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의 역사, 운명의 갈림길 속 ‘자주’를 외치며
개항의 역사, 운명의 갈림길 속 ‘자주’를 외치며
  • 문화유산
  • 승인 2019.05.23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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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개항 박물관 전경 (출처 인천 개항 박물관)

 

개항이라는 것은 한 나라의 역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개항은 말 그대로 한 나라의 항구를 연다는 뜻으로 새로운 것을 맞아들인다는 의미다. 이런 것은 대부분 그 나라가 스스로 여건이 될 때 자립적으로 여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떤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문호를 개방해야 했다. 1876년 일본과 맺은 조선 최초의 근대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던 강화도 조약에 의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굳게 문을 닫히고 자국 수호를 우선시했던 우리는 이 여파로 근대화 과정에서 한 발 뒤쳐졌다.

개항은 우리에게 있어 어떻게 보면 아픈 역사 가운데 하나다. 비록 외세의 힘으로 문호를 열었지만 근대화를 꿈꾸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도약을 꿈꿨다. 세도 정치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고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19세기, 조선은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이전보다 발전된 국가, 나아진 삶을 기대했다. 그러나 갑신정변, 청일 전쟁, 동학 농민 운동 등 격동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힘이 없던 조선 정부는 외국 열강들에 휘둘렸고 결국 나라까지 잃는 비극을 맞았다. 개항은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기회이자 동시에 열강들의 세력에 맞서야 했던 갈림길과 같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알듯이 주권을 빼앗기는 아픔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박물관 내부의 모습 (출처 인천 개항 박물관)
박물관 내부의 모습 (출처 인천 개항 박물관)

 

수탈의 현장이 박물관으로

개항을 시작하고 난 후 세계의 물결을 가장 먼저 맞이한 곳은 인천이다. 현재 인천에는 그 당시의 역사를 한 곳에 모아놓은 인천 개항 박물관이 인천역 주변의 대표 관광지인 차이나타운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건물부터 근대화 시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박물관으로 사용된 이 근대화식 건물은 일본이 조선에서 나는 금괴와 사금을 사들여 조선을 수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일본 제1국립은행 인천 지점이 탄생했던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우리 민족을 침략해오던 상징물이 지금은 박물관으로서 교육장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정말 묘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개항 박물관은 크게 4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1전시실에는 인천 개항장의 근대 문물, 2전시실은 경인 철도와 한국 역사, 3전시실에는 개항기의 인천 풍경, 4전시실은 인천 전환국과 금융 기관으로 꾸며져 있다. 개항을 하고 난 직후 갓 들어온 전화기, 타자기 등과 같은 통신 수단부터 조선인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줬지만 동시에 토지와 이권들을 약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 경인 철도, 그리고 박물관 건물의 본래 용도였던 일본 제1국립은행까지, 근대화의 물결 속 변해가던 조선은 빠르게 달라져가고 있었다. 박물관 안쪽 4전시실 입구에는 일본이 은행으로 사용하던 당시의 금고 문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개혁을 꿈꾸던 조선의 열망을 느끼고자 했지만 흉터처럼 남은 약탈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다.

 

금고 문이 남아있는 4전시실 입구
금고 문이 남아있는 4전시실 입구

 

이어 방문한 근대 건축 전시관. 현재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 건물 역시 일본 제18은행이 있던 곳으로 조선의 금융계를 지배하고자 일본이 세운 것이다. 은행을 비롯해 성당, 학교, 부청사, 그리고 과거 제물포의 모습 등을 보면서 현재 인천의 변화해왔던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마치 오늘날 신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대로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 곳 안에도 역시 일본이 은행으로 사용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조선인들을 약탈하기 위해 쓰였던 창고 같은 곳은 현재, 그 때의 사실을 알리는 조그마한 전시실로 활용되고 있다.

 

인천 개항장 근대 건축 전시관
인천 개항장 근대 건축 전시관

 

박물관 한 켠에는 근대화 시절 제물포의 모습이 비치돼 있다. 당시 제물포 모습은 현재까지 굳어진 인천의 방위와도 많은 관련이 있다. 현재 인천에 비해 과거의 인천은 인천항과 제물포 등을 중심으로만 있던 작은 마을이었다. 그로 인해 현재 동인천이라는 지명은 인천이 커지면서 얼떨결에 동인천이 아닌 서인천에 해당하는 위치로 바뀌었다. 그 외에도 행정 구역 중 남구는 남쪽이 아닌 인천 중심부에 위치하는데도 남구로 지정돼 있어 지난 7월 미추홀구로 변경됐다.

 

1920년대 제물포의 전경
1920년대 제물포의 전경

 

외면 받는 아픈 역사

두 곳의 박물관을 보고 나와보니 한적한 주변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박물관 속 사진과 달리 현재 이 곳은 잘 닦여지고 새 건물이 들어서있었다. 인천 중구 지역은 인천시에서 비교적 낙후된 곳에 속하지만 인천항과 가깝기 때문에 근처에는 유명 택배 회사와 관련 기관들이 밀집해 있다. 모든 것이 새것이지만 그 속에 홀로 지키고 있는 개항 박물관과 근대 건축 전시관 건물은 참 외로워 보였다.

여행을 매우 좋아하는 필자는 유럽을 두 차례 다녀왔다. 10000km나 떨어져 있는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은 옛것을 정말 잘 보존하고 활용할 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옛것을 중요시하고는 있지만 많은 곳에서는 새것을 훨씬 더 값어치 있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날 취재를 마치고 보니 두 박물관의 길 건너편에 그리 오래되지 않은 건물에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다. 좁은 길 사이로 옛것과 새것이 대치되는 풍경이었다. 평일 이른 시간이라 많은 사람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카페에는 몇 명의 손님이 있었다. 그러나 박물관을 찾은 사람은 필자 혼자였다. 아픈 역사이고 되돌리고 싶지 않은 과거라고 그렇게 우리 모두 조금은 등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옛것과 새것이 대치되는 풍경
옛것과 새것이 대치되는 풍경

 

반복되는 역사... 자주를 향한 갈망

역사는 가까운 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최근 우리는 국제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루만 뉴스를 보지 않더라도 세상이 급속도로 변할 정도로 변화가 빠르다. 4월 27일, 11년 만에 남북 정상 회담이 개최되고 판문점 선언을 하면서 평화를 갈망하는 움직임이 다시 활발해졌다. 그리고 현재는 세기의 핵 담판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북미 정상 회담으로 인해 전 세계의 시선이 또 한 번 한반도로 모이고 있다.

각 나라의 원수들이 모이는 이 곳에서 가장 큰 화두는 종전 선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종전 선언을 현재 우리끼리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전쟁 때 참전했던 미국, 중국 등과 함께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아직까지도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의지보다는 강대국의 결정에 달려있는 비극적인 운명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역사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중국을 비롯해 외세의 영향을 받아오며 자주적인 외침을 지속해왔다. 개항도 그렇다. 우리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문호를 개방했지만 그 속에는 일본의 힘에 맞서 저항하고 또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조선인들의 열망과 의지도 있었다. 개항을 했던 1876년 이후 142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우리 손으로 전쟁을 끝내고 평화의 길을 가기 위해 정상 회담을 진행했다. 그런 행동은 단순히 어제오늘 일이 아닌 먼 과거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자주’(自主)에 대한 의지는 우리의 정체성과도 같다.

인천 개항 박물관과 근대 건축 전시관은 인천시 중구 신포로23번길 89에 위치하고 있으며 1호선과 수인선 인천역에서 도보 10분이면 닿을 수 있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관람료는 각 500원이다. 또한 인근에 위치한 짜장면 박물관, 중구 생활사 전시관, 한중 문화관 등과 함께 5개관 통합 관람권도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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