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淸風)과 명월(明月)을 들인 독락당
청풍(淸風)과 명월(明月)을 들인 독락당
  • 박기상 기자
  • 승인 2019.07.0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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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옥산(紫玉山) 깊은 곳에 초려(草廬) 한 칸 지어두고

반 칸은 청풍(淸風)주고 반 칸은 명월(明月) 주니

청산(靑山)은 들일 데 없어 둘러두고 보리라.

자신의 손으로 처음 집을 지은 회재는 이때의 심정을 위와 같이

청산곡(靑山曲)이란 시조로 읊었다.

 

독락당 전경
독락당 전경

 

자옥산 아래 옥천이 흐르는 마을

경주시 안강읍에서 영천 방향으로 자동차로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옥산서원 입구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곧장 뻗은 그 길로 3km 정도 들어서면 옥산서원이 있다.

독락당(獨樂堂)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옥산서원 뒤에 있는 사랑채이다.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년~1553년)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집이다. 조선 중종 11년(1516년)에 건립되었는데, 1964년 11월 1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동방오현 회재 이언적은 왕에게 충성하기 전에 백성을 우선시한 선비였다.

회재가 이곳에 인연을 맺은 것은 10세 때 부친인 이번을 따라 자옥산 아래에 있는 정혜사에서 공부하면서부터다. 사산(四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아늑한 곳이다. <경주풍물지리지>에 의하면 이 마을 이름을 신라 때에는 옥천리라 했다고 적혀 있다. 옥천이라는 이름은 하천 중심으로 사람들이 살다 보니 동네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불렸을 것 같다. 조선 시대부터 옥산동이라 불렀다.

 

문턱이 없는 솟을대문
문턱이 없는 솟을대문

 

사산(四山)과 오대(五臺)를 품은 명당

사산(四山)은 도덕산(道德山, 703m), 무학산(舞鶴山, 433m), 화개산(華蓋山, 563m), 자옥산(紫玉山, 567m)이 있다. 그리고 계정 옆을 흐르는 계곡에 오대(五臺)라고 이름 붙인 5개의 바위가 있다. 계곡의 절경을 이룬 5개의 바위는 회재가 각각 이름을 붙였다. 계정 아래 있는 물가의 관어대(觀魚臺), 영귀대(詠歸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세심대(洗心臺)가 그것이다. 계정 바로 밑에 있는 바위가 관어대(觀魚臺)이다. 바위 옆면에 은둔하는 선비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觀魚臺’ 세 글자가 분명히 새겨져 있다. 돌담길을 따라 계곡으로 내려가니 아직도 회재 선생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사전에 연락을 한 지인을 주차장에서 만나 솟을대문 앞을 지나가려는데 좌측 편에 하마대(下馬臺)가 있다. 문턱이 없는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으로 보이는 건물이 행랑채인 숨방채이다. 숨방채를 돌아 서쪽 출입구를 통하여 바로 안채로 들어갔다. 종손인 이해철 씨(회재 18세손)가 반갑게 맞이한다.

종손의 안내를 받아 서재로 사용하는 방에 들어서니 벽면 모두가 책으로 가득하다. 종택과 관련된 서적들이 대부분이다. 안채는 회재가 25세 때(1515년) 두 번째 장가를 들 때 석씨 부인이 가져온 재산으로 지은 사생활 공간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건물 처마 아래로 한석봉이 쓴 ‘역락재(亦樂齋)’ 현판이 걸려 있다.

필자가 방문한 날이 절기로 대한(大寒)이라 한다. 날씨가 무척 춥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독락당 구석구석 친절한 안내를 받고 설명을 들었다. 500년 역사를 지닌 독락당을 보존하기 위해 어렵던 시절 이야기를 많이 한다. 독락당에 있는 유물들을 직접 문화재청으로 들고 가서 보물로 지정을 받았다고 전한다.

독락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온돌방 대청으로 되어 있다. 독락당 옆쪽 담장 살창을 달아 대청에서 살창을 통하여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특출한 공간 구성이며, 독락당 뒤쪽의 계정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보여 준다. 그것은 단순히 바깥세상을 살펴보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은 알 수 없는 철학적인 뜻이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독락당에 걸려 있는 현판
독락당에 걸려 있는 현판

 

독락당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 앞 ‘옥산정사(玉山精舍)’는 퇴계 이황이, 대청 북쪽 벽면의 ‘독락당(獨樂堂)’은 아계 이산해가 썼다.

당호인 독락(獨樂)은 외롭게 숨어서 혼자 즐긴다는 뜻이다. 회재의 독락은 단순히 은둔하여 고독하게 즐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독(獨)은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서 독립된 존재인 자아(自我)를 뜻하며, 낙(樂)은 낙천리(樂天理) 즉 진리를 궁구함을 뜻하는 것이다. 원래 회재는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있었는데, 모친의 뜻에 따라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항상 성현(聖賢)의 길에 이르는 학문 탐구에 뜻을 버리지 않았다.

독락당을 둘러싼 건축물들은 빼어난 미감을 지녔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곧 집이며, 집이 곧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독락당만큼 잘 어울리는 것이 없으리라. 독락당은 밖에서 보면 담장과 지붕밖에 보이지 않는다. 담이 높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집이 낮아서 그렇다. 집을 지을 때 집터를 낮추는데 특히 공을 들였을 것이 틀림없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세상으로부터 숨고자 하는 회재 선생의 속마음의 표현이라 본다.

 

밖에서 보면 지붕만 보이는 숨방채
밖에서 보면 지붕만 보이는 숨방채

 

계정은 ㄱ자 모양의 건물로, 왼쪽에는 퇴계 이황이 쓴 양진암(養眞庵) 편액이 걸려 있는데 건물에 비해 무척 커다란 것이 이채롭다. 마루 위로 올라가면 오른쪽 벽면에 한석봉이 쓴 ‘계정(溪亭)’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계정은 주변 환경과 어울림이 그 극치를 보여 주는 건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울 건너편에서 계정을 바라보면 이 건물의 멋스러움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다. 개울가 바위의 생김새에 따라 각각 길이가 다른 기둥을 받친 모습이나 절반쯤 허공에 떠 있는 쪽마루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킬 정도로 멋스럽다. 건물에 비해 기둥이 왜소해 보이나,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홍수, 태풍, 지진 등의 자연재해에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고 있다.

 

개울 쪽에서 바라본 계정
개울 쪽에서 바라본 계정

 

보물을 간직한 어서각과 사당

계정 마당의 서쪽에 어서각(御書閣)이 있다. 회재의 유품을 안채 골방에 인종수찰 등과 함께 보관하다가 1566년에 현재의 위치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정조 18년(1794) 왕의 교서에 따라 회재의 12세손인 묵헌 이태수가 헌종 1년(1835)에 경주부윤 윤치겸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규모로 다시 짓고 건물 내 오봉산수도, 소상팔경도, 매조도 등 19폭의 벽화를 그렸다. 이곳에는 인종어찰 등을 보관하고 있다.

계정의 북서쪽에는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1553년 잠계가 건립하였다. 보통 사대부가에서는 사당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를 하지만 이 집에서는 <주자가례>에 따라 이중으로 담을 쌓아 외부와 격리하고 삼문을 두었다.

 

회재 선생의 아들 잠계가 심은 향나무
회재 선생의 아들 잠계가 심은 향나무

 

독락당은 문화재의 보고(寶庫)이다

계정 마당 서쪽 어서각 뒤에 있는 출입구로 나가면 2007년 신축한 회재 유물 전시관이 있다. 회재의 유물을 한곳에 모아 관리하고 있는데 수필 고본 일괄 등 책과 고문서를 비롯하여 유품 등 3천여 점의 유물이 보관 및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종가 중에서 으뜸갈 정도로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관대(冠帶), 관자(貫子), 벼루, 연적 등 회재의 생활용품과 교지, 교서, 저술, 서간, 서책, 고문서, 묵적 등과 잠계를 비롯한 500여 년간 살아온 후손들의 유물도 매우 많다. 특히 국가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이 상당수에 이른다. 국보로 지정된 <삼국사기(국보 322-1)>는 처음 이곳 독락당에서 관리하였다가 현재는 옥산서원으로 이관하였다. 보물로 지정된 유물로는 독락당 건물(보물 제413호), <사마방목(보물 제524호)>, <해동명적(보물 제526호)>이 있고, 이외에도 13종 15책의 옥산 문중 소장 <전적류(보물 제524-1)>가 있으며, 현재 심사 중이거나 앞으로 지정될 유물도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바위틈에 핀 들꽃>이라는 이름으로 독락당 소장 고문서 도록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회재 유물관 뜰의 서편 담장 안에 향나무가 우뚝 서 도덕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 나무는 회재의 아들인 잠계가 중종 29년(1534)에 ‘차라리 성인을 배워 미치지 못함이 있더라도 한 가지 기예(技藝)나 선(善)으로 이름을 이루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서천잠(誓天箴)을 짓고 실천을 다짐하기 위해 심은 나무이다.

이외에도 회재는 어서각 앞에 산수유를 심고, 영구대 옆에 대나무 숲을 만들었다. 또 독락당 뒤편에 있는 약쑥 밭의 약쑥은 회재가 강계 귀양처에 있을 때 아들인 전인을 시켜 이곳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차례의 전란 등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아직까지 많은 유물을 소중하게 지켜 온 독락당의 종손 및 후손들의 노력에 새삼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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