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 호사카 유지 교수에게 한일 관계를 묻다
[3·1 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 호사카 유지 교수에게 한일 관계를 묻다
  • 김도윤 기자
  • 승인 2019.07.03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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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한일 양국의 관계는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피해국과 가해국이었지만, 1998년 10월 8일 故 김대중 전 대통령-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 때에는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 선언’(이하 ‘한일 파트너십’)이 발표될 정도로 친밀했다. 하지만 오늘날 한일 관계는 역대 최악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나쁘다. 3·1 운동이 100주년을 맞는 2019년 3월, 한국으로 귀화한 호사카 유지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1945년 종전 후 한일 관계 변화의 흐름을 되짚어 봤다.

 

호사카 유지 교수 (본인 제공)
호사카 유지 교수 (본인 제공)

 

3·1 운동 100주년을 바라보는 한일 내 다양한 시각

호사카 유지 교수는 1956년 일본 도쿄 출생으로 1988년 한국에 들어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세종대학교 독도종합연구소 소장 겸 정치학 및 일본학 전공 교수로 독도,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관계를 둘러싼 문제를 폭넓게 다뤄 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홍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Q. 올해로 3·1 운동이 100주년을 맞았다. 개인적으로 한국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A. 3·1 운동은 일제에 맞선 평화 시위였다. 한국은 이 운동의 정신을 기반으로 건립됐다. 헌법 전문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돼 있다. 앞으로도 3·1 운동을 잘 이어 가야 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3·1 운동과 문재인 정부는 닮은 점이 있다. 3·1 운동이 일제에 맞선 평화 시위였다면, 현 정부는 촛불혁명이라는 박근혜 정부의 적폐에 맞서 들고일어난 평화 시위 이후에 출범했다. 국가가 폭력을 쓰지 않고 법회를 통해 국민의 합의를 끌어내고 사회적 적폐를 청산해 나가고 있는데, 그 모습이 비폭력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3·1 운동 정신과 닮았다.

 

3·1 운동 당시 모습 (출처 나무위키)
3·1 운동 당시 모습 (출처 나무위키)

 

Q. 3·1 운동 100주년에 대해 일본 정계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일본 정계는 3·1 운동 100주년에 대해 우려를 하는 편이다. 올 초부터 3·1 운동이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이었던 만큼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한국 내 반일 감정이 더욱 고조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분석이 나온 배경에는 급변한 남북 관계도 있다. 그동안 한국, 일본, 북한의 관계는 한일과 북한이 대립하는 구도였다. 하지만 남북은 지난해 4·27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3·1 운동이라는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이에 반일이라는 공통된 감정으로 남북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리라는 것이 일본 정계의 관측이다. 하지만 모든 일본인이 이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3·1 운동 100주년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분명히 존재한다.

 

Q. 일본 내 어떠한 부류가 3·1 운동에 관심이 많은지 궁금하다.

A. 일본 대학교나 단체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특히 기독교 대학교나 종교계에서 3·1 운동과 관련된 학술 심포지엄도 꾸준히 진행하는 등 많은 관심을 보인다. 기독교 대학으로 유명한 메이지대학원은 이미 1월 26일 한국의 한동대학교 교수진과 종교문화연구소장을 초빙해 3·1 운동과 한국 총기독교 관련 주제로 강연을 진행한 바 있다. 재일 교포들이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례가 적지 않는데, 조경달 재일 교포 교수는 지난해 6월 30일부터 현재까지 ‘3·1 조선 독립운동 100주년’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캠페인 취지를 살펴보면 1919년부터 올해에 이르기까지 한국 내 투쟁의 역사를 배우고 동북아시아 내 한국, 북한, 일본 3국의 관계를 재정비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고 나와 있다. 캠페인 공식 홈페이지에 전공 분야와 상관없이 뜻을 함께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캠페인에 참여할 수 있으며, 향후 한국 활동가와 교류하여 규모를 확대할 방침이라고 돼 있다. 이들은 또한 촛불혁명에도 많은 관심이 있다. 촛불혁명이 근래에 일어난 대규모 운동인 동시에 3·1 운동 정신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캠페인에 동참한 사람들은 한국의 투쟁 역사가 일본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한 일본 정계의 흐름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기획한 도서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에 따르면 오늘날 한일 관계는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과 ‘부속 협정’에서 비롯됐다. ‘기본 관계’ 제2조에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 제국과 대일본 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라고 명시돼 있는데, 여기서 ‘이미’가 의미하는 시점은 각국의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오랜 시간 논쟁 끝에 어렵게 이뤄 낸 합의였던 터라 해석의 여지를 남기게 된 것이다. 명확치 못한 합의는 되레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됐다. 2011년과 2012년에 불거진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로 한일 관계가 악화됐다. ‘한일 청구권 협정’ 3조 1항에 따르면 협정 해석 등과 관련한 양국 간 분쟁은 외교상 경로를 통해 해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도 오늘날 한일 관계의 흐름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정치, 사회·문화적 변화를 알 필요가 있다고 피력했다.역사문제연구소에서 기획한 도서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에 따르면 오늘날 한일 관계는 1965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부속 협정에서 비롯됐다. ‘기본 관계2조에는 “19108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 제국과 대일본 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라고 명시돼 있는데, 여기서 이미가 의미하는 시점은 각국의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오랜 시간 논쟁 끝에 어렵게 이뤄 낸 합의였던 터라 해석의 여지를 남기게 된 것이다. 명확치 못한 합의는 되레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됐다. 2011년과 2012년에 불거진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로 한일 관계가 악화됐다. ‘한일 청구권 협정’ 31항에 따르면 협정 해석 등과 관련한 양국 간 분쟁은 외교상 경로를 통해 해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도 오늘날 한일 관계의 흐름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정치, 사회·문화적 변화를 알 필요가 있다고 피력했다.

 

‘쇼와의 요괴’라 불린 기시 노부스케. 쇼와는 일제의 침략 전쟁이 한창일 때 일왕의 이름이자 당시 연호이다. (출처 나무위키)
‘쇼와의 요괴’라 불린 기시 노부스케. 쇼와는 일제의 침략 전쟁이 한창일 때 일왕의 이름이자 당시 연호이다. (출처 나무위키)

 

Q. 패망 이후 현시점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가?

A. 1945년 패전한 일본은 연합국에 점령돼 7년간 지배를 받았다. 그 당시 일본의 집권 세력인 자유당은 연합국 48개국과 1951년 전범 국가로서 죄를 인정하는 대신 독립국임을 인정받는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이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한반도를 비롯한 식민지국을 공식적으로 포기한다고 선언했으며, 중국과 소련에서 진행된 국제 재판 결과 역시 모두 수용하는 등 패망국의 수순을 밟아 갔다. 그로 인해 일본 에이급 전범 4명이 모두 사형이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물론 한국은 이미 1948년 독립했다. 하지만 가해국인 일본이 스스로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평화 조약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남다르다. 이처럼 전범 국가였음을 인정한 사람들을 ‘보수 본류’(전통보수파)라고 하는데, 이들이 속한 자유당이 1855년 일본민주당과 자민당이라는 통합 보수 정당으로 합당되면서 자민당 역시 전범 국가였음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로 인해 초반 자민당 수상은 보수 본류에서 많이 배출됐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가해국의 시민으로서 피해국인 한국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일 관계 역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자민당의 비주류이자 아베 신조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가 2대 총리로 선출됐다. 비주류 정치인들은 1946년 미국이 만든 평화헌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 본류와 달리 미국이 헌법을 제정할 당시 일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Q. 기시 노부스케란 어떤 인물인가?

A.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 총리의 외조부로 만주국을 건립한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에이급 전범으로 미국 연합군에 의해 체포됐으나 석방됐다. 당시 관련 문서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이 미국에 732부대 일급비밀을 건네는 조건으로 석방된 것으로 추측한다. 실제 732부대 생체 실험에 가담한 상당수의 의사가 일본

유명 의과대학의 교수로 재직해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아베 정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 군대 창설을 주장하는 이유도 아베가 어린 시절부터 기시 노부스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실제 기시 노부스케의 집에서 같이 살았다. 미국은 평화헌법을 제정할 당시 일본이 군대를 가질 수 없도록 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창설된 것이 자위대이다. 자위대는 일본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경찰예비대일 뿐 군대가 아니다. 오늘날 아베 총리가 군대를 창설하겠다고 발언하는 이유도 국제법상 군대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Q. 그렇다면 기시 노부스케 총리 이후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득세해 온 것인가?

A. 그렇지 않다. 기시 노부스케 이후 보수 본류와 비주류에서 비슷한 총리를 배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에 위해를 가한 가해국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한국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한일 관계에 또다시 변수가 등장한다. 1980년대 나카소네가 수상으로 선출되는데 이 사람은 기시 노부스케 라인으로, ‘일본이 침략 국가였다는 데에서 벗어나자’, ‘모두 청산했으니 이제 과거와 결별하자’, 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겠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야스쿠니 신사는 에이급 전범들이 모두 신격화된 곳이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보수 본류 사람들이 자민당 총리가 됐다.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사과하고 강제성을 일부 인정하다고 발표했던 고노 담화 역시 보수 본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보수 본류에 반발하는 이들이 점차 증가했다. 마지막 보수 본류가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다. 그는 1998년 10월 8일 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나 한일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에는 한국에 대단히 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인정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65년에 이미 한일 기본 조약이 맺어졌지만 여기에는 사과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한일 파트너십은 양국에 여러모로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이후 과로로 급사했고 이후 헌법 개정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 총리가 배출됐다. 오늘날 이들은 처음부터 일본은 침략 국가가 아니라며 한국을 침략한 사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국을 근대화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안중근 열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기도 했다. 3·1 운동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아마 테러로 간주할 것이다. 아베 정부는 한국을 일본 영향권 안에 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북한 사이에 평화로운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을 매우 반대하고 있다.

 

(출처 픽사베이)
(출처 픽사베이)

 

종전 이후 최악의 외교적 파트너가 된 한일

Q. 일본 정계가 그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면 사회·문화적으로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A. 한일 관계가 사회·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1987년 한국에 민주화 운동이 불고 난 이후이다. 군부 시절에는 한국인이 일본에 가려면 여러 절차를 거쳐야만 했으며 비자 역시 쉽게 발급되지 않았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일본에도 영향을 줬다. 당시 일본 사회에는 재일 교포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했다. 하지만 한국의 영향을 받은 재일 교포 1세대의 시위가 증가하자 일본은 1세대 한국인들에게 참정권과 정치인이 되는 권리만 제외한 모든 권리를 인정했다. 그러다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일본 국회에 가서 연설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에서는 한국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새로운 한일 관계가 형성됐다. 하지만 독도 문제로 한일 간에 새로운 갈등이 발생한다.

1994년 유엔은 200해리까지를 배타적 경제 수역으로 결정했다. 그때부터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 주장하기 시작했다. 시마네현 의회는 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르기 시작했고,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지정했다. 여기에 시마네현 사람들까지 가세하면서 2005년 독도 문제가 심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사이에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개최됐으며, 2004년에 일본에서 드라마 <겨울연가>가 방영되면서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다. 한국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98년 한일 파트너십을 맺은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 문화를 개방했다. 그 전까지는 한국에서 방영하는 일본 드라마가 모두 불법이었다. 이 당시 일본에 한국이 ‘IT강국’으로 알려지면서 한국인을 채용하려는 일본 기업이 증가했고, 일본 공무원들이 한국을 시찰하려 여러 차례 방문했다.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점차 좋아지자 여기에 반감을 품는 일본인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혐한 시위를 벌이는 상당히 나쁜 일본인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2005년 신주쿠 코리아타운에서 혐한류 시위를 벌이며 한인들에게 나쁜 짓을 한다. 이에 혐오 발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 법안이 제정되고 혐한류 시위에 맞서는 깨인 의식을 가진 일본인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혐한류 시위가 벌어지는 바로 옆에서 이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로 인해 혐한류가 한동안 수그러들었다.

 

Q. 한때 한일 파트너십까지 맺었던 한일 관계가 오늘날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A. 2011년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가 맞물리면서 한일 관계가 급전된다. 2011년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한일 정상 회담 자리에서 “위안부 권리 구제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 재판소 결정에 따라 (그리고 ‘한일 청구권 협정’ 3조 1항에 근거해) 일본에 양자 협의를 요청한 적이 있다. 하지만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이를 거부했다. 1년 뒤인 2012년 8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다. 이전까지 현직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경우는 없었다. 이에 독도를 국제 사법 재판소에 제소하자는 목소리가 일본 내에서 커졌으며 같은 해 12월 아베 신조가 총리가 됐다.

2015년 5월 한일 정상 회담에 참석한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 위안부 문제를 합의했다. 하지만 당시 위안부 합의는 일본 주도하에 이뤄진 합의였다. 그 때문에 재합의가 필요하지만 여전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 오늘날 아베 정부는 강제 징역 배상이나 초계기 등을 문제 삼아 한국이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국제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아베 정부는 한국 정부가 이미 합의된 사항인 강제 징용자 배상 문제를 다시 언급해 한일 협정을 어기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일본은 전범을 저지른 적이 없다며 평화 조약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 당시 사람들도 이제 고령으로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반응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에 가장 크게 반발하고 있고 아베 정부는 군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까지 군사적 대립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일 관계를 1945년 이후 가장 최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Q.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양국 간에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A. 한국 주변에는 일본, 중국, 북한, 미국, 러시아, 대만, 필리핀 등 많은 국가가 있다. 그중 일본은 한국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 국가이다. 외교는 모든 주변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한국에서 남북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일본과의 관계 역시 중요하다. 그렇기에 일본

을 배제하는 외교를 해서는 안 된다. 일본은 자신들을 소홀히 한다는 점에 화가 나서 도발하는 것이다. 외교 전략을 큰 틀에서 바라보고 북한 문제를 다뤄야 한다. 북한과의 외교에만 너무 집중해 다른 국가와의 관계를 소홀히 하다 보면 문제가 발생했을 때 매우 난처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은 현재 주장들을 당장 멈춰야 한다. 아베 정부가 내세운 주장은 냉전식 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대를 역행하는 행위이다. 일본은 과거 한국이나 중국, 넓게는 아시아를 이해하던 때로 돌아가야만 한다.

 

Q. 마지막으로 못다 한 이야기가 있다면 한마디 부탁한다.

A. 한일은 이웃 나라다. 이는 서로를 미워해도 이웃이기 때문에 결국은 협력하는 관계가 돼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서로에 대한 악감정은 양국이 발전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은 과거를 정확히 바라보고 죄를 인정하는 한편 한국은 일본을 미운 이웃 국가로만 봐서는 악화된 관계를 개선할 수 없다. 특히 서로 민감한 부분인 역사와 경제 부분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한일 관계는 역사적으로 일본이 야욕을 부릴 때마다 파국을 맞이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랬고, 메이지 유신 이후 모든 권력을 왕에게 집중시키는 데 사용된 조선 침략론 ‘정한론’이 그러했다. 한쪽의 야욕만으로는유지될 수 없는 것이 바로 관계이다. 일본 정부만 이를 되새김질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정부 역시 외교란 무엇인지 곰곰이 고민해야 할 때이다. 한국은 지리적 특성상 숙명적으로 외교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기 전 그 옛날 서희의 외교 담판과 같은 묘수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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