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통영 3] 삼도수군통제영, 세워지고 난 뒤의 영광
[내 이름은 통영 3] 삼도수군통제영, 세워지고 난 뒤의 영광
  • 김세원 기자
  • 승인 2019.07.19 16: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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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초기 해군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나라 삼면을 가득 메운 이 너른 바다를 지키는 해군은 대체 언제부터 이 땅에 있었던 걸까?

 

통제영 세병관으로 가는 문이 저 멀리 보인다.
통제영 세병관으로 가는 문이 저 멀리 보인다.

 

문득 드는 의문에 대한민국 해군 공식 홈페이지(http://www.navy.mil.kr)를 검색해 들어갔다. 그중 ‘역사 속의 해군’ 코너에는 명장 한니발을 낳은 페니키아인을 필두로 한 세계 속의 해군 역사부터 오늘날 우리 곁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해군의 이야기까지 가득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요동과 한반도 천하를 두고 패권을 다투던 삼국 시대와 이후 통일 신라와 발해로 이어지는 남북국 시대, 그 시대의 바다를 풍미했던 해상왕 장보고와 청해진의 이야기 등 의외로 다시 살펴보니 우리나라 해군의 역사는 상상 이상으로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단순히 최초의 해군이라 말할 것 같으면 조선의 첫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필두로 한 조선 수군의 역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필자로서는 솔직히 이러한 우리 해군의 풍부한 이야기가 참으로 놀라웠다.

 

조선 후기 통제영의 모습을 보여 주는 조감도
조선 후기 통제영의 모습을 보여 주는 조감도

 

한민족의 역사는 곧 바다와의 역사

특히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것 중에 1975년도에 쓰인 학계의 오랜 논문이 하나 있다. 바로 전남대학교 기업경영연구소의 송정현이 저술한 <한국 해군의 성장 및 개발에 관한 고찰>이다. 학술 저널의 형태로 발행된 송정현의 이 논고 내용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군을 창설한 고대 시대의 역사적 인물에 관한 기록도 실려 있다. 이를 간단히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병관의 지과문
세병관의 지과문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수군을 만든 사람은 고조선 시대의 왕해단이라 하며, <사기>에 하면 신라 진평왕 대에 000라는 직함의 해군 장관직을 두기도 했다. 이어 후대인 문무왕 대에 이르러 선부령이라는 해군 장관직을 두어 저 멀리 남00까지 통솔하였고 신라 덕왕 때 청해진 대사 장보고는 남해의 완도에 청해진을 창설하여 일본·중국(당) 및 멀리 남0000의 유물의 중개지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역시 삼면에 바다를 끼고 있는 우리나라의 지리적·지형적 특성상 해상을 통한 외국과의 교류는 필수 불가결했다고 짐작된다. 따라서 고조선 시대부터나 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립하던 삼국 시대에 이르면 이러한 바다에서의 권리를 완전히 제패하는 일이 실제로 나라의 흥망성쇠와도 관련이 있다는 위기의식을 삼국이 아울러 갖고 있었다고 봐도 좋다. 실제로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등 대를 이어 고구려의 세력이 널리 맹위를 떨치자, 한반도 남쪽의 백제 동성왕과 신라 눌지왕이 서로 뜻을 모아 혼인 동맹을 맺어 여·제 동맹의 시작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당시의 세력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 것이,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한강 유역을 완전히 상실한 백제가 웅진을 넘어 사비 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였다. 정확히는 현재 중남조 양식의 벽돌무덤으로 이름을 남긴 무령왕 시대를 지나서 바야흐로 나라 이름까지도 ‘남부여’로 개칭한 그 아들, 성왕 시대의 일이다. 이 시기 백제는 강성하던 고구려가 중국과 신경전을 벌이는 틈을 타 다시 한강 일대를 회복하겠다는 숙원을 드러냈다. 이러한 생각 속에 성왕은 동맹국이자 사위인 신라 진흥왕에게 응원군을 청한다. 물론 그 이후에 벌어지고 만 백제 왕가의 끔찍한 비극은 우리가 역사서를 통해 아는 바와 같다.

 

조선, 역사의 선물을 백안시(白眼視)하다

이렇듯 고조선 시대를 넘어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 하다못해 고려 시대까지도 바다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이에서 중요한 교역로로 활용되었다.

고려 말엽, 온 강토를 피로 물들게 한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고려 조정은 만반의 준비를 한다. 여말선초 시대의 대표적인 호걸 중의 한 사람이자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와 끝까지 대립했던 불굴의 충신, 대장군 최영은 이러한 조정의 뜻에 따라 전선 2,000여 척을 건조할 계획을 세운다.

여기에 최무선이 개발한 신무기, 화포가 더해진 결과 고려 함대는 1380년 금강으로 침입하는 왜선 500여 척을 격파하는 기록적인 승리를 거둔다. 서양에서 화약이 개발되고 대포와 총이 막 사용되기 시작한 때가, 도시와 평민 부르주아 등 상업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왕권이 강해지면서 도래한 절대주의 시대였다. 그러니 고려가 개발한 화포는 이보다 한참을 앞선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 말기에 이루어진 세기의 발명은 오랫동안 제대로 연구·발전되지 못했다. 뒤를 이어 등장한 조선 왕조의 초창기 대(對) 중국 정책은 설계자 정도전의 방침대로 철저히 유교 사상에 입각한 조공 관계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중국 역시 오랜만에 이민족 정권인 원나라를 물리치고 한족의 신흥 정권인 명나라가 갓 성립된 시기였다.

따라서 명나라는 부득불 조선의 군세가 커지는 것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아슬아슬한 대외 관계 속에서 조선의 군사학과 병기학은 오랫동안 왕궁의 뒤뜰과 신의주 등지에서 남몰래 비밀스럽게 연구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신기전>은 이러한 당시의 정황을 어느 정도 보여 주는 콘텐츠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전쟁용 대포를 실전에 도입한 나라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를 이은 조선 왕조가 취한 소극적인 대외 정책의 발로로 개량된 소형 화포 형태인 조총은 오랫동안 도입되지 못했다. 사실 이건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통상적인 발전사를 고려하여 조선의 군사학과 병기학 연구가 꾸준히 이어졌다면, 하다못해 고려 말기 최무선을 중심으로 세웠다는 화통도감이라도 남아 연구할 여건이 유지되었다면 비참했던 임진왜란의 결과도 이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세병관의 편액은 김영수 통제사가 썼다고 한다.
세병관의 편액은 김영수 통제사가 썼다고 한다.

 

훈구파가 물러나고 사림파가 떠오르다

사설이 길었지만 어쨌든 조선 중기인 16세기에 다다르면 15세기 조선 초기를 이끌었던 훈구 세력은 거의 그 자취를 감춘다. 후발 주자인 사림파와의 격전에서 완전히 밀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러한 사림파를 주인공으로 한 몇몇 사극 속에서 조선 초를 지배하던 훈구파를 부정부패한 척신의 대표 주자로 보는 시각을 흔히 접하게 된다.

그러나 지극히 우리나라 군사학의 입장에서 이를 재해석하자면, 너무나 일렀던 훈구파의 조기 퇴진은 매우 안타까운 상황을 초래했다. 흡사 가톨릭이 ‘예수회’ 운동을 통해 본래의 성경을 더욱 강경하게 추종하는 세력으로 변모한 것처럼, 16세기 이후 조선 정계를 지배한 사림파는 훈구 세력보다도 더욱 강경한 ‘유학 원론주의자’였다.

이들 사림 세력은 대내적으로 남몰래 황제국을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와 병기 등을 연구했던 고려의 행태를 극단적으로 비판했으며, 이러한 고려 시대와 맥을 같이 했던 훈구 세력의 정치 역시 마찬가지의 입장에서 ‘올바른 유교 정치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요컨대 영화 <신기전> 등과 더불어 조선 초 태종과 세종 시대에 실존했던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과 같은 역사로 미루어 추정할 수 있는 훈구 세력의 독자적인 무기 개발 등의 계획에 사림파의 생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훈구 세력의 퇴진은, 따라서 조선 군사학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좌초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문치로의 전환, 조선의 패착으로

한편, 사림파의 완벽한 승리에 힘입어 완벽한 문치(文治)의 길을 택한 조선 왕조였지만, 그 결과는 절대 평탄하지 않았다. 흡사 가톨릭에 반발해 종교 개혁을 일으켜 떨어져 나온 개신교처럼 사림 세력 역시 분열되었다.

앞서 설명했듯, 더욱 본원적인 유학의 정치로 돌아가자는 것이 사림파가 내세우는 절개였다. 따라서 그 경전 구절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사림 정계는 스승과 제자가 갈라섰고 아버지와 자식이 갈라섰다. 요컨대 각각 동인과 서인의 영수가 된 심의겸과 김성일이 본래는 사제지간이었다는 사실이 절대 남다르게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 중기의 거대한 암초, 임진왜란이 터졌다. 임진왜란의 발발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전국 시대를 일통하고 천하포무의 기치를 내건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인만의 야욕으로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조선의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당시 상황에 대해 후대의 한 줄기 일침으로 볼 수 있을 대한민국 해군 공식 홈페이지의 한 구절을 간단히 인용하려 한다.

 

세병관 내부의 단청
세병관 내부의 단청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해군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을 때는 국가 안정을 유지하였으나, 해군력이 약화되었을 때에는 외세의 침략을 받아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통합 해군 본부를 창설한 것이나 다름없는 조선 초대 삼도수군통제사 성웅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등장은, 확실히 역사책을 들춰 보아도 고금에 유례가 없는 깜짝 스타의 탄생이었다. 가장 군이 약한 시기에 역설적으로 군을 통합해 당면한 전쟁에 맞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겼다.

다음은 배우 최민식이 주연한 영화 <명량>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 명량 해전을 앞둔 이순신 제독이 선조에게 바친 출사표의 유명한 구절이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그 12척에다 앞선 원균의 전투에서 탈주한 1척의 멀쩡한 배를 보태서 학익진을 펼치고 항전한 결과, 조선 수군은 다시금 꺼져 가던 승기를 세우게 되었다.

 

여전히 유효했던 고려 최무선의 발명

바로 이 승리의 비법에 이순신 제독의 완벽한 전장 파악이 담겨 있다. 실제로 일본 해군의 소형 화포인 조총은 앞서 필자가 설명했듯 조선이 사용하는 화포보다 한 단계 발전한 형태의 무기라고 봐도 좋았다. 이순신 제독은 조총을 비롯해 일본도 등 일본군이 사용하는 주력 무기의 장점이 주로 근거리에서 발휘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실제로 전국 시대에 조총을 처음 전쟁에 도입한 것으로 전해지는 오다 노부나가가 부리던 대표적인 조총 특수 부대인 ‘철포대(鐵砲隊)’ 역시, 그 명성을 떨치게 한 다케다 신겐과의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활용법을 자세히 논하자면 절대 원거리 전투라고 말할 수 없다. 최근 밝혀진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애당초 당시 조총의 사격 거리도 그리 멀다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군이 사용하던 천자총통 등 화포의 사격 거리와 일본의 조총을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조총은 근거리 무기에 훨씬 더 가까웠다. 조선 화포의 사격 거리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짧았다. 고려 말엽 최무선이 개발해 낸 화포의 위엄은 이때까지도 역시 건재했던 셈이다.

 

각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라고 한다.
각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라고 한다.

 

어제의 영광을 내일도 이어 가기 위해

이러한 승리의 이야기를 담은 곳이 경상남도 통영시에 남아 있다. 이순신 제독 때부터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삼도의 수군을 관할하는 조선 삼도 수군의 본부가 자리하고 있었던 삼도수군통제영 건물 세병관이 바로 그것이다.

세병관은 예부터 통제사가 이곳 단 위에 올라 통영 바닷가를 내려다보며 병사들을 관리했다는 곳으로, 지금 통영시 문화동에 남아 있는 이 건물로 말할 것 같으면 이순신 제독 때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후문이다. 정확히는 조선 후기의 통제사가 다시 개축한 건물이라고 하지만, 존재만으로도 당시 통영 사람들이 강강술래를 추며 연호했다는 “우리 장군님”의 승리를 엿보는 듯하여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기운이 난다.

통영 선조들이 지키고 가꾼 우리 해군의 역사 속이야기 한 편, 이번 기회에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서 동피랑과 서피랑 그리고 통제영 세병관을 오가며 다시 만끽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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