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시간을 기록하다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시간을 기록하다 서울역사박물관
  • 조수연 기자
  • 승인 2019.07.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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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전경

 

대한민국의 서울은 한양과 경성을 거쳐 이어 온 수도이다. 종로구 새문안로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이 지나온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박물관은 서울의 역사적 자료를 보존하면서 현대식으로 모형과 스크린을 만들어 관람하기 쉬운 교육과 체험의 장으로 기능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1985년 서울특별시립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계획되어 1997년에 건물이 준공되었다. 그 후 2001년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전시는 기획전시, 상설전시, 기증유물전시, 야외전시로 이루어져 있다. 서울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3층 상설전시실로 가야 한다. 상설전시실은 총 4존으로 이루어져 있다. 1존 ‘조선시대ʼ 2존 ‘개항과 대한제국기ʼ 3존 ‘일제강점기ʼ 4존 ‘고도성장기ʼ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울의 역사를 전시한다.

 

조선의 수도 한양

1존은 1392년에서 1863년까지 조선 시대의 서울에 대한 자료를 전시한다.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을 수도로 정하는 과정과 조선 시대 수도의 사회상을 보여 주는 공간이다. 육조 거리, 시전을 중심으로 북촌, 중촌, 남촌의 생활, 성저십리에 걸친 유물을 보여 준다.

태조는 1392년(태조 1) 7월 17일 새 왕조를 세운 후 수도를 이전하려 했다. 1393년 2월에 권중화의 건의로 계룡산의 남쪽으로 수도를 정했으나 12월 하륜의 반대로 수도 건설이 중단되었다. 나라의 수도는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수도의 후보지로 장단의 불일사(佛日寺)와 도라산(都羅山), 적성의 선점(鐥岾)이나 광실원(廣實院) 등이 거론되었다.

1394년(태조 3) 8월, 태조는 한양을 왕도로 삼았다. 전통과 풍수지리, 유교적 이념을 고려하여 건설된 것이다. 백악산을 비롯한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도성을 쌓고, 백악산 기슭에 궁궐을 세웠다. 좌측에 종묘를 두고 우측에 사직을 두었다.

이후 한양으로 사람과 물산이 모여들었다. 육로를 따라 말과 수레가 드나들고 수로를 따라 배가 모였다가 흩어졌다. 외국의 사신과 교류도 하며 한양은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한양은 학문, 예술을 선도하고 의식주 문화를 선도하는 곳이었다.

 

1존

 

1존
1존

 

궁궐은 경복궁과 이궁인 창덕궁으로 두 곳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모든 궁이 소실되어 창덕궁을 중건했고 1617년(광해군 9)에 경희궁을 창건했다. 1868년(고종 5) 경복궁이 중건했으며, 이후 고종이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에 살게 되었다. 창경궁을 포함하여 조선의 궁궐은 총 다섯 곳이 되었다.

지금의 광화문 앞 대로를 육조 거리라고 하였다. 중앙관청이 모인 거리이다. 육조거리의 동편에는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 기로소가 있고 서편에는 예조,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가 있었다.

 

1존
1존

 

1존
1존

 

한양의 주거지는 북촌, 중촌, 남촌으로 나누어졌다. 신분에 따른 구분이었다. 북촌 뒤로는 백악산에서 응봉으로 산자락이 흐르며, 앞으로는 지금의 청계천인 개천이 흐른다. 동쪽에는 창덕궁이 있고 서쪽에는 경복궁이 자리한다. 북촌에는 대개 경화사족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고위 관직에 있으며 학문적 소양을 갖춘 권세가였다. 성리학적 이념을 추구하고 대의명분을 중시하였는데 18세기 중반부터는 청나라의 문물에도 관심을 가졌다.

중촌은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마을이었다. 중촌은 지금의 청계천과 종로 일대이다. 역관, 의관, 율관 등의 관리나, 경아전 그리고 상인들이 모여 살았다. 남촌은 지금의 남산인 목멱산의 아래쪽이다. 남촌에는 청렴한 선비와 명문가가 많았다.

한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운종가(雲從街)였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거리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가로지르는 거리였다. 운종가의 양옆으로는 공설 시장이자 상점가인 시전이 있었다. 시전은 왕실과 관청으로 물품을 조달하다가 점차 민간 판매가 늘어나면서 대표적인 상점가가 되었다. 운종가의 중심에는 큰 종을 단 누각이 있었다. 이를 종루라고 한다. 종루는 도성의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을 알려 주었다. 종루의 양옆으로 선전, 면주전, 면포전, 저포전, 지전, 어물전 등의 육의전이 늘어서 있었다.

성저십리(城底十里)는 당시 한성부에 속한 성외(城外) 지역이다. 한성부는 도성으로부터 10리(4km) 이내의 지역까지 관리하였다. 조선 초기까지는 성저십리에 많은 인구가 살지 않았으나 후기에는 한양 인구의 약 50%가 성저십리에 살았다. 성저십리에 포함되는 마포, 용산, 서강 부근은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왕십리와 살곶이벌 등에서는 근교 농업이 이루어졌다.

 

1존
1존

 

1존
1존

 

전통과 근대의 공존

2존은 ‘개항 후 대한제국기ʼ로 1863년에서 1910년까지의 기록을 간직하고 있다. 세계에 문을 열기 시작한 후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존에서는 자주적 개혁을 위한 노력과 대한 제국 선포 이후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서구 제도를 도입하면서도 자주독립 국가임을 나타내는 오얏꽃, 태극기 등의 상징물을 새롭게 만들었고 서울에 자주독립과 황권의 위상을 표현하는 환구단과 장충단 등을 세웠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후 신문물 도입에 대해 내부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미국, 러시아 등과 통상 관계를 확대했다. 1880년대 중반부터 서울에 외국인 거류지가 생기고, 외국 여행을 하고 돌아온 한국인들도 있었다. 일상생활 속에도 이국적인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존
2존

 

2존
2존

 

 

2존
2존

 

2존
2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손실된 조선 초기의 도시 원형을 회복하여 왕권의 위엄을 세우고자 노력했다. 경복궁 중건, 성벽 정비, 흥인지문 보수 등이 이루어졌다. 개국 당시 한양의 모습으로 도시를 재정비하고자 했다.

대한 제국은 근대적인 교육을 시행하였고 산업과 교통 시설을 확충하였다. 정동에는 1883년 미국 공사관을 시작으로 각국 공사관이 들어섰다. 정동은 공사관과 신식 학교, 종교 시설이 모이면서 서울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경운궁 내부에는 대한 제국의 주요 정부 기관들이 들어섰다. 주변에 도로가 신축되고 전차, 전기 등 근대 시설이 도입되었다. 경운궁과 정동은 대한 제국의 개혁 이념인 전통과 근대의 공존이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1896년 종로에 빼곡하게 있던 상업용 가건물이 철거되었다. 건물의 높이, 건축 재료, 건축 양식에 대한 지침이 생겨나고 경관은 변화했다. 서양식 건물이 늘어나고 전차 선로와 전봇대, 가로등 등 근대 문물이 들어섰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 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했다. 이를 연호의 이름을 따 광무개혁이라 한다.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강령으로, 추진되었다.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서 국가 의례를 재정비했다.

 

경성의 그늘

3존은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경성의 모습을 자료로 제시한다. 암울했던 상황을 돌아보는 공간이다. 일제에 저항하면서도 근대 문물에 대한 동경을 가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일본은 전통적 도시 구조를 식민통치에 적합한 형태로 개조하려 했다. 남대문 북쪽 성벽을 무너뜨리고 소의문, 돈의문, 혜화문 등을 헐었으며 숭례문 양쪽 성문 또한 철거했다. 창경궁은 놀이터로 변하고 경복궁 근정문 앞에는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들어섰다. 경희궁은 일본인 중학교로 바뀌었다. 환구단에는 철도호텔이 들어서고 사직단에는 사직공원이 생겼다. 도시의 행정과 관리는 일본의 편익을 위해 변동되었다.

 

3존
3존

 

3존
3존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고, 의열단원을 비롯한 항일 의사들이 의거를 단행했다. 종로의 YMCA, 낙원동 천도교대교당 등은 항일 민족 운동의 틀을 마련하고 민족의식을 모으는 장소로 기능했다.

일본 정부는 도시 공간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관념을 바꾸려 했다. 일본이 바꾼 모습을 번영한 것, 깨끗한 것, 활기찬 것이라 여기도록 세뇌했다. 이에 한국인은 차별을 받으면서도 경성에 들어선 근대 문물을 동경의 눈길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3존
3존

 

3존
3존

 

1920~1930년대에 서구식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젊은이들을 모던걸, 모던보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옷차림은 사치스럽게 여겨지기도 했으나 봉건 제도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북촌에는 조선 극장과 당성사가 생기고 남촌에는 명치좌, 황금좌 등의 극장이 생겼다.

1937년 중일 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은 경성에도 전쟁의 그늘을 드리웠다. 빈곤 속에서 강제 저축과 공출로 재산을 빼앗겼다. 강제 노역을 당했고 전선에 끌려갔다. 1938년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은 군자금 지원과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거대 도시로 성장

4존은 1945년에서 2002년까지의 고도 성장기를 겪는 서울의 모습을 전시한다. 광복 이후 서울의 성장을 돌아보는 공간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이 거대 도시로 발전하기까지의 변화를 알 수 있다.

 

4존
4존

 

4존
4존

 

1945년 광복을 맞이했다. 미군정 시기를 거쳐 1948년 단독 정부가 수립이 되었으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다. 국토는 폐허가 되었다. 1953년 휴전 후 도시의 복구 사업이 시작되었다. 재건을 위해 도시 시설과 주택이 공급되었다.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서울로 인구가 모였다. 서울 인구는 1954년 124만 명에서 1960년 244만 명으로 늘었다. 급증한 인구는 주택난, 식수난 등의 문제를 발생시키면서도 도시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전쟁 후의 복구 사업은 도시 개발 사업으로 이어졌다. 1968년 금화 아파트를 시작으로 시민아파트가 건설되었고 서울의 모습을 바꾸었다. 그러던 중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으로 시민 아파트 건설은 중단되었다.

세운 상가 또한 서울의 모습을 변화시킨 곳 중 하나이다. 빼곡했던 무허가 판자촌이 철거되고 1967년 주상 복합 단지인 세운 상가가 들어섰다. 또한 차량이 증가되면서 방사선 도로, 순환 도로, 간선 도로가 확충되었다. 1974년 지하철이 개통되며 교통이 변모하였다.

 

4존
4존

 

여의도 지역은 1967년 개발이 시작되어 인공 섬으로 바뀌었다. 여의도 지역에는 국회 의사당, 광장, 아파트, 방송사, 기업들이 들어섰다. 한강 지역은 백사장과 나루에서 자동차 도로와 교량으로 변화했다. 강남에는 경부 고속 도로와 제3한강교가 건설되었다. 강남의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혜택을 주는 시책과 부동산 열풍이 맞물려 강남 인구는 1970년 540만 명에서 10년 만에 84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며 서울은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잠실 지역에 경기장, 선수촌, 공원을 건설하여 올림픽을 준비했다. 도심 재개발 사업도 추진되었다. 1990년대는 성수 대교와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를 겪었다. 그 후 개발 위주의 발전을 반성하며 문화, 환경에 대한 발전을 시작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개최하고 서울은 세계의 거대 도시로 성장한다.

상설전시실 4존은 도시모형영상관과 이어진다. 모형과 IT 기술을 결합해 대형 모형을 설치해 놓았다. ‘서울,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주제로 서울을 1/1500 규모로 축소하여, 관람객들이 서울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4존
4존

 

서울역사박물관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서울역사박물관

관람 시간 평일 09:00~20:00

             토·일·공휴일 3월~10월 09:00~19:00

             11월~2월 09:00~18:00

휴관일 1월 1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에는 1층 편의 시설(학습실, 서울역사자료실, 로비전시관, 강당, 식당, 카페테리아) 개방

※ 월요일이 공휴일일 때에는 휴관하지 않음

관람료 무료

문의 02-724-0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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