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건릉에서 만난 사도세자와 정조의 슬픔
융건릉에서 만난 사도세자와 정조의 슬픔
  • 박기범 기자
  • 승인 2019.07.03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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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은 왕릉답게 수목조성이 잘 되어 있어 산책 삼아 방문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융건릉은 왕릉답게 수목조성이 잘 되어 있어 산책 삼아 방문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비극을 목격한 정조는 상처를 이겨내고 어진 임금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항상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임금이 된 뒤에도 정조는 아버지를 잊지 않았고, 현륭원(지금의 융릉)을 조성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사후에는 본인도 아버지 곁에 잠들었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장면을 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는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이 슬픈 현장에는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도 있었다. 정조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훗날 모든 백성이 존경하는 임금으로 성장한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정비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나타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뒤를 이을 왕세자의 지위에 있었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폐위된 상태였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숨을 거둔 뒤 양주 배봉산(현재 동대문구 휘경동) 언덕에 쓸쓸히 묻혔다. 조선 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은 ‘원’, 사대부나 일반 백성의 무덤을 ‘묘’라고 불렀다. 사도세자는 왕세자였지만 그래서 그의 묘는 ‘원’으로 불릴 수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가슴 아프게 지켜봤던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열흘 만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원’으로 격상하고 ‘영우원’이라고 불렀다. 정조는 이때 사도세자의 시호도 장헌세자로 고쳤다. 훗날 고종은 이를 다시 장조로 높였다. 1789년에는 영우원을 현재 융릉(화성시 안녕동)으로 옮기게 하고 ‘현륭원’이라고 고쳐 불렀다. 이후 고종은 1899년에는 현륭원을 융릉으로 높였다. 사도세자의 묘는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묘, 원, 능을 모두 거친 능이 되었다.

 

장조와 헌경황후의 합장묘 융릉

매표소를 지나 융건릉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재실이 보인다. 재실은 융건릉과 관련된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다. 융건릉 재실에는 천연기념물 제504호인 개비자나무도 있다. 재실을 지나 길을 오르면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왼쪽은 정조와 효의황후의 합장묘인 건릉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사도세자(장조)와 혜경궁홍씨(헌경황후)의 합장묘인 융릉으로 가는 길이다. 융릉을 먼저 보기 위해 오른쪽 길로 향했다. 융릉과 건릉은 길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을 먼저 봐도 상관없다.

융릉으로 가는 길에는 소나무가 많아 한적한 수목원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화창한 날에는 가족과 함께 산책을 나온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잠시 앉아 사색을 즐기기에도 좋다.

융릉에는 곤신지라는 이름의 원형 연못이 있다. 융릉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 연못을 파면 길하다고 해서 조성됐다. 곤신지를 지나 융릉 홍살문 앞에 서면 멀리 정자각이 보인다. 그리고 정자각 오른쪽으로 융릉이 보인다. 조선 시대에 왕릉은 정자각과 일직선이 되도록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융릉은 풍수지리에 의해 능을 배치하다 보니 정자각과 일직선이 되지 않는다.

 

융릉 홍살문과 정자각
융릉 홍살문과 정자각

 

융릉의 모습
융릉의 모습

 

정자각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이 융릉
정자각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이 융릉

 

조선 왕릉은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선조들의 건축 양식이 살아 있는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왕릉의 보호를 위해 멀리서만 볼 수 있지만, 융릉은 한눈에 보기에도 아름답고,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봉분 아래에는 모란과 연꽃으로 새겨진 병풍석이 있고, 봉분과 지면이 닿는 부분에는 외첨석을 설치했다. 비각에는 두 개의 묘비가 있는데 하나는 정조 13년(1789)에 세워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광무 4년(1900)에 마련된 것이다. 두 비문에는 각각 사도세자에 대한 소개와 현륭원 조성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정조 13년에 세워진 비는 정조가 직접 글을 지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융릉에서는 정조대왕의 행차와 제향이 재현된다. 전통 예법에 따라 제관들이 제를 진행하고 수많은 사람이 이를 지켜본다. 잘 보존된 융릉과 제향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비극과 정조의 효심을 현대에도 느낄 수 있다.

 

융릉 정자각. 융릉 제향이 매년 이곳에서 열린다.
융릉 정자각. 융릉 제향이 매년 이곳에서 열린다.

 

건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융릉과 달리 정자각과 건릉을 일직선으로 배치했다.
건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융릉과 달리 정자각과 건릉을 일직선으로 배치했다.

 

건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융릉과 달리 정자각과 건릉을 일직선으로 배치했다.
정조임금과 효의황후가 합장된 건릉

 

정조와 효의황후의 합장묘 건릉

융릉에서 길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면 건릉이 있다. 융릉을 바라보고 왼쪽을 보면 숲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된다. 중간에 길 안내가 잘 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건릉을 찾을 수 있다.

건릉에 도착해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바라보니 능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 왕릉의 일반적인 구조에 따라 정자각과 왕릉을 일직선으로 배치한 것이다. 정조와 효의황후의 합장묘인 건릉은 본래 융릉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효의황후 승하 후 현재 위치에 합장했다. 건릉 역시 왕릉 보호를 위해 멀리서만 볼 수 있었다. 비각에는 광무 4년(1900)에 세워진 비석이 있다. 비문은 정조와 효의황후와 능 조성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정조는 사후에 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제는 효의 표본이 되어 현대인들에게 효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다.

 

누구보다 극적인 삶을 살았던 사도세자와 정조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백성에 대한 애민정신도 뜨거웠다. 항상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군주였고, 개혁 정치를 펼치면서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추진했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복수를 하지는 않았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손에 숨을 거두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고 아버지 영조도 그런 아들을 총애했다. 그런데도 훗날 영조와 갈등을 겪으면서 결국 아버지 손에 죽게 되니 사도세자의 운명은 누구보다 파란만장했다.

이렇게 애절한 사연을 가진 아버지와 아들이 또 있을까? 온 가족과 함께 융건릉을 찾아보자.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가슴 따뜻한 역사 이야기와 효심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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