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의 중심 고분, 대성동 고분군
금관가야의 중심 고분, 대성동 고분군
  • 송영대 기자
  • 승인 2019.07.2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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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가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가야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을 강조하고,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학술 연구와 행사가 개최되면서 가야의 위상이 점차 올라가고 있다. 가야는 삼국 시대에 고구려·백제·신라와 공존하였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 역사를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정보를 알 수 없었다. 가야와 관련된 사료는 극히 제한적으로, 주변국이나 후대의 기록 및 고고학적 자료를 통하여 연구되어 왔다.

 

대성동 고분군이 자리한 애구지 언덕
대성동 고분군이 자리한 애구지 언덕

 

가야는 하나의 국가가 아닌 여러 국가로 구성되었다. 가야의 실체에 대해 학계에서 다양한 논쟁이 있는데, 주로 연맹 형태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연맹의 맹주로는 김해의 금관가야와 고령의 대가야를 손에 꼽고 있으며, 본래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존재하였다가 이후 대가야가 주도권을 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초기의 가야 연맹을 이끌었던 금관가야의 지도자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았을까? 또한 이들이 죽고 나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러한 물음의 답이 바로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금관가야의 중심 고분이다. 가야인들에게 있어서 주요 삶의 터전이고 생애를 마감하는 장소였으며, 당시 권력의 흔적과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남아 있는 곳이다.

 

대성동 1~4호분 발굴 위치의 현재 모습
대성동 1~4호분 발굴 위치의 현재 모습

 

애구지 언덕에 세워진 무덤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이 자리한 구릉을 애구지나 애꼬지라 부른다. 작은 구지봉 혹은 제2의 구지봉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구지봉은 잘 알려져 있듯이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구릉이다. 애구지 언덕은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 구지봉, 봉황대 유적 등과 더불어 금관가야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지금은 평지에 있는 자그마한 언덕이지만 가야 시대에는 김해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즉 내륙 깊숙이 형성된 만이었으므로, 외부와 교류하기 유리한 항구에 해당하였다. 애구지 언덕은 김해 중심지 중에서도 지대가 높은 곳에 해당하며, 가야인들에게 신성시되었던 장소로 생각된다.

 

애구지 언덕 위의 가야 고분군 사이 산책로
애구지 언덕 위의 가야 고분군 사이 산책로

 

흔히 고분군이라고 하면 둥그스름하면서도 큰 무덤들이 여럿 모여 있는 모습을 연상한다. 대성동 고분군은 그러한 기존의 고분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에 와서 둘러보면 정작 고분군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게 된다. 언덕 자체가 하나의 고분이라기에는 너무 크고 넓은데, 봉분은 하나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무덤 양식으로 인한 차이라 할 수 있다. 대성동 고분군에는 여러 무덤들이 조영되었지만 봉분을 높게 쌓아 올리지 않았다. 아울러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무덤이 무너지고 그 위에 다른 건물이 들어서거나 식물이 자라면서 점차 봉분은 사라지게 되었다.

대성동 고분군은 1990년부터 2014년까지 총 9차례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를 통해 총 304기의 무덤이 조사되었으며, 고인돌·독무덤·널무덤·덧널무덤·구덩식 돌덧널무덤·돌방무덤 등 다양한 형식의 것들이 확인되었다. 덧널무덤이나 구덩식 덧널무덤과 같은 대형 무덤은 구릉의 능선부에 위치하지만, 중형 혹은 소형 무덤은 구릉의 사면과 주변 평지에 주로 분포한다.

대성동 고분군을 방문하면 현재 애구지 언덕에 길을 내어 산책할 수 있게 해 놓았다. 평지에는 대성동고분박물관이 있으며, 언덕을 오르는 길목에는 노출전시관이 위치한다. 애구지 언덕 위에 올라서면 각 고분들의 위치를 작은 나무 혹은 벽돌로 표시하였으며 일부는 석재를 그대로 노출시키기도 하였다. 대성동 고분군에 올라 동북쪽을 바라보면 분성산이 있는데, 이곳의 정상에는 김해 천문대와 가야 시대의 산성인 분산성이 위치한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김해 천문대와 분산성이 저 멀리 보인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김해 천문대와 분산성이 저 멀리 보인다.

 

금관가야의 어제와 오늘을 알 수 있게 하는 대성동고분박물관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금관가야의 왕이나 귀족들이 묻힌 주요 고분이기 때문에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정받아 2003년에 전시관이 개관되었다. 이후 리모델링을 거쳐서 2017년에 재개관을 하였다. 때문에 과거의 전시와 현재의 전시는 일부 차이점들이 확인되는데, 예를 들어 최초 개관 때의 대성동고분박물관에는 늠름한 모습의 가야 기병이 월도와 같은 무기를 들고 있고 주변에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현재는 이를 다 없애 버리고 전시 공간으로 대체하였다.

 

대성동고분박물관의 전경
대성동고분박물관의 전경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는 대성동 고분군과 금관가야를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전시가 이루어졌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전시물은 ‘가야의 숲 3호 널무덤’의 모형으로, 1세기 최고 지배자의 무덤으로 소개되었다. 통나무를 파서 만든 관 속에 각종 유물들을 복원하여 전시하였다. 관 안에는 부채 2점과 청동 거울 1점 그리고 칠초철검, 즉 칠이 된 칼집과 쇠칼이 출토되었다. 관 밖에는 각종 토기와 무기류 등이 확인되었다. 통나무로 만든 관은 창원 다호리 유적의 사례가 대표적으로, 금관가야 또한 소국 시절의 지도자가 다호리 유적에 매장된 사람과 유사한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가야의 숲 3호 널무덤 복원 모형
가야의 숲 3호 널무덤 복원 모형

 

‘대성동 88호분’은 널무덤에서 더 발전한 덧널무덤이다. 즉 기존에는 통나무로 만든 관을 썼다면, 대성동 88호분과 같은 시기의 무덤들은 관보다 크기가 큰 곽으로 무덤을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함께 매장할 수 있는 유물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시대가 좀 더 지나면 으뜸 덧널과 딸린덧널 즉 주곽과 부곽이라고 하는 시설로 구분되어 무덤이 조성된다. 주곽에는 무덤 주인의 시신과 유물들이 들어가며, 부곽에는 무덤 주인을 위해 함께 묻힌 유물들만 들어가게 된다.

 

대성동 88호분 덧널무덤 복원 모형
대성동 88호분 덧널무덤 복원 모형

 

대성동 88호분 덧널무덤은 ‘ㅍ’의 형태로 맞물려져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에서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유물은 바람개비 모양 청동기이다. 총 13점이 출토되었는데 가야나 주변의 국가에서 제작된 것이 아닌, 왜(일본)에서 제작되고 사용되었던 유물이다. 바람개비 모양 청동기는 방패를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당시에는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들만 사용하였다. 즉 대성동 88호분 덧널무덤은 높은 신분을 지닌 인물의 무덤일 뿐 아니라, 왜와 활발한 교류를 하였던 사람의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시실 한 쪽에는 ‘금관가야의 무사’라는 제목으로 찰갑옷을 입은 마네킹이 자리하고 있다. 찰갑옷은 소찰이라고 하는 작은 철 조각을 엮어서 만든 갑옷이다. 본래 가야에서는 판갑옷을 주로 입었지만, 고구려가 신라 구원을 위해 남방으로 진출하고 이후 북방 지역의 문화가 유입되면서 찰갑옷도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금관가야의 무사 마네킹은 목 가리개, 허리 가리개, 팔 가리개와 투구를 착장한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찰갑옷을 입은 금관가야의 무사
찰갑옷을 입은 금관가야의 무사

 

대성동 고분군과 함께 금관가야의 주요 고분군으로 손꼽히는 유적이 김해 예안리 고분군이다. 예안리 고분군은 가야 권역에서 가장 많은 인골이 조사되었으며, 북방계와 남방계의 형질이 함께 확인된다. 특히 편두를 한 두개골이 확인되어 주목받은 바 있다. 편두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어린 아이의 이마를 짓눌러 두개골을 변형시킨 풍습을 의미한다. <삼국지>에서도 관련 기록이 확인되며, 북방 민족은 물론 동유럽에서까지 편두 풍습의 사례들이 확인된다.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인골의 분석을 통해 당시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4.7cm, 여성의 평균 신장은 150.8cm로 조사되었다.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인골이 출토되었지만 도굴 때문에 무덤의 주인이 아닌 순장자의 형질 분석만이 가능하다. 순장자의 경우 편두가 확인되지 않으며, 평균 신장은 남성이 155.7cm, 여성은 150.8cm로 나타난다고 한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 출토 여성의 인골 복원도
김해 예안리 고분군 출토 여성의 인골 복원도

 

전시관에서는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인골을 바탕으로 여성을 홀로그램으로 복원하였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인골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혹은 두 모습이 중간에 겹쳐지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은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순장의 사례가 다수 확인된다. 순장이란 무덤의 주인을 모시던 시종이나 신하를 죽여서 함께 묻는 장례 방식에 해당한다. 죽음의 세계에서도 왕이나 주인을 그대로 모신다는 의미에서 순장이 이루어졌으며, 낮은 신분의 인물이 순장되기도 하였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신분의 인물이 순장되는 사례도 있었다. 왕급 무덤의 경우 주곽 안에 1인에서 3~4인, 다시 5인의 순으로 순장자 수가 늘어나며, 5세기 초가 되면 중형 무덤에서도 2인의 순장자가 곽 안에 묻히게 된다. 순장은 무덤 주인의 권력을 상징하는 풍습이었다. 그렇지만 불필요하게 생명과 노동력을 해치는 행위였기에 점차 기피되었고, 불교의 영향으로 내세에 대한 관념이 달라지면서 점차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대성동 고분군 순장 모형
대성동 고분군 순장 모형

 

돈방석을 넘어선 돈침대, 가야에서 실현되다

대성동고분박물관과는 별개로 야외에 전시관이 하나 더 마련되어 있다. 바로 노출전시관으로, 대성동 29호분과 39호분의 발굴 당시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켜 놓았다. 발굴된 유구뿐만 아니라 유물도 매장 당시의 모습에 맞춰 복원하여 볼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대성동 고분군 노출전시관
대성동 고분군 노출전시관

 

대성동 29호분과 39호분 중에서 먼저 만들어진 무덤은 29호분이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39호분이 추가적으로 만들어졌으며, 29호분의 일부를 파괴하며 무덤이 들어서게 되었다. 무덤 양식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29호분은 넓은 곽을 이용하고 다양한 부장품과 시신을 함께 배치한 덧널무덤으로 만들어졌다. 반면에 39호분은 주곽과 부곽이 있는 덧널무덤으로 만들어졌다. 아울러 주곽에 돌을 깔아 바닥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29호분과 차이를 보인다.

29호분에는 특이하게 무덤 주인이 누워 있는 공간에 덩이쇠 즉 철정을 깔아 놓았다. 철정은 철을 일정 규격으로 만들어 놓은 철기를 의미한다. 철정 그 자체로는 유용한 도구가 아니지만, 이를 변형시켜서 다양한 용도의 철기를 제작할 수 있는 일종의 기본 원료였다. 그렇지만 다른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삼국지>를 보면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고 기록되었다. 오늘날의 동전이나 지폐처럼 당시에는 철정이 화폐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노출전시관 내부의 29호분과 39호분 모습
노출전시관 내부의 29호분과 39호분 모습

 

다시 말해 29호분의 주인은 부유하였던 인물로 볼 수 있으며, 죽어서도 살아생전의 부귀함을 그대로 누리기 위하여 철정으로 침대를 만든 셈이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돈방석을 넘어 돈침대에 누운 상태로 매장된 셈이다. 그렇지만 그 영예는 영원하지 못하였으며 불과 수백 년도 지나지 않아 자신과 동일한 가야인 후손에 의하여 무덤이 일부 파괴되고 말았다.

 

대성동 고분군 출토 철정
대성동 고분군 출토 철정

 

오랜 잠에서 다시 깨어나는 가야 고분군

대성동 고분군은 금관가야의 역사를 간직한 주요 고분군이다. 이곳은 가야를 다스렸던 왕과 왕족 그리고 주요 귀족들이 생을 마감하는 북망산과 같은 곳이었다. 금관가야가 신라에게 멸망당한 이후, 대성동 고분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다시 깨어나 후세에 가야의 지난 영광을 이렇게 보여 주고 있다. 더불어 현재 또 다른 도약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2013년에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유산 잠정 목록으로 등재되었다. 그렇지만 이 유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때문에 현재는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고성 송학동 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 전북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과 함께 등재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대성동 고분군을 포함한 7곳의 가야 고분군은 2021년에 세계 유산 등재 여부가 판명될 예정이다. 최근 국내에서 가야에 대한 관심이 여러모로 깊어진 상황이다. 이제는 가야의 실체와 가치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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