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가 깃든 청계천, 과거와 오늘의 모습
조선의 역사가 깃든 청계천, 과거와 오늘의 모습
  • 박영진 기자
  • 승인 2019.07.22 1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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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와 동대문 일대를 가로지르며 젖줄 역할을 해 온 청계천. 청계천은 조선 시대에 백성들이 오고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가 1960년대 복개 공사를 하고 고가 도로가 생기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지난 2005년 약 45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현대 시민들에게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청계천의 폭포
청계천의 폭포

 

과거 청계천은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길목이자 경복궁 등 조선의 궁궐로 향하는 입구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이곳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조선 왕조 500여 년의 역사가 다리와 하천 곳곳에 숨겨져 있다. 하지만 현대에는 빼곡한 빌딩이 들어찬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면서, 사람들이 잠시나마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대표 쉼터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특별한 날에는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면서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손꼽히는 서울의 대표 명소이기도 하다. 청계천의 달라진 과거와 오늘, 그 발자취를 찾으러 떠나 본다.

 

청계광장
청계광장

 

조선의 역사를 알려 주는 청계천

청계천의 시작을 알리는 곳은 단연 시청역과 광화문 부근에 위치한 청계광장이다. 이 넓은 광장의 중심에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는 미술 작품이 하나 있는데 ‘스프링’이라고 한다. 이것은 소라 모양을 형상화한 것으로 본래 있었던 작품에 시민들이 동전 던지기 등을 하면서 훼손되자 지난 2006년에 새로이 단장됐다. 스프링은 미국의 팝 아트 작가인 클래스 올덴버그와 코샤 반 브르군 부부의 작품으로 현대식으로 새롭게 만나는 청계천의 물이 샘솟는 모양과 그와 함께 서울도 발전한다는 모습을 상징한다.

광장은 청계천의 시작을 알리는 곳답게 방송 매체에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축제를 즐기곤 한다. 청계천의 가장 대표적인 행사인 등불 축제를 비롯한 다양한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또한 현재 YTN을 비롯한 방송사들이 날씨 뉴스를 자주 촬영하는 공간으로 등장하기도 해 친숙함을 느낄 수 있다.

청계광장과 함께 청계천 하면 떠오르는 것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수많은 다리가 아닐까. 청계천 사이사이 놓인 20개가 넘는 다리들은 제각기 다른 역사를 갖고 있다. 다리 하나하나마다 오랜 시간을 거쳐 갖고 있는 사연과 함께 걸어 보는 청계천은 학습의 현장이자 새로운 발견이라는 재미를 가져다준다.

 

청계광장의 스프링
청계광장의 스프링

 

청계천의 돌다리들
청계천의 돌다리들

 

모전교
모전교

 

청계광장에서 시작된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첫 번째 다리인 모전교가 나온다. ‘모전’은 조선말로 과일 가게를 뜻하는데, 조선 시대 때 다리 이름 그대로 이곳에 과일 가게가 많았기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당시 청계천은 하천이 수시로 범람해 백성들이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주변에 수많은 장터들이 자리하면서 한양을 살아가던 백성들의 주요 생활 공간이었다. 모전교는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때 그 시절의 모습을 떠오르게 해 주고 있다.

두 번째로 나오는 다리는 한 왕비의 한이 서려 있는 광통교다. 바로 조선을 창립한 태조 이성계의 아내였던 신덕 왕후 강씨가 주인공이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놓여 있는 다리 가운데 가장 역사가 길며, ‘광통’은 넓은 다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광통교
저 멀리 보이는 광통교

 

광통교에 쓰인 석각 신장들
광통교에 쓰인 석각 신장들

 

이성계의 아들 중 한 명이었던 이방원(태종)은 계모였던 강씨가 자신이 아닌 친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해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하자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 방석을 죽였고, 태조가 승하한 후 신덕 왕후의 지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그가 묻힌 능도 정릉에서 양주로 이장했는데, 이장하는 과정에서 능에 사용됐던 12개의 석각 신장을 광통교 보수 공사 때 사용했다. 그 신장들이 바로 다리 밑에 박혀 있다. 이방원은 이곳에 정릉의 신장을 사용함으로써 백성들이 밟고 다니게끔 한 것이다. 그만큼 신덕 왕후에 대한 강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통교에 쓰인 석각 신장들
광통교에 쓰인 석각 신장들

 

광통교를 빠져나오니 사자성어가 교각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광통교의 역사를 나타낸다. ‘경진지평(庚辰地平)’은 1760년(영조 36)에 광통교를 다시 보수하고 준설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이맘때 청계천에 흙과 모래는 물론 오물까지 쌓이면서 물이 넘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조선 조정에서는 약 두 달간에 걸쳐 강바닥을 파내는 공사를 진행했는데, 이를 사자성어로 풀어 쓴 것이 ‘경진지평’이다. 이어 ‘계사경준(溪巳更浚)’은 1773년(영조 49)에 다시 준설, ‘기사대준(己巳大浚)’은 1869년(고종 26)에 복계 공사를 한 것을 의미한다.

 

 

광교
광교

 

이제 광통교를 지나면 토교에서 석교 그리고 현대 디자인으로 복원된 광교와, 장통방 부근이었기에 이름이 붙은 장통교, 그리고 탑골공원의 삼일문과 가까워 이름으로 지어진 삼일교 등이 있다. 조선 시대의 과학을 만나 볼 수 있는 곳도 있는데, 바로 수표교다. 이곳은 조선 초기 과학이 발달했던 1441년 홍수에 대비해 청계천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가 있던 바로 그 자리다. 그때의 역사적 기록을 따와 수표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뒤이어 등장하는 관수교도 수표교 인근과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때 하천의 수위를 관측한 곳이다.

 

수표교
수표교

 

이외에도 조선 초기 비운의 임금으로 잘 알려진 단종과 그의 아내이자 왕비였던 정순 왕후 송씨의 가슴 아픈 사연도 청계천에서 만날 수 있다. 6호선 동묘앞역 부근에 위치한 영도교가 그곳이다. 또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던 김정호의 호인 ‘고산자(古山子)’를 따서 만든 고산자교 등 왕족부터 소중한 문화유산을 남기는 업적을 세운 인물의 다리까지 있다. 이처럼 청계천의 수많은 다리는 저마다의 역사를 지니고 그 당시를 살아간 백성, 그리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교통의 역할과 동시에 매 순간 삶의 장면들을 담아 두고 있다.

 

청계천과 주변 빌딩들
청계천과 주변 빌딩들

 

현대와 연결되는 청계천

청계천의 다리는 조선 시대와만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40~50여 년 전의 비교적 가까운 과거와 오늘날과도 연결되는 곳이 곳곳에 있다.

종로 5가 부근에서 동대문 한복판까지 위치해 있는 다리들은 모두 현대의 상권과 관련돼 있는 다리들이다. 종로 한복판에 위치한 세운교는 1960~70년대를 대표하던 세운상가와 인접해 있어 상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또, 과거 청계천과 청계 고가 대로를 따라 즐비하던 재래시장을 추억하며 생긴 새벽다리, 동대문의 의류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디자인으로 형상화해 담은 나래교 등도 있다. 청계천을 통해 조선 시대의 상권과 오늘날의 상권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청계천의 흐르는 물
청계천의 흐르는 물

 

왕십리 부근에는 과거 많은 차들이 오고 갔던 청계 고가 대로의 흔적도 남아 있다. 하늘물터가 그곳이다. 1970년대 서울이 대대적으로 개발될 무렵 들어섰던 청계 고가 도로는 마장동과 남산 일대를 연결해 주며 서울의 대표적인 교통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건설된 지 30년이 넘은 1990년대 중후반부터 붕괴 위험 등을 이유로 노후화된 도로를 철거하고 도시 재생과 역사적인 가치를 위해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2003년 7월 1일부터 청계 고가 도로는 기능이 중지되고 철거 작업에 들어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변모한 청계천, 모두를 품은 청계천

복원된 청계천은 도심의 열섬 현상을 줄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청계 고가 도로가 있을 무렵에는 높은 빌딩 사이에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이뤄진 높은 다리로 인해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 여름철 기온을 오히려 더 끌어올리는 악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청계천이 복원되고 난 후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고, 도시 내 생기는 열섬 현상을 한층 완화시켰다. 실제로 지난해 7~8월 한여름 낮 기온이 40도 가까이 올라갔을 때, 청계천의 온도는 주변 아스팔트보다 무려 7~8도가량 낮았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활용하고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대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대부분 직장이나 학교 등 저마다의 일정으로 인해 제대로 된 쉼표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계천 주변에는 수많은 빌딩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 근처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에게 청계천은 오아시스의 샘물처럼 잠시나마 일상생활을 돌아보며 여유로운 한때를 즐길 수 있는 대표 명소로 꼽힌다.

 

청계천에 그려진 벽화
청계천에 그려진 벽화

 

직장인들뿐만 아니라 서울 시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 청계천이다. 청계천에서는 매년 등불 축제를 비롯해 크리스마스나 주요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연인들에게는 데이트 장소로, 가족들에게는 즐거운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장소로 제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뜻깊은 명소로 자리 잡았다. 그를 알려 주듯 청계천의 주변 곳곳은 시, 벽화 등을 비롯한 문학 작품과 다양한 글씨들로 가득하다.

과거 14~19세기 조선 시대의 청계천은 사람들이 모여서 장터를 이루고 물건을 파는 생활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의 심장부로 향하는 길목을 알리는 곳이었다. 반면 오늘날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쉼터이자 추억을 쌓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따금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없어져 가던 역사적 장소들도 다시 만날 수 있다.

역할은 다소 달라졌을지라도 500여 년 전과 지금이 똑같은 점은 항상 소탈한 시민들과 함께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 작은 하천을 따라 물줄기가 변함없이 이어지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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