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신라를 압박하였던 의자왕의 치세는 백제의 전성기를 다시 되찾아 오는 듯하였다. 그렇지만 백제에 의해 국가적 위기를 맞은 신라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결국 신라의 김춘추는 거대한 통일 제국 당나라와 손을 잡게 되었으며 백제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였다.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은 양쪽으로 군대를 나누어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총기 가득하였던 의자왕은 노쇠하였고 방어 전략을 제대로 수립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총기 가득하였던 젊은 시절이었다고 하더라도 압도적인 전력 앞에 쉽게 대응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충신들은 마지막을 예감하면서도 전장에 나아갔고, 선혈을 뿌리며 한 줌의 흙으로 산화되었다. 역사의 해일은 백제를 쓸어버렸고, 백제의 달은 기울어 빛을 잃어버렸다.

백제가 멸망한 660년의 8월 어느 날, 소정방은 사비성 중심에 있는 절로 향했다. 오늘날 정림사지(定林寺址)라고 불리는 사찰이었다. 소정방은 절 한가운데에 있는 석탑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는 당나라 서쪽 끝의 변방에서 싸우고 동쪽 끝에서 백제를 멸망시킨 노장이었다. 소정방은 자신의 공로를 새기고 싶어 하였으며, 그 대상으로 석탑을 선정하였다. 소정방은 하수량에게 글을 짓고 권회소에게 글씨를 쓰게 하였으며, 석수장이를 불러 탑에 비문을 새기게 하였다. 이로써 탑의 1층 탑신 남면 오른쪽 우주(隅柱)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塔碑銘)’이라는 제액(題額)이 새겨지고, 탑신부 전체에 글씨가 남겨졌다. 이 비문은 천 년 넘는 오늘날까지 석탑과 함께 자리를 지켰으며, 평제탑(平濟塔)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기억되었다.

 

'대당평백제국비명' 제액
'대당평백제국비명' 제액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백제 역사 유적 지구 정림사지

2015년 7월 8일, 독일 본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위원회에서는 ‘백제 역사 유적 지구’를 인류의 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여기에는 총 8개의 유적이 포함되었는데, 이 중 하나가 부여 정림사지이다.

정림사지는 사적 30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백제 시대의 대표적인 사찰터이다. 고려 시대에도 정림사지는 사찰의 기능을 하였다. 정림사지라는 명칭 또한 정림사지 오층 석탑 주변에서 발견된 고려 시대의 기와에서 유래하였다. ‘태평 8년 무진 정림사(太平八年戊辰定林寺)’라고 새겨진 기와를 통해 1028년에 정림사라는 명칭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를 참고하여 정림사지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다만 이후에 여러 연구가 이루어지고 부소산성에서도 정림사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면서, 현재의 정림사가 실제 정림사가 맞는지에 대해 학계에서 이견이 제기되었다. 또한 정림사라는 이름이 옳다고 하더라도 이는 고려 시대의 이름이지, 백제 시대의 명칭이 무엇이었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정림사지는 중문지·회랑·석탑·금당지·강당지·승방지 등으로 구성되었다. 기본적인 가람 배치는 백제 시대의 구조이나, 고려 시대에도 건물들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지는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시행하여 대강의 모습을 파악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당시의 모습에 맞춰 유적 위에 기단을 복원하였다. 기단을 복원하면서 이른바 와적기단이라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와적기단은 기와를 쌓아 올린 기단이라는 뜻이다. 기와를 가로로 혹은 세로로 쌓아 올려 모양새를 갖추었다. 아울러 복원 정비 과정에서 기와를 이용하여 길을 조성하였다.

 

와적기단으로 쌓아 올린 중문지와 회랑지
와적기단으로 쌓아 올린 중문지와 회랑지

 

정림사지 입구에 들어서면 네모난 연못 2곳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연못 사이에 난 길을 따라 걸어가면 중문지가 등장한다. 중문지는 기단과 주춧돌을 써서 복원되었다. 고려 시대의 기단에는 돌덩어리를 모은 주춧돌, 즉 적심석을 썼지만 현재는 적심석 대신 주춧돌을 써서 배치하는 식으로 복원되었다.

 

1400년의 세월을 버텨 온 정림사지 오층 석탑

중문지에 올라서면 국보 제9호로 지정된 정림사지 오층 석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 중 하나인 정림사지 석탑은 후대의 석탑에 비해 단출하면서도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 옥개받침이 명확하게 새겨지지 않은 점은 단출한 면이지만, 일일이 각 부재를 돌을 깎아 조립하여 올린 모습은 다소 복잡하게 보인다. 비례를 맞춰 정연하게 쌓아 올리고 옥개석 끝부분을 살짝 들어 올린 모습은 목조 건축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정림사지 오층 석탑
정림사지 오층 석탑

 

정림사지 오층 석탑에 쓰인 석재는 정교하게 다듬어져서 1400년의 세월을 버티고 있다. 1층의 탑신이 다른 탑신에 비해 크게 만들어졌으며, 그 위로 2층부터 5층까지는 비례를 이루며 쌓아 올려졌다. 149개의 석재를 짜 맞추어 올렸으며, 8.33m로 다소 높은데도 불구하고 안정감 있게 세워졌다. 오랜 세월 때문인지 틈새가 벌어지거나 부서진 부분도 있지만 여전히 견고한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다. 정림사지 오층 석탑 주변에서는 여러 도용(陶俑)이 발견되었다. 이를 근거로 정림사지 석탑은 본래 목탑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중국에서는 백제와 비슷한 시기에 목탑을 축조하였으며, 그 안에는 각종 도용이 장식되었다. 중국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백제에서도 비슷한 목탑이 축조되었다고 추측한 것이다.

1층 탑신 전체에는 앞서 언급한 ‘대당평백제국비명’이 새겨졌다. 지금은 글씨가 마멸되어 육안으로 쉽게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이다. 다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글자가 제대로 보이고 탁본을 통해서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정약용이 부여에 방문하여 정림사지를 찾은 적이 있었는데, 비문을 보고는 벌레 먹은 잎처럼 자획이 흐릿하고 새가 쫀 나무마냥 어지럽다고 하였다. 한치윤의 <해동역사>에서는 탁본을 얻어 비문의 내용을 모두 옮겨 적어 놓았다. 또한 현재 정림사지박물관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의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강당에서 바라본 금당지와 정림사지 오층 석탑
강당에서 바라본 금당지와 정림사지 오층 석탑

 

정림사지 복원된 강당
정림사지 복원된 강당

 

석탑 뒤편에는 흙으로 쌓아 올리고 나무로 테두리를 맞춰 놓은 2단의 넓은 기단이 있다. 즉 금당 기단에 해당하며, 이 위에 정림사지의 중심 건물인 금당이 있었다. 금당에는 백제 시대 불상이 모셔졌던 것으로 생각되며, 절의 주요 행사가 이루어졌던 장소였다. 다만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당시의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다만 적심석의 숫자나 배치를 보아 2층의 건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당의 뒤편에는 강당이 복원되어 있다. 단층에 맞배지붕으로 만들어졌으며, 지붕 양쪽 끝에는 치미가 올려졌다. 발굴을 통해서 드러난 백제의 문양, 즉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벽화에서 확인되는 연꽃이나 환두대도에 장식된 봉황 무늬 등을 이용하여 단청을 꾸몄다. 공포 또한 백제 시대의 유물에서 확인되는 모습을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전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조성되었으며, 전면에 3개의 문을 냈다. 건물 안에는 전돌을 깔아 놓아, 오늘날 우리가 아는 사찰 건물과는 차이가 있다.

 

고려 시대부터 정림사지를 지켜 온 석조 여래 좌상

정림사지 강당 안에는 보물 제108호로 지정된 정림사지 석조 여래 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다만 정림사지 오층 석탑과는 다르게 백제 시대에 조성된 불상이 아닌, 후대에 안치된 불상으로 보고 있으며 그 시대는 주로 고려 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의 불상과 불두, 대좌가 모두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한 모습으로, 모두 시대가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신체는 마멸이 매우 심하여 둥글둥글한 모습으로 되어 있다. 현재 상황에서 수인을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손을 합장하듯이 모아 놓은 것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불두는 둥그스름하며 보관을 머리에 쓰고 있다. 불상의 얼굴은 눈코입이 뚜렷하며 희미한 미소가 아로새겨졌다. 훼손이 심한 불상 위에 올려져 있기 때문에 다소 아슬아슬하다는 생각도 든다. 보관을 쓰고 있는 모습은 이 지역 충청남도 남부 일대에서 자주 확인되는 모습이다. 고려 시대 미륵 신앙과 연관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대좌는 파괴 흔적이 심하지만 그 형태는 매우 정교하고 불상에 비해 마멸이 덜한 편이다.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로 구성되었으며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대의 보존 상태가 가장 나은 편이고, 중대와 상대는 파괴된 흔적이 강하다. 하대의 복련은 뚜렷하고 볼륨감 있게 만들어졌으며 안상도 잘 남아 있다.

정림사지 석조 여래 좌상은 부조화의 조화를 이루었다. 백제 멸망 이후에 이곳에 살던 부여인들은 후대에 조성되었지만 모두 파괴되거나 훼손된 불상 부재를 다시 하나로 모았다. 깊은 상처가 남아 있었지만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의 불상으로 다시 완성하였다. 마치 백제의 멸망이라는 큰 상처를 다시 기워 내듯 불상을 조성하였고, 다시 부여인들에게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최근까지도 비바람을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던 불상은 이제 강당에 자리하게 되었다. 불상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정림사지 오층 석탑을 바라보며 묵묵히 관람객들을 맞이하면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다.

 

석조 여래 좌상 전면
석조 여래 좌상 전면

 

정림사지는 백제 시대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1탑 1금당의 구조로 남북 일직선상으로 건물이 배치되었다. 백제의 가람 배치는 이후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시텐노지(四天王寺)가 1탑 1금당으로 조성되었으며, 백제의 영향을 받은 사찰로 일컬어진다. 고려 시대에도 정림사지는 다시 이용되었으며, 백제 시대의 강당 자리를 금당으로 삼아 현재의 불상을 안치시켜 주존불로 삼았다.

정림사지 오른편에는 정림사지박물관이 있다. 정림사지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에는 비석들이 자리하고 있다. 명혜공주태실비, 동서장군석, 부여 임천대교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비석들의 왼편에는 부여 금강사지에서 출토된 주춧돌들이, 오른편에는 관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주춧돌들이 진열되어 있다.

 

정림사지 오층 석탑에 새겨진 백제의 아픔

정림사지는 백제의 영광을 대표하는 사찰이자 수도의 중심에 위치한 일종의 랜드마크였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백제의 새 수도에서 야심차게 건립되었지만, 멸망 이후에는 그러한 영광 때문에 오히려 수모를 겪는 신세가 되었다. 당나라에서 온 소정방은 자손만대에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백제의 랜드마크를 훼손하였다. ‘대당평백제국비명’은 그러한 백제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흔적이다.

부여에 방문하였던 정약용도 평제탑을 답사하여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읽었다. 그는 일찍이 부여의 여러 명승지를 답사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남겼었다. 정약용이 정림사지에 방문하여 남긴 시는 <다산시문집>에 수록된 소‘ 정방의 평백제탑을 읽고(讀蘇定方平百濟塔)’이다. 그의 시는 백제의 멸망이나 당나라의 승리 모두가 역사 앞에서는 부질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시의 마지막 구절을 소개하면서 글을 맺는다.

 

개선가 강 고을을 진동할 적에 凱歌震水鄕

그 당시 만백성은 엎드려 있고 當時萬人伏

많은 돛배 바다로 돌아갈 적에 雲帆歸滄海

그들 사기 온 누리 충만했으리 意氣彌平陸

승리 또한 한때의 기쁨이었고 勝亦一時欣

패배 역시 한때의 치욕일 따름 敗亦一時辱

지금 다만 들밭의 가운데 놓여 只今野田中

나무꾼 소먹이꾼 주위 맴도네 躑躅放樵牧

 

부여 금강사지에서 출토된 주춧돌
부여 금강사지에서 출토된 주춧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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