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이차돈의 성지 백률사(栢栗寺)
청년 이차돈의 성지 백률사(栢栗寺)
  • 박기상 기자
  • 승인 2019.07.0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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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 중에서 버리기 어려운 것이 목숨이지만, 오늘 내가 죽어서 내일 불국토에 아침이 밝아 오고, 백성이 편안해진다면 어찌 내 한 목숨을 아낄 것입니까” 20대의 해사한 청년은 그렇게 목이 잘렸다. 이차돈의 목을 베니 흰 젖과 같은 것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머리는 금강산 자락에 떨어지고, 서라벌에 꽃비가 내렸다 한다.

                                                                                                                                             - <삼국유사> 중 -

 

신라의 불교는 신라를 신라답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불국의 나라 신라야말로 불교를 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찬란한 신라 문화가 불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치 체제의 안정도 불교를 통해 이룩되었다.

 

범종각 대웅전이 보이는 백률사 전경
범종각 대웅전이 보이는 백률사 전경

 

백률사는 경북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金剛山)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다. 사찰 입구 안내문에는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자추사(刺楸寺)라는 절을 세웠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현재 여기에는 백률사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백률사(栢栗寺)를 자추사로 보고 있다. 백률사는 신라 법흥왕 14년(527)에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한 절이다.

신라 법흥왕은 불교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왕명을 속인 죄로 이차돈의 목을 베었다. 죽기에 앞서 이차돈은 “만일 부처님이 있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머리는 멀리 날아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목에서 흰 피가 나오고, 갑자기 컴컴해진 하늘에서 아름다운 꽃이 떨어졌으며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 이 기이한 광경을 본 신하들은 마음을 돌려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받아들이는 데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이차돈은 자신의 죽음으로 불교를 국교화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고,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백률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금강산 입구로 올라서면 왼쪽으로 굴불사지 사면석불이 있다. 석불 바로 위쪽으로 올라가면 백률사가 나오는데, 돌계단으로 오를 수도 있고 사찰의 신자들이 다니는 승용차 길을 따라 오를 수도 있다.

돌계단을 따라 절 입구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범종각이 있다. 범종 표면에는 이차돈순교비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범종이 걸려 있다. 종각 위쪽으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이 있다. 한층 아래 왼쪽으로 신자들이 머무는 요사채가 있으며 좀 떨어진 곳에 최근에 지은 송죽당(松竹堂)이 있다.

 

이차돈 순교 장면이 묘사된 범종
이차돈 순교 장면이 묘사된 범종

 

백률사에 큰 행사가 있는지 스님들과 신도들이 분주히 천막을 치고 준비에 한창이다. 대웅전 바로 앞에도 비닐로 된 큰 천막이 세워져 있다.

백률사는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건물을 1600년경에 경주 부윤(府尹) 윤승순(尹承順)이 중건하고 대웅전을 중건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백률사는 절이라기보다는 암자 규모로 단출하다. 대웅전 건물은 높은 축대 위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으로 사람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이다. 법당 안에는 삼존불을 모시고 있는데, 본존인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 이 대웅전 오른쪽으로 또 다른 석가모니 상을 중심으로 나한상을 모셔 두었다.

백률사는 절 마당이 좁아서 흔히 있어야 할 불탑이 세울 장소가 협소하여 대웅전 앞쪽에 있는 거대한 암벽에 아주 얕은 양각으로 마애탑(磨崖塔)을 새겨 놓고 불탑을 대신한 것 같다. 정말 옛사람들이지만 기발한 생각이다.

마애탑은 기단부와 1층 탑신 및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모되어 있다. 높이 3.15m로 탑신은 7층 정도로 보이는데 각층의 옥개석마다 3단의 받침이 있다. 기단은 너비 1.4m에 단층으로 조성되었고, 1층 옥개석 부분에 누군가가 이름을 새겨 훼손한 자국이 있다. 탑의 형식은 통일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 이 바위는 이끼가 많이 끼어서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국보 제28호 금동 약사여래 입상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국보 제28호 금동 약사여래 입상은 원래는 이곳 백률사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통일 신라 3대 금동불로 손꼽히는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 입상은 높이가 1.79m로 3대 금동불 중에서도 가장 큰 불상이다. 온화한 미소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두 손은 사라져서 그 모습을 알 수 없으나, 원래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을 치유해 주는 부처님으로 신라 때부터 부녀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불상이었다고 한다. 현존하고 있는 통일 신라 시대 최대의 금동 불상으로 중후한 인상을 풍겨 주고 있다.

 

백률사 금동국보 제28호 금동 약사여래 입상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백률사 금동국보 제28호 금동 약사여래 입상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목에서 흰 피가 솟아오른 이차돈순교비(異次頓殉敎碑)

불교 공인을 위하여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비석이 이차돈순교비(異次頓殉敎碑)이다. 법흥왕 때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여 그가 순교한 지 290여 년이 지난 헌덕왕 10년(818)에 건립하였다. 원래 이곳 백률사(栢栗寺)에 있었다. 1914년 백률사가 일시 폐허가 되자 이 비석을 경주 시내의 고적보존회로 옮겼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비석은 받침돌과 육각기둥 모양의 몸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는 106㎝, 각 면의 너비는 29㎝이다. 원래 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남아 있지 않다.

 

(이차돈순교비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이차돈순교비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육각형의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 피가 솟아오르는 장면이 간결하면서도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머지 다섯 면에는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로 교차하는 7행 25칸을 만들었다. 그 안에 한 글자씩 해서체로 음각(陰刻)하였다.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해독하기 어렵다. 비문에는 법흥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불법(佛法)을 일으키려고 하자 이차돈이 고의로 잘못을 범한 것으로 꾸며 자신의 목을 치게 하여 순교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차돈의 성을 이씨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 박씨이다. 그래서 성명은 박이차돈인 셈이다. 자(字)가 염촉(厭}髑)이며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지증왕(智證王)의 생부인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증손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차돈순교비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이차돈순교비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소원 성취의 명소 굴불사지(掘佛寺址) 석조 사면 불상

금강산 기슭에 자리 잡은 백률사는 경주시청에서 불과 5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근린 사찰이다. 백률사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금강산으로 올라가면 바로 좌측으로 굴불사지 석조 사면 불상이 나오는데 높이 약 3m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보살상을 조각한 사방불 형태이다.

 

굴불사지 석조 사면 불상
굴불사지 석조 사면 불상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 8세기 경덕왕 대에 굴불사(掘佛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석조 사면 불상 서쪽 면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는데, 중앙의 아미타여래는 바위 위에 머리만 따로 만들어 올려놓았고 몸은 그대로 바위 자체를 신체(神體)로 삼았다. 여기에 암석면을 최소한으로 가공하고 옷 주름도 매우 얇게 표현하였다. 좌우에는 우람한 모습의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만들어 세웠다. 동쪽 면에는 크고 웅장한 약사여래 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남쪽 면에는 크기는 작지만 매우 세련된 솜씨의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오른쪽 협시보살 전체와 왼쪽 협시보살의 머리가 탈락되어 있어 마치 두 개의 불상과 보살상을 조각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북쪽 면에는 보살 입상과 팔이 여섯 달린 육비관음보살상(六臂觀音菩薩像)이 있다.

석조 사면 불상은 조각 양식 면에서 보면 경덕왕 대, 즉 742∼765년 사이나 그보다 약간 올라가는 시기에 조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면의 불상은 조금씩 시차를 두고 조각된 것으로 보여 지는데 서쪽 면의 아미타삼존상이 가장 먼저 제작된 불상으로 판단된다. 이 사면 불상은 사면불의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그뿐만 아니라 각 면의 상들은 8세기 통일 신라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1981년 국립경주박물관에 의하여 발굴 조사가 있었는데 창건 당시에 석조 사면 불상을 모시는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건물은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주춧돌을 보면 정면을 남쪽으로 하고 앞면 3칸 이상에 옆면 3칸의 건물로 추정된다고 한다.

 

우물 근처 기도처
우물 근처 기도처

 

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의 문헌에는 굴불사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1910년대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조사되었고, 1963년 1월 21일에 다시 보물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1985년, 절터를 정비할 목적으로 2차 발굴이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해 실시되었는데, 통일 신라 시대 금동 불상을 비롯한 고려 시대 청동반자, 소형 청동종, 청동향완 등이 발굴됨으로써 중요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석조 사면 불상과 우물 근처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요즈음 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염원을 빌고 소원 성취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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