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과 심우장
만해 한용운과 심우장
  • 이선주 기자
  • 승인 2019.07.0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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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은 지난 2월 12일 ‘만해 한용운 심우장’을 국가 지정 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사적에 지정·등록할 예정이다. 이곳 심우장(尋牛莊)은 승려이면서 독립운동가, 시인이었던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만년에 기거한 곳으로, 그가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흔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독립 정신으로 점철되어 있는 한용운 삶과 그의 얼이 서려 있는 심우장을 한번 들여다보자.

 

만해 한용운 초상화
만해 한용운 초상화

 

만해 한용운의 삶

만해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龍雲), 호는 만해(萬海, 卍海)이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아버지로부터 의인들의 사상을 전해 들으며 자랐다.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을 목격하면서 이에 가담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1896년 설악산의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1905년에는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들어가 연곡(蓮谷) 선사를 선생으로 삼고 출가하였다. 이때부터 정식으로 승려가 된 셈이다. 1908년에는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또한 1910년 한국 불교의 모순과 부패를 꼬집으며 불교의 개혁을 위한 실천 방안을 담은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탈고한 후, 1913년 회동서관에서 이 책을 간행하였다.

이후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3·1 독립 선언서는 최남선이 초안을 작성하고, 여기에 한용운이 공약 3장을 덧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뒤 한용운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석방된 뒤에도 민족 운동을 줄기차게 이어 나갔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펼쳤고, 1924년에는 불교청년회 총재로 취임하면서 대중 불교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 애썼다. 1923년에는 물산 장려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였고, 1927년에는 신간회 창설에 참여하였다. 1930년에는 청년 불교도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 운동 단체인 ‘만당’의 당수로 취임했다.

한용운은 문학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1926년에 88편의 시를 모아 첫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면서 저항 문학에 앞장섰다. 이후에도 시조와 한시를 포함하여 약 300편의 시를 남겼다. 소설로는 <죽음>, <흑풍>, <철혈미인>, <후화>, <박명> 등을 남겼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특히 <님의 침묵>이라는 시는 나라를 잃은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 빗대어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현재까지도 많은 이가 즐겨 외우는 시이다.

 

시집 님의 침묵 , 후대에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영어판으로도 출간되었다.
시집 〈님의 침묵〉, 후대에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영어판으로도 출간되었다.

 

한용운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창씨개명 반대 운동, 조선인 학도 지원병 반대 운동 등을 펼쳐 나가다가, 1944년 6월 29일 자택인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화장되어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소를 찾는 집, 심우장

한용운과 말년을 함께했던 집, 심우장은 어떤 곳일까? 이곳은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곳으로, 벽산 스님이 기증한 집터에 방응모, 박광 등 지인의 도움을 받아 지은 방 두 칸짜리의 집이다. 한용운은 집을 짓고 이곳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심우(尋牛)는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닫는 10단계의 과정을 잃어 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라는 불교의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용운은 성북동 깊은 골짜기에서 기거하면서 소, 즉 본성이 무엇인지를 고뇌하며, 조국과 민족을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한용운은 만해라는 호 외에 필명으로 목부(牧夫)라는 이름을 가끔 썼는데 이것은 소를 키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심우장은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이다.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 되므로 한용운이 이를 거부하고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심우장은 북향인 까닭에 한낮에는 집 뒤편의 위쪽에 해가 자리한다. 향나무를 태양의 가림막으로 삼아 촬영해야 심우장의 제대로 된 모습을 담을 수 있다.
심우장은 북향인 까닭에 한낮에는 집 뒤편의 위쪽에 해가 자리한다. 향나무를 태양의 가림막으로 삼아 촬영해야 심우장의 제대로 된 모습을 담을 수 있다.

 

한용운이 심우장에서 지내던 1930년대 중반 이후는 일본 제국주의가 정점을 찍던 시기로, 독립운동에 대한 강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함께 독립을 외치던 최린, 최남선 등이 친일로 변절한 것도 이 당시다.

그러나 한용운은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그가 기거하던 심우장도 민족의 자조를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심우장은 독립운동가 김동삼의 장례가 치러진 곳이기도 하다.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978~1937)은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서간도에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를 세우고, 만주 지방에서 항일 무장 투쟁의 지도자로서 대한 독립 선언과 민족 유일당 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그는 1931년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다 1937년 4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눈치를 보며 아무도 김동삼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자, 한용운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러 주었다. 한용운은 김동삼의 관 위에 앉아서 울부짖고 식음을 폐하며, 화장을 하던 날에는 빈속에 술만 마셨다고 한다. 장례식은 일제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승무>라는 시로 잘 알려진 조지훈(趙芝薰, 1920~1968)도 어렸을 적 아버지 조헌영과 함께 장례식에 참여하였다. 훗날 조지훈의 말에 따르면 이때 조문하였던 사람은 약 20명 안팎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민족을 향한 슬픔으로 만년을 보내던 한용운은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광복을 1년 여 앞두고 이곳 심우장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이후 이곳에 한용운의 딸인 한영숙이 살았는데 몇 해 전 그녀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여, 현재 심우장은 한용운 관련 자료를 전시하며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심우장을 찾아서

심우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29길 24에 위치해 있으며, 1984년 7월 5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이동하면 도착하는 거리에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해서 심우장이 있는 언덕길로 올라가기 전, 먼저 보이는 것이 만해 산책공원이다. 이곳의 벤치에는 양 끝에 각각 한용운 동상과 <님의 침묵> 시비가 있어, 그 가운데에 앉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만해 산책공원.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누군가 한용운 동상의 머리에 모자를 씌워 놓았다.
만해 산책공원.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누군가 한용운 동상의 머리에 모자를 씌워 놓았다.

 

심우장을 가기 위해서는 만해 산책공원 왼편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된다. 계단을 올라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좌우로 한용운과 관련된 글들이 짤막하게 적혀 있다. 심우장으로 가는 골목길은 다소 으슥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약 3분 정도만 오르면 금세 심우장을 발견할 수 있다.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북쪽을 향한 기와집인 심우장과 양옥의 관리 사무실, 한용운이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다. 넓이는 대지 374㎡에 건축 면적 52㎡ 정도이다. 심우장 건물의 형태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역 ‘ㄴ’ 자형 평면이다. 중앙에 대청 2칸을 두고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인 동쪽에는 서재로 쓴 온돌방 한 칸을 두었고, 오른쪽으로는 부엌 1칸이 있으며, 부엌에서 남쪽으로 꺾여 나간 곳에 찬마루 1칸이 있다. 대청에는 만해의 친필과 함께 한용운 관련 자료, 기사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용운이 서재로 사용했던 온돌방에는 한용운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서랍장에는 여러 권의 책이 꽂혀 있어, 누군가가 지금도 서재로 사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부엌 역시 부뚜막과 솥, 그리고 그릇 몇 개와 주걱이 깔끔하게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작은 규모이지만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모습에서 한용운의 검소하면서도 올곧은 정신을 찾을 수 있다.

 

 

심우장 대청의 전시물
심우장 대청의 전시물

 

 

 

심우장 온돌방의 서랍장. 한용운이 서재로 사용한 공간으로, 지금도 누군가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심우장 온돌방의 서랍장. 한용운이 서재로 사용한 공간으로, 지금도 누군가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심우장은 다소 외진 곳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명의 관람객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심우장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성북동의 풍경만으로도 심우장을 방문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마침 마당에는 방문객을 위한 사색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 앉아 눈을 감고 그 시대 한용운이 찾으려 했던 ‘소’는 무엇이었을지, 현시대 우리가 찾아야 할 ‘소’는 무엇일지 사색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심우장 부엌과 찬마루
심우장 부엌과 찬마루

 

심우장 관람 안내

위치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29길 24

교통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11번

버스 승차 후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앞 하차

관람 시간 09:00~18:00(연중무휴)

문의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02-2241-2652

관람 팁 주차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않으므로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 는 것을 권장한다.

심우장 내부로는 신발을 벗고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고, 내부에서의 사 진 촬영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심우장을 관람한 후, 한용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경기도 광주시의 만해 기념관, 충남 홍성군의 만해생가지, 강원도 인제군의 백담사 및 만 해 마을을 견학해 보는 것도 좋다.

 

심우장 마당에 있는 사색의 공간
심우장 마당에 있는 사색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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