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나라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엿보다
강철의 나라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엿보다
  • 한은수 기자
  • 승인 2019.07.2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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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대장간마을’ 입구에 설치된 현판
‘고구려대장간마을’ 입구에 설치된 현판

 

이미 보았다. 한류 문화의 초시가 된 <태왕사신기>에서 배우 배용준이 거니는 ‘고구려대장간마을'을 보았다. 영화 <안시성>에서도 배우 조인성이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 역으로 분해 병사들과 진한 인간미의 리더십을 연기한 곳도 여기였다. <자명고>, <선덕여왕>, <바람의 나라>, <역린> 이 모든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독특하고 고풍스러운 배경과 분위기를 이미 대중에게 알리고 선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 도구로써의 기능에 불과하다.

 

풍수지리에 따른 아차산 일대의 산세(산이 생긴 모양)를 보고, 그 기운을 ‘매의 눈’으로 포착하여 자체 환경의 기능을 도구와 무기로 삼은 선조들의 혜안, 지혜와 용기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특히 산세를 전략에 적용하기 최적지인 봉우리마다 설치된 군사 초소 ‘보루’, 성보다 작은 규모의 군사 요새를 볼 때의 놀라움은 더욱 크다. 기능과 기동성이 뛰어나고 방어와 공격에 적절한 합리적 구조를 갖춘 항공 모함의 축소판 같다. 보루 둘레에 네모 형태로 튀어나온 ‘치’는 적을 감시하며 재빠르게 방어하기에 적절한 형태인데 아차산 능선 따라 스무 군데에 걸쳐 보루를 배치하였으니 그 주도면밀함에 대한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중 제4보루인 곳에 고구려대장간마을이 있다.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 일대, 아치울을 끼고 돌면 꿈결처럼 나타나는 고구려대장간마을. 마을 입구 큰 현판 아래로는 광장이 있고, 그 중앙에는 실물 크기의 ‘광개토태왕비’가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이며 실물은 중국 길림성 집안에 있다. ‘고구려’하면 용감한 진취적 기상과 기질을 떠올리게 되고 벌판을 치달리는 야생마의 갈기를 휘감아 잡고, 만주벌을 달리며 평정한 격동의 역사 기록들을 접하게 된다. 벽화에 새겨진 고구려 병사의 ‘기마도’ 역시, 광활한 초원 위 지평선을 향해 말달리는 형상인 것이다.

 

기마도
기마도

 

병사들을 진두지휘하던 광개토태왕, 연개소문, 을지문덕 장군들의 위풍당당 모험담 또한, 용감한 한국인의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북반구가 아닌 옛 한성 인접한 아차산 보루에 남아 있는 고구려 문화와 유적들, 그에 대한 궁금증에 상상력을 보태며 마을로 향하는 산길로 들어선다.

경기도 구리시 우미내길 41번지 고구려대장간마을은, 1997년 아차산 제4보루에서 처음 발굴 조사 된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전시 복원한 국내 유일 고구려 박물관이다. 아차산이 있는 한강 유역은 다방면 다각도의 동력 요지이며 선사 시대부터 정치와 문화, 생산과 교역의 중심지로 작용하며 발달을 거듭해 왔다. 특히 삼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국가 흥망성쇠가 좌우될 만큼 중요한 입지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동력의 요지인 아차산이 있는 한강 유역을 서로 차지하려 한 결정적 이유는 한강 뱃길을 통해 중국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선순위로 이곳을 차지한 나라는 백제인데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정착한 이후 475년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할 때까지 500여 년간 이곳을 차지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을 아단성(아차산) 아래에서 죽이고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면서 한강 이남까지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이때 널리 알려진 ‘평강 공주와 온달 장군’의 주인공 온달 장군이 신라와의 아차산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 온달이 안치된 관을 평양으로 운구하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으며 평강 공주가 달려와 이제 돌아가자고 하니 그때서야 움직여 운반할 수 있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구리시에서는 해마다 10월이면 온달 장군을 추모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아차산을 아단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에 따른 설화가 있다. 먼저 아차산이라 부른 유래가 흥미롭다. 조선 시대 명종 때 홍계관이라고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자신의 운명을 점쳤는데 얼마 후 비명횡사할 운수였다. 살아날 방법은 용상 밑에 숨는 수밖에 없었다. 왕에게 상소하여 그날 용상 밑에 숨어 있는데 이때 쥐 한 마리가 지나갔다. 왕은 홍계관에게 마루를 지나는 쥐가 몇 마리인지 점쳐 보라고 하자 홍계관은 세 마리라 답했다. 왕이 화를 내며 형관을 불러 홍계관을 처형하라 했다. 사형장인 새남터로 끌려가 다시 점쳐 보아도 세 마리인지라 형관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 부탁했다. 왕이 홍계관을 보낸 후 쥐를 잡아 그 배를 갈라 보니 놀랍게도 배 속에 새끼 두 마리가 들어 있었다. 왕은 깜짝 놀라 형을 중지시켰다. 급히 형장에 도착한 승지가 손을 저으며 중지하라 소리치자 이를 속히 집행하라는 신호로 본 형관이 홍계관을 바로 처형하였다. 이를 전해 들은 왕이 “아차”하며 애석해했으며 처형장이 있던 이 산을 ‘아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단성에 대한 설화도 재미있다. <삼국사기>에 온달이 전사한 곳이 아단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역사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한문자로 아단성의 ‘단’자가 이성계의 휘와 겹치므로 비슷한 형태의 ‘차’로 바꿔 써서 아차성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등극 후 이름이 ‘이단’이다.

고구려는 아차산 봉우리마다 둘레 300미터 내외의 군사 초소를 세웠는데 성에 비해 소규모 군사 요새이며 명칭은 보루이다. 군사들은 이곳에 주둔하며 적을 공격하거나 방어하기도 했다. 아차산은 동쪽으로는 왕숙천, 서쪽으로는 중랑천이 남쪽 한강으로 흘러 육로와 수로 교통에 유용하며 전략의 중심지인 보루 설치에 적절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인근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여서 남쪽으로는 한강 이남 지역과 북쪽 멀리로는 의정부 길목까지 한눈에 보이니 결정적 군사 요지임이 분명하다. 아차산 일대의 보루는 망우산에서 아차산과 용마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데, 이 일원에서 20여 개소의 보루가 확인되었다. 이 보루는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 유역 진출을 위해 475년 아단성을 점령한 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551년 백제와 신라 동맹군에 의해 북으로 후퇴하기 전까지 76년가량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은 3000여 점 되는데 그중 제4보루에서 발굴된 300여 점 중, 1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곳이 고구려대장간마을의 ‘아차산고구려유적전시관’이다.

 

아차산고구려유적전시관
아차산고구려유적전시관

 

아차산고구려유적전시관은 전체 1, 2층에 걸쳐, 1층에는 국내외 관광객들을 위한 전통문화 체험 학습실이 있다. 와당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는데, 와당이란 ‘기와의 마구리’를 뜻한다. 전통 가옥의 지붕을 지을 때 처마의 끝을 마감하는 기와로 암키와는 호형, 수키와는 원형으로 막는데 이것을 평와당, 원와당이라 하고 한국에서는 암막새기, 수막새기라고 부른다. 고구려 와당은 선이 날카롭고 억센 느낌을 주며 붉은색을 띠고 있는 특징이 있다. ‘삼족오’ 문양 그리기도 할 수 있다. 고구려 유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문양인데,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이며 태양과 하늘을 상징한다. 보루의 블록 퍼즐을 두고 조립할 수 있는데 조립 과정을 통해 구조와 기능의 의도와 역할을 명확히 학습할 수 있다.

 

제1전시관 입구
제1전시관 입구

 

제2전시관 입구
제2전시관 입구

 

2층에는 1, 2관의 전시실이 있다. ‘고구려’의 어원은, 성이나 고을을 뜻하는 ‘구루’에 높을 ‘고’를 덧붙여 고구려라 지칭함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철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다는 명성에 걸맞은 자부심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고구려에서는 쇠를 녹여 철로 된 물건을 만드는 대장장이가 높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전시물로는 토기와 철기, 농기와 무기가 있다. 시루와 오절판, 몸통 긴 항아리와 병사들의 밥그릇도 있다.

고구려 병사들은 각자의 그릇을 구분하기 위한 표시를 했는데, ‘#, =, O, /’ 등의 부호나 이름을 썼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병사들은 각자의 보루에 배치되어 힘겹게 근무했으며 집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으나 평생 귀향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병사들이 이 변방에 배치되어 근무하는 기간은 3년 정도였다고 한다. 이곳 병사들은 전투가 주된 임무이나, 변방 최전선이라는 난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겸해야 했다. 때문에 전투뿐 아니라 무기나 공구를 생산하거나 수리 기능을 갖춘 병사도 있었고, 전투가 없을 때는 농사를 지어 식량을 자급자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3보루에는 방아 시설도 갖추고 있다.

전시실에는 병사들의 활동 범위인 보루를 축소판으로 제작 설치해 놓았다. 보루 원래 평면의 형태는 남북 방향이 긴 장 타원형이며 성벽의 둘레는 약 256m, 내부 면적은 2,256㎡이며 아차산 제3보루에 이어 두 번째 크기라고 한다. 내부 구조로는 건물지 7기, 저수 시설 2기, 배수 시설 4기, 온돌 시설 13기, 간이 대장간이 있다. 철기로는 말 탈 때 발걸이로 사용되는 등자, 재갈과 보습, 이동 설치가 가능한 부뚜막 딸린 화덕, 쇠솥, 투구, 철제 갑옷, 도끼의 날과 화살의 촉과 같은 철제 무기와 마구도 있다. 농기구인 호미, 살포(물고를 조절하는 농구), 낫, 삽날, 철정(나무 사이에 박아 틈새를 없애며 연결하는 농구), 쇠스랑, 끌 등이 있다. 이중 농공구류는 기능에 맞는 서로 다른 재질의 철기를 사용했으며 여러 제작 기법을 구사했음을 봤을 때, 발달한 고구려 제철 기술을 짐작할 수 있다. 담금질을 포함한 자유자재 기법의 열처리를 가하여 탄소 함량이 다양한 강철을 만들었으며 용도에 맞는 재질의 강철을 제작 사용했으니, 가히 ‘강철의 나라 고구려’라 할 수 있다.

 

철제 제작 기술이 뛰어난 무기들
철제 제작 기술이 뛰어난 무기들

 

보루에서 발굴된 투구
보루에서 발굴된 투구

 

정교하게 제작된 마구
정교하게 제작된 마구

 

전시관 뒤로는 고구려 벽화 속에 나오는 가옥 구조를 근거로 상상을 더한 독특한 분위기의 고구려 집성촌을 실제와 같이 구성해 놓았다. 고구려 벽화 속에 나오는 집 구조를 바탕으로 학자들의 고증을 거친 후 완성했다 한다. 고구려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는데 그 성장 동력의 근원은 철기 문화와 제철 기술이다. 마을 전시장에는 이를 대변하듯 대장간이 자리 잡고 있다. 옛 방식과 구조를 재현해 놓았는데 직경 7m의 거대한 물레방아가 있으며 그에 걸맞은 대형 풀무가 눈길을 끈다.

대장간에 설치된 직경 7m의 대형 물레방아
대장간에 설치된 직경 7m의 대형 물레방아

 

 

화덕에 바람을 불어넣어 불을 살리는 대형 풀무
화덕에 바람을 불어넣어 불을 살리는 대형 풀무

 

 

‘거믈촌’ 마을 회의를 하는 장소. 개방형 지붕으로 가운데가 뚫려 있다.
‘거믈촌’ 마을 회의를 하는 장소. 개방형 지붕으로 가운데가 뚫려 있다.

 

커다란 가마와 굴뚝, 쇠망치와 집게, 완성품을 걸어 이동시키는 도르래 사이에서 잠시 고구려로 시간 여행한 상상을 하게도 된다. 마을 입구에 꽂힌 깃발에는 삼족오가 그려져 있고, 옆으로는 거믈촌이 있으며 그 벽면에는 고구려 고분 벽화 사신도가 있다. 고구려 강서 대묘 벽화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사신’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벽화에 그려진 현무는 거북과 뱀이 합쳐진 형상으로 냉철함과 지혜를 뜻한다.

옆으로는 ‘연호개체’가 있고 외벽에 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고구려 벽화에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이어 주는 매개체로 믿었다 한다. 이어서는 ‘담덕채’가 있는데 중앙에는 온돌이 설치돼 있으며 ‘쪽구들’이라고도 한다. 고구려의 난방 시설인데 방 안 한편에서 불을 지펴 취사와 난방을 동시 해결 했으며, 지금처럼 방바닥을 데우는 방식과 달리 공기를 따뜻하게 하는 기능이다.

 

담덕채.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하는 고구려의 난방 시설
담덕채.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하는 고구려의 난방 시설

 

양쪽으로는 견학 온 학생들을 위한 전통놀이 체험장, 야외 학습장과 야외 공연장, 경당이 있으며 지정 시간별로 문화 해설사의 해설을 들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 4500년의 역사 속, 만주 지역을 터전 삼았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 중 특히 고구려의 기상은 진취적이며 도전적이다. 고구려가 만주 지역을 지배하던 당시, 분열된 중국을 수나라가 통일시켰으나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지배하던 고구려에 큰 위협을 느꼈다. 수나라를 세운 문제와 아들 양제는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계속 군대를 보낸다. 양제는 100만 명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을지문덕 장군의 육군과 고건무 장군의 수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멸망한다.

이후 혼란한 중국을 통일한 영웅이 당나라를 세운 이연의 아들 이세민이다. 당시 가장 강한 나라인 돌궐을 점령하고 히말라야산맥 동쪽, 고비 사막 남쪽의 천하를 당나라 영토로 편입시켜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한 인물이다. 이세민은 선봉에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부대인 아사나사마가 이끄는 돌궐족 기병대를 세우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상하게도 중국 역사책에는 그들의 출전 기록만 나올 뿐 이후 행적은 없다. 돌궐 기병대는 연개소문이 이끄는 말갈 기병대에게 전멸했는데 중국이 이를 숨기기 위해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이세민 역시 안시성을 공략하다 양만춘이 지휘하는 고구려에 패배하고 돌아간다. 그는 죽을 때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이후 나, 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고 만다.

이런 영웅과 역사는 중국의 의도에 의해 은폐되거나 폄하 왜곡되기 다반사였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내세워 고구려와 발해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고 대무예, 광개토태왕, 연개소문, 을지문덕 장군도 중국인으로 둔갑시키려 하고 있다. 중국을 방문한 한국 관광객들이 전하기를, 중국에 남겨진 고구려 유적들에 담과 문을 만들거나 접근을 금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유적 중 ‘광개토태왕비’에서, ‘광개토대왕과 광개토태왕’ 중 맞는 표현을 궁금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광개토태왕’이맞다. 일본이 비하하려는 목적으로 ‘태왕’ ‘태’의 한문자에서 가운데 획 하나를 도려내고 없애 ‘대’자로 만든 것에 따른 후환이다. 상왕을 높인 칭호가 ‘클 태’자를 써서 ‘태왕’인 까닭에 한 단계 낮춘 칭호인 ‘대왕'으로 비하한 것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진입로
마을로 들어서는 진입로

 

걱정이 더해진 것은 고구려대장간마을을 돌아볼 때였다. 다른 관람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시설물은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 보였다. 멀리서 볼 때와 달리 가까이 보니 낡거나 부식된 부분이 자주 눈에 보였다. 마을 진입로와 아차산 둘레길 코스가 겹치는데 등반객 대부분은 마을을 지나 둘레길로 향했다.

넓은 부지에 좋은 시설물을 갖추고,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인근을 지날 때 중국 관광객을 만난 적이 있다. 저녁 5시경이었고 비가 오고 춥고 어두워지려 했다. 고구려대장간마을을 물어보며 끝에 ‘배용준’을 강조했다. 폐장 시간을 모를 때라 방향을 가르쳐 주었지만, 마을을 둘러보는 내내 한참 지난 그때가 상기되며 걱정이 됐다. 고구려대장간마을을 보며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 중요한 것은 고구려 문화를 알리고 강한 민족적 자부심을 전달하는 것인데, 낙후된 시설물들이 그에 대한 역할을 충분히 했을까? 걱정되는 마음이다.

 

장승들
장승들

 

<백 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표작이며 노벨상수상작품이다. 작가가 창조해 낸 상상의 마을 ‘마콘도’를 배경으로, 부엔디아 가문의 백 년을 그린 방대한 작품이기도 하다. 마을을 나와 산길을 내려오는 내내 다시금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입구에 서 있던 장승들 사이로 초저녁 초승달이 푸르게 떴다. 그 옛날 보루를 지키며 고향을 그리워하던 고구려병사도 하늘의 초승달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백 년동안의 고독에서 상상의 마을 ‘마콘도’는 끝없는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며 번성했지만, 탐욕에 의해 쇠락하다가 황량히 원점으로 돌아가는 대장정을 그리고 있다.

 

고구려대장간마을에서 바라본 아차산 ‘큰 바위 얼굴’
고구려대장간마을에서 바라본 아차산 ‘큰 바위 얼굴’

 

그렇다. 중요한 것은 그 땅 그 대지 위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것을 채우고 장식하는 그 무엇이 아닌, 그것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지켜 내는 강한 의지와 정신력인 것이다. 아차산성을 쌓고 보루를 만들어 적의 침탈을 막았으며, 보루를 지키는 병사는 향수를 이겨 내며 보초 서기를 철저히 했다. 온달 장군은 목숨 바쳐 산성을 지키려 했으며, 평강 공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낭군을 존경했으리라. 어찌 보면 고구려의 용맹함을 간파한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맺어 진격했을 수도 있다. 그랬기에 북상한 고구려가 중국과 만주 지역의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중국의 최강 부대조차도 두려워 떨던 고구려. 삼국을 통일한 신라. 한강을 가장 먼저 차지한 백제. 그 모두가 우리의 선조이며 뿌리이다. 조상 대대로 아끼고 넓히고 다지고 활용한 우리의 국토. 전승하고 계승한 문명과 문화. 그 정신을 이어받아 지키고 발전시켜, 후손 대대로 이어나가야 함은 우리의 몫이 되겠다. 고구려대장간마을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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