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좋은 날, 사형 선고를 언도받다
사랑하기 좋은 날, 사형 선고를 언도받다
  • 김선아 기자
  • 승인 2019.07.03 09: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중근 동상
안중근 동상

 

사랑하는 사람한테 고백하기 좋은 밸런타인데이는 발렌티누스 주교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로마 황제의 군인 금혼령을 어기고 결혼을 원하는 연인들에게 혼배 성사를 집전해, 296년 2월 14일에 처형당했다. 그로부터 1614년이 지난 1910년 2월 14일에는 조국과 동양의 평화를 사랑한 도마 안중근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전경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전경

 

기념관 가는 길에
기념관 가는 길에


남산 조선 신궁 터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1970년 10월 26일에 처음 개관되었다. 일제 식민지의 상징인 남산 조선 신궁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현재 기념관 건물은 2010년에 새로이 건립한 것으로, 12개의 유리 기둥은 안중근 의사가 활동했던 단지동맹을 상징한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는 길 벽면에 빼곡하게 안 의사가 남긴 명언들이 새겨져 있었다.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見利思義 見危授命(불의를 보거든 정의를 생각해 보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의협심을 갖도록 하라)’, ‘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등 그의 강직한 성품이 드러나는 문장과 맨 아래 약지 관절 한 마디가 잘린 손도장을 보자 일본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기념관 중앙 홀에는 안중근의 생전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좌상이 놓여 있었고, 그 뒤로 동지들과 함께 약지를 자르고 그 피로 ‘대한 독립’을 쓴 태극기가 펼쳐져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하고 전시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중근 좌상
안중근 좌상

 

제1전시실 내부
제1전시실 내부

 

흔들리는 조선, 굳건해지는 안중근 집안

제1전시실은 안중근 개인의 역사와 그 당시 조선의 역사적 사건이 나란히 펼쳐져 있어서 국가의 역사와 개인의 삶이 함께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른편에 전시된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청일 전쟁, 을미사변, 러일 전쟁, 을사늑약 등 일제의 마수에 빠져 흔들리는 조선을 보면서, 바꿀 수 없는 게 역사라는 걸 알지만 매번 안타깝고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시대에 안중근이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 같은 점이 일곱 개 있어서 어릴 때 안응칠이라고 불렀다. 소년 시절 그는 글공부보다는 사냥과 활쏘기, 말타기 등을 더욱 즐겨 했다. 그런 그를 보며 아버지가 학문을 소홀히 한다고 걱정하자 안중근은 “나라에서 문을 숭상하고 무를 업신여겨 나라가 문약해졌습니다. 저는 학문으로 이름을 남기기보다 장부다운 기개로 역사에 남기를 바랍니다.”라고 자신의 포부를 당당히 밝혔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직시하는 날카로운 안목에 놀랐고, 그의 말이 진짜 현실로 이뤄졌다는 사실에 생각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리고 제1전시실이 끝날 때쯤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어머니(조마리아)를 비롯해서 친동생들(안정근, 안공근), 사촌들(안명근, 안경근, 안홍근), 조카들(안원생, 안낙생), 가까운 친인척(안춘생, 최익형, 안봉생, 오항선, 조순옥)까지 독립운동을 해서 건국 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이 무려 15인이나 되었다. 이런 훌륭한 가정 배경이 뒷받침되었기에 안중근 같은 위대한 영웅이 태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런 집안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명문가로 인정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국의 대의를 이은 안중근 집안
구국의 대의를 이은 안중근 집안

 

안중근 의사의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은…

<구국의 대의를 이어간 가문>에 전시된 안중근 가계도 인물 사진을 보는데 앳된 안문생(1095∼1911) 얼굴이 눈에 밟혔다. 그 사진을 보니 예전에 들은 안중근의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장남 안문생은 연해주에서 짧은 생을 마무리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일곱 살. 누군가 안중근의 아들인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다가온 그에게 상냥하게 과자를 주었다. 그 과자를 먹은 후 문생은 고통스러워하며 죽어 갔다. 일제의 밀정이 독살한 것이다. 일제의 만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끊임없이 안중근의 가족을 감시하고 괴롭혔다.

일본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 안중근의 유일한 아들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분키치를 만나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의 죄를 사죄했다. 그런 그를 분키치는 너그럽게 용서했다. 그리고 이러한 화해의 쇼는 일본 곳곳에서 펼쳐졌다. 일제의 만행을 응징하고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안중근의 위대한 업적이, 그의 아들로 인해 사사로운 개인 원한에 의한 살인 사건으로 위장된 것이다. 독립운동으로 건국 훈장을 받은 이가 15명이나 되는 명예로운 안중근 가문, 그 빛나는 훈장 아래 어두운 가족사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해졌다.

 

안중근 가족사진
안중근 가족사진

 

안중근 의사의 활동 지도
안중근 의사의 활동 지도

 

토마스, 애국 계몽 운동, 국채 보상 운동

제1전시실을 나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제2전시실에는 안중근이 하얼빈 거사를 행하기 전까지 활약했던 독립운동들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천주교 활동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 안태훈이 곤경에 처했을 때 프랑스인 신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인연으로 가족들이 천주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안중근은 1897년에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의 호 ‘도마’는 천주교 세례명 토마스에서 온 것이다. 그는 부인에게 남긴 유언에 장남 안문생이 커서 신부가 되길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 순국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독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런 그가 십계명 중 하나인 ‘살인을 하지 말라’를 어기고 하얼빈 거사를 실행했다는 사실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절망한 심정이 더욱 무겁게 와닿았다.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안중근은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그곳에서 조국을 지킬 방안을 찾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귀국해 애국 계몽 운동에 뛰어들었다. 사재를 털어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했다. 또, 1907년 초 국채 보상 운동에서는 관서지부장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전 가족의 장신구를 모두 헌납하는 등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 안중근 의사 하면 이토 히로부미 암살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 전 부단히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제2전시실에서 알게 된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은 ‘국내 진입 작전’이었다.

 

동의회의 의병 부대, 국내 진입 작전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트집 잡아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안중근은 망명을 선택하였다.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에 도착해 한인 마을들을 순회하면서 계몽 활동과 함께 의병을 조직했다. 때마침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이 군자금을 지원해서 1908년 4월에 연해주에서 항일 의병 결사 단체인 동의회가 조직되었다. 거기서 안중근은 의병 부대의 우영장을 맡아 150여 명의 의병대를 훈련시켰고, 엄인섭과 함께 국내 진입 작전을 펼쳤다.

1908년 6월에 있었던 첫 번째 국내 진입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안중근은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 중이었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해서 일본군을 완전 소탕하는 성과를 이뤘다. 그리고 두 번째 작전도 거의 성공할 뻔했다. 함경북도 경흥 부근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일본군과 일인 상인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이 생포된 적병이 문제가 되었다. 안중근은 인도주의와 만국 공법에 따라 사로잡힌 적병을 죽일 수 없다며 부대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포로를 석방했다. 이 사건으로 의병 부대는 분열되었고, 석방된 포로들에 의해 위치가 탄로 나서 일본군의 기습까지 받게 되었다. 결국 의병 부대는 패하고 말았다.

 

국내 진입 작전
국내 진입 작전

 

그동안 보여 줬던 일본의 만행을 알면서도 일본군에게 인도주의와 만국 공법의 원칙을 적용했다는 것이 잘 납득되지 않았다. 안중근이 너무 순진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였기에 재판장에서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 전쟁의 한 부분이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오. 대한 의군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단지한 손가락 모형
단지한 손가락 모형

 

안중근 의사 단지 혈서 엽서
안중근 의사 단지 혈서 엽서

 

12명의 동지들이 피로 쓴 大韓獨立(대한독립)

제2전시실 마지막 부분에서 안중근의 단지동맹이 전시되어 있었다. 잘린 손가락과 피가 담긴 그릇 그리고 붓이 놓여 있는데 모형이라는 걸 알면서도 보는 것만으로도 단지동맹을 맺은 12명의 결의가 느껴졌다. 그들은 1909년 2월 크라스키노의 하리 마을에서 자신들의 왼손 약지의 첫 관절을 잘라 단지동맹을 맺었다. 조국 독립의 회복과 동양 평화의 유지를 위해 피로 맹세를 했다. 맹세의 피로 태극기 위에 굳은 의지인 ‘大韓獨立’이라는 네 글자를 썼다.

 

안중근 의사의 권총
안중근 의사의 권총

 

이토 히로부미의 총알 흔적도
이토 히로부미의 총알 흔적도

 

제국주의 심장에 총을 쏘다

제3전시실은 하얼빈 의거 계획부터 실행까지 날짜별, 시간별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판넬로 시작되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장 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기 위해 1909년 10월에 만주로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등은 하얼빈에 도착해 의거 계획을 세웠다. 혹시 모를 만약을 대비해 두 팀으로 나눠 채가구역은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역은 안중근이 맡았다.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채가구역에 있던 우덕순과 조도선이 감금되었고, 열차는 정차하지 않고 곧장 하얼빈으로 향했다.

오전 9시 30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서 내려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 군대 앞을 막 지나가는 순간, 안중근이 6발의 총을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지고 일본 총영사관 등 수행원 3명이 총을 맞았다. 이토의 얼굴을 모르는 안중근이 확실히 하기 위해 주변의 3명을 더 저격한 것이다. 그 후, 안중근은 러시아 말로 대한민국 만세인 “코레아 우라!”를 외친 후 러시아 헌병들에게 순순히 체포되었다. 하얼빈 의거 상황을 재현한 모형, 안중근이 사용한 권총과 총알, 이토 히로부미가 맞은 총알 흔적도를 보는데, 진짜가 아니라 모형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당시를 함께하는 듯한 착각에 마음속으로 “코레아 우라!”를 외쳤다.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을 밝히다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불법적으로 일본 총영사관에 인계되어 11월 3일 뤼순감옥에 수감되었다. 안중근은 대한 의군 참모 중장이며 임무 수행 중에 포로로 잡힌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국제법을 무시하는 일제는 이를 전부 무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민선 변호인단을 금지하고 언론도 봉쇄한 채 재판을 일방적으로 진행했다.

그런 불평등한 상태에서도 안중근은 재판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을 당당하게 밝혔다. 대한민국의 황후를 시해하고, 황제를 폐위시켰으며,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고 무고한 한국인 학살 등 15가지 죄상을 열거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알렸다.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안중근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는 명백히 부당한 재판의 결과였다. 그러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말에 안 의사는 공소권을 포기하고 형을 받아들였다.

 

안중근 재판 당시 모형
안중근 재판 당시 모형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 독립 의지를 불태우다

기념관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뤼순감옥 독방과 그곳에서 집필한 <안응칠역사>, 수많은 옥중 유묵 그리고 사형 집행으로 인해 끝내지 못한 <동양평화론>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을 보니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불태운 안 의사의 강인한 의지와 초연한 자세에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은 지 한 달 조금 넘은 3월 26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전 안중근이 어머니에게, 부인에게, 신부님에게 그리고 동포에게 남긴 유서를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그는 어머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효자였으며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이자 착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이 살아가는 나라를 지키고자 한 대한 의군이었다.

그가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나라는 1945년 8월 15일에 되찾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 돌아오지 못하고 효창 공원 삼의사의 묘에 가묘만 조성되어 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라고 안 의사가 유언을 남겼지만, 일제는 사형 집행 후 시신을 가족들에게 인계하지 않고 비밀리에 안장하여 지금까지도 입을 닫고 있다. 일본의 만행에 분노와 제대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죄송한 마음이 교차했다.

 

효창 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
효창 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 여정 따라가기’, ‘안중근 의사에게 편지 쓰기’, ‘유묵 찍어 보기’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벽면 가득 채워진 포스트잇이었다. 방문객들이 안중근 의사에게 남긴 말들을 찬찬히 읽어 보는데, 감사하다는 말과 덕분에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말이 많았다.

밸런타인데이인 2월 14일은 발렌티누스 주교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상업적인 측면으로 이용되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이날 용기를 내어 고백한 사랑이 이뤄진다면 발렌티누스 주교는 분명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염원했던 대한 의군 안중근 의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독립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사랑을 나누는 국민들의 모습을 본다면, 분명 천국에서 기뻐 춤출 것 같다.

 

 

이번 밸런타인데이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찾아가 보는 데이트 코스는 어떨까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