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화유산 거리 탐방 2] 보존과 활용의 도시, 군산
[근대문화유산 거리 탐방 2] 보존과 활용의 도시, 군산
  • 이현정 기자
  • 승인 2019.07.0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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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애 버릴 것인가, 보존할 것인가.

이것은 한때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가장 큰 고민이었다. 1990년대엔 일제의 잔재 청산이라는 명제가 힘을 얻었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시대적 산물이 사라지게 되었는데 1995년 광복절에 전 국민이 방송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였던 옛 조선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어 사라진 것은 당시 문화재 보존의 방향성이 드러난 가장 상징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침략과 수탈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로 보존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각계각층에서 일어나고, 정부는 2001년에 문화재 보호법을 개정하고 등록문화재 제도를 시행하여 근대문화재들의 보존과 활용에 힘쓰게 되었다. 그중에 군산은 근대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있어 크게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는데, 이곳에서 근대문화유산 거리 탐방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군산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지도 (출처 군산시청)
군산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지도 (출처 군산시청)

 

근대문화 도시 군산의 시대적 배경

채만식의 <탁류>와 조정래의 <아리랑>. 일제 강점기 군산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다. 두 작품은 군산의 땅 대부분을 소유했던 일본인 지주에게 소작농을 하고, 일본으로 수탈되는 쌀을 운반하며 고달픈 삶을 살았던 당시 조선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1899년 개항한 군산은 일제 강점기 조선 최고의 미곡 수출항이었다. 일본은 드넓은 호남평야의 곡창 지대에서 생산된 미곡을 수탈하기 위해 1912년 군산선 철로를 개설하고, 년 200만석 이상의 쌀을 배에 선적하여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가져갔다.

또 1899년 조계지(외국인 거주지역)로 지정되고 더욱 많은 일본인들이 군산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이 5:5 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내항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는 대부분 일본인이 주거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군산의 구도심 지역에는 당연히 근대의 건축물과 시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과 남아 있는 다수의 근대문화재들을 바탕으로 군산시는 2008년부터 내항 지역의 ‘근대산업유산 활용 예술창작벨트화 사업’과 원도심의 ‘근대 역사 경관 조성 사업’을 통해 근대문화재들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활용했는데, 이것이 군산을 근대문화의 도시로 이끄는 성공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근대문화 예술창작벨트화 사업과 근대 역사 경관 조성 사업

군산시는 2008년 문화 관광부의 사업에 공모하고, 105억 원의 예산을 받아 군산시 장미동 내항 인근의 구 조선은행, 구 일본 제18은행 등 근대 건축물 다섯 개 동을 보수해 새로운 근대 역사 문화 공간으로 조성하였는데 이것이 근대문화유산을 활용한 예술창작벨트화 사업이다. 구 조선은행은 근대 건축관으로 활용하고, 구 일본 제18은행은 군산 근대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옛 창고 건물들은 카페테리아인 미즈 카페와 다목적 소극장인 장미 공연장으로, 문화 예술 체험 교육 공간인 장미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다. 이 공간들은 가까운 진포해양테마공원과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등과 함께 군산 내항을 하나의 근대문화지구로 연결하고 있다. 근대문화 벨트 지구가 근대문화재들을 활용하는 측면이 크다면 또 원도심의 근대 역사 경관 조성 사업은 근대문화재들을 보존하는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군산시 원도심에는 170여 채의 근대문화유산이 밀집돼 있는데, 문화재들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주변으로 숙박 시설과 근린 시설, 교육관 등을 만들었다. 거기에 건축물과 갑판을 근대풍으로 조성하는 ‘군산 시간여행거리’를 조성하여 근대문화유산의 보존과 관광 자원 활용의 두 가지 효과를 누리고 있다.

 

구 군산세관 (출처 포털사이트)
구 군산세관 (출처 포털사이트)

 

군산근대역사관 맞은편, 현대식 빌딩 가운데로 붉은 벽돌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 눈에 띈다. 1994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87호, 국가 사적 제545호로 지정된 구 군산세관이다. 이 건물은 다른 근대 건축물과는 다른 특이한 이력이 있는데 1908년 8만 6천원이라는 당시의 거금을 들여 일본의 자본이 아닌 대한 제국의 자본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일제의 잔재가 아닌 대한 제국의 유산으로 보는 측면에서인지 일찌감치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많은 근대문화유산들이 일제 잔재 청산을 이유로 사라질 때 군산 시내에서 유일하게 남은 공공 기관 건축물이 되었다.

구 군산세관은 고딕 양식의 지붕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창문과 출입문, 영국 주택 양식으로 현관의 처마를 밖으로 길게 빼내었다. 전체적으로 유럽의 건축 양식을 융합한 근세 일본 건축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의 하나로 역사적으로도 건축학적으로도 가치가 큰 건물이다. 현재는 호남관세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내부에서는 군산세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구 조선은행 군산 지점 (출처 포털사이트)
구 조선은행 군산 지점 (출처 포털사이트)

 

구 조선은행 군산 지점은 채만식의 <탁류>에서 고태수가 다니던 직장으로 등장하는 건물로 군산의 근대사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녔다. 1922년 건립되어 조선은행으로 사용되며 식민지 수탈 자본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다. 1953년 이후에는 한일은행 군산 지점으로 사용되었다가 1981년 민간에 매각, 예식장으로 쓰였다. 3년 뒤에는 나이트클럽으로 사용되다가 1990년 화재 이후 방치되었다. 2008년에 국가 등록 문화재 제374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이후에 지금의 군산 근대건축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중앙의 현관과 측면 모서리의 돌출로 대칭성과 수직성이 강조된 전체적인 형태와 아치창, 그리고 장식적인 세부 표현에서 근대기 은행 건축의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건물 내부에서는 근대기 군산에 지어졌던 주요 건축물의 모형과 구 조선은행 군산 지점의 역사 및 보수 공사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당시 조선은행의 금고로 쓰이던 드넓은 공간은 지금은 동아시아의 조선은행을 보여 주는 전시실로 활용되고 있다. 들어서면 보이는 벽면에는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 했다’라는 문구가 있다. 전시물들을 둘러보면 조선인들에게는 고리대금업을 하고, 토지와 양곡을 말도 안 되는 헐값에 사들이면서 민초들의 삶을 절망의 나락에 빠트렸던 일제 강점기 자본 수탈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볼 수 있다.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없애거나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보아야 한다. 아픈 역사를 기억나게 하는 근대문화유산들도 없애기보다는 보존하고 활용해야 할 것이다. 이곳에 남겨진 자료들처럼 말이다.

 

구 일본 18은행 군산 지점. 현재는 군산근대미술관이다.
구 일본 18은행 군산 지점. 현재는 군산근대미술관이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백년 광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일본 제18은행은 일본 국립 은행들의 설립 과정에서 18번째로 설립된 은행으로 나가사키에 본점을 두고 우리나라에는 1890년 인천에 최초로 일본 제18은행 지점을 두었다.

식민지 금융 지배를 목적으로 영업을 시작한 일본 제18은행은 이후 총 9개의 지점을 한국 내에 개설하였는데, 1911년에 지어진 현재의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 지점은 1936년까지 일본 은행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선 식산은행에 매각되었고, 1938년 조선 미곡 창고 주식회사(현 대한 통운 주식회사)에 매각되었다가 2008년에 국가 등록 문화재 제372호로 지정되었다. 구 제18은행은 영업장과 금고, 사무 공간을 별동의 건축물로 구성하여 은행 기능을 수용한 특징을 보여 주는 건축물로 근대기 은행 건축의 한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건물은 지금 군산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미술관동과 금고동, 관리동으로 나뉘어져 있다. 미술관동에서는 일제수탈 사진전과 18은행 건물 역사 전시와 보수 과정 전시전 등 상설전과 기증 작가들의 작품전들이 활발히 열리고 있다. 뒷문을 통해 금고동으로 이동하면 금고동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 후에 수감되었던 중국 여순 감옥 감방을 그대로 재현하여 전시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쓴 편지, 안중근 의사의 사진 등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관리동에서는 근대기 군산의 다양한 근대 건축 모형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 건물 역시 구 조선은행이나 구 군산세관 등과 마찬가지로 근대 건축 유산을 수리 및 보수하여 새로운 용도로 적극적 활용하고 있는 성공적인 사례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장미 갤러리와 미즈 카페
장미 갤러리와 미즈 카페

 

처음엔 갤러리나 공연장에 붙은 이름들을 보고 장미꽃을 모티브로 꾸민 곳들인가 생각했는데, 군산시 장미동의 지역명을 딴 것이었다. 개항과 더불어 군산에는 정미소가 많이 들어섰는데, 배에 싣기까지 상당 기간 보관을 해야 했고 이래서 등장한 것이 창고 시설이었다. 창고 시설이 많은 부두 주변을 장미동이라 했는데 오래도록 창고에 보관하는 쌀을 유래로 붙여진 이름이다.

장미 공연장은 1930년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의 쌀 보관 창고 건물이다. 현재는 장미 공연장으로 개관돼 지역 문화 예술인들이 다목적 소극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장미 갤러리는 일본식 가옥으로 해방 이후 위락 시설로 활용되었고 2013년에 군산시에서 갤러리로 개관했다. 1층은 문화예술체험 교육, 2층은 지역 작가의 갤러리로 사용되어 많은 시민들과 관광객이 찾고 있다.

미즈 카페는 1930년대 옛 미즈상사 건물로 일제 강점기엔 무역회사와 은행, 상업시설로 활용되었다. 현재는 1층은 카페테리아, 2층은 북 카페로 쓰이고 있는데 일본식 다다미방과 일본식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어 방송 촬영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이곳들은 군산의 근대문화를 활용한 예술창작벨트화 사업의 일환이다. 원형을 일부 보존하면서 수리하여 활용되는 건물들로 다양한 문화적 효과를 누리게 하고, 관광 자원의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는 듯하다.

 

참사문비가 있는 일본식 사찰 동국사
참사문비가 있는 일본식 사찰 동국사

 

1877년 부산의 개항과 더불어 조선에는 일본의 불교 종파들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들은 순수한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각종 정보를 수집해 일본 정부에 보고하고, 조선의 불교인들을 사상적으로 순화시키는 등 식민지 사업에 나서는 정신적인 침략 기구가 되었다. 조선의 불교 교단을 장악하기 위해 1911년 공포된 사찰령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동국사는 1909년 우치다라는 일본 승려가 금강사로 창건하였다. 일본 최대의 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사찰이었다. 금강사는 일제 강점기 일본 승려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해방 후에 김남곡 스님이 동국사로 사찰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렀다.

2011년에 일본 조동종에서 참사문비(懺謝文碑)를 동국사에 기증하였는데, 이것은 일본 조동종 소속 승려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일본의 침략에 앞장섰던 역할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참사문을 새긴 비석이다. 일본이 조선 침략에 공식적인 사과문을 설치한 것은 이 일이 처음이라 새삼 그 의미가 크다.

동국사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겨진 유일의 일본식 사찰로 대웅전과 요사채가 실내 복도로 이어진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사찰처럼 화려한 단청이 없고, 일본풍의 아무런 장식이 없는 처마와 대웅전 외벽에 많은 창문이 달려 있다. 또, 조계종인 고창 선운사의 말사이며 동국사 대웅전은 2003년 국가 지정 등록 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흥동 적산 가옥
신흥동 적산 가옥

 

일제 강점기 군산에서 수탈로 재산을 잃은 조선인들은 외곽으로 밀려났다. 중심지인 장미동, 신흥동, 금동, 월명동 등의 중심지로는 부유한 일본인들이 고급 주택을 짓고 부를 쌓았다. 반면 중심지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은 산꼭대기에 다닥다닥 붙은 건물에서 좁고 힘겨운 환경에서 살고 있었는데,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는 1930년대 조선인들의 주택 사정을 이렇게 서술하였다.

“언덕 비탈을 의지하여 오막살이들이 생선 비늘같이 들어박힌 개복동, 그중에서도 상상 꼭대기에 올라앉은 납작한 토담집. 방이라야 안방 하나, 건넌방 하나 단 두 개뿐인 것을 명님(明姙)이네가 도통 오원에 집주인한테서 세를 얻어 가지고, 건넌방은 따로 ‘먹곰보’네한테 이원씩 받고 세를 내주었다. 대지가 일곱 평 네 홉이니, 안방 세 식구, 건넌방 세 식구, 도합 여섯 사람에 일곱 평 네 홉인 것이다.”

이 구절은 남겨진 이 신흥동 일본 가옥의 화려함은 어둡고 힘겨웠던 조선인의 생활과 자본 수탈에 대한 증거인 셈이다.

이 신흥동 일본인 가옥은 일제 강점기 군산지역의 포목상이자 대부호였던 일본인 히로쓰 게이사부로(廣津)가 살던 집으로 전형적인 일본 무가의 야시키 형태의 가옥인데, 야시키란 안과 밖을 왕실처럼 갖춘 대저택을 말한다. 목조 2층 가옥은 ㄱ자 모양으로 붙은 건물 2채가 있고 두 건물 사이에 꾸며진 일본식 정원과 연목, 석등이 놓여 있다. 1층에는 조선식의 온돌방, 부엌, 식당, 화장실 등이 있고 2층에는 일본식 다다미방 2칸이 있다.이 신흥동 일본 가옥은 일제 강점기 군산 중심부의 일본인 상류층 주택 형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일명 히로쓰가옥으로 불리다가 적이 남긴 집이라는 뜻의 신흥동 적산 가옥으로 불렸고 2009년 신흥동 일본인 가옥이라는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소유주는 한국제분(구 호남제분)이며 2005년 국가 등록 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된 이후 군산시에서 관리하면서 관람객을 위해 개방하고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타짜> 등의 촬영지로 많이 쓰였다.

시대가 바뀌면 시각도 바뀌게 마련이다. 근대문화유산들을 없애 버려야 할 수탈의 흔적으로 볼 것인가, 교훈을 삼아야 할 역사의 증거로 볼 것인가 많은 곳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군산은 한발 앞서서 계획을 세워 보존과 활용을 선택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근대문화의 도시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군산 원도심의 근대 역사 경관 사업은 보존 개념보다는 시에서 매입하여 일부를 활용하는 도심 재생의 측면이 더 큰데 군산의 침체된 원도심에 활기를 불어넣고,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여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고 있다. 이는 개발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사라져가는 개인 소유의 근대문화유산들을 보존하고 활용함에 있어 성공적인 사례들을 보여 주었다는 큰 의미가 있다.

군산의 이야기는 과거에 대한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시간이 멈춰진 군산의 시간여행거리에서, 우리는 찬찬히 과거를 되새겨 미래를 보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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