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비의 실제 삶은 어땠을까? 2]
[조선 왕비의 실제 삶은 어땠을까? 2]
  • 이성관 기자
  • 승인 2019.07.2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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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보다 우월한 권위와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왕비는 조선 역사에도 찾을 수 있다. 특히 어린 성종을 대신하여 7년간 섭정을 한 정희 왕후 민씨와 정희 왕후를 보좌하며 내명부의 기틀을 잡은 인수 대비 한씨, 명종을 대신하여 섭정한 문정 왕후 윤씨는 조선 전기에 대표적으로 강한 권력을 가졌던 왕비로 꼽을 수 있다. 이 시간에는 왕보다 강했던 그녀들의 이야기에 집중해 본다.

 

왕비의 혼례복
왕비의 혼례복

 

조선 전기에 나라의 기틀을 잡기 위해 특별한 카리스마를 보여 준 왕들이 몇 있다. 태종과 세조가 대표적인데 이들은 자신의 형제와 인척, 그리고 수많은 공신을 죽이며 왕위에 올랐다. 이들이 그토록 잔인한 숙청을 벌인 것은 왕권을 강화하여 자신의 후대에 왕위를 보장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벌인 뒤에는 조선 전기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과 성종이 탄생했다.

하지만 세종과 성종이 성군이라 불릴 수 있었던 데에는 피의 숙청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두 왕이 선정을 펼치도록 궁 안팎을 단속한 왕비들의 역할이 컸다. 먼저 태종의 비 원경 왕후 민씨는 태종을 위기에서 여러 차례 구해 낸 여장부였다. 태종이 왕자 시절 태조의 왕비인 신덕 왕후 강씨의 여종과 정분이 난 것을 들키고 말았는데, 이때 강씨를 직접 만나 여종을 데려와 후궁으로 앉힌 이가 원경 왕후 민씨였고, 1, 2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의 음모를 파악하고 태종이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도운 것도 민씨였다. 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네 모후의 공이 고려 태조의 류씨 왕후보다 컸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민씨의 개인사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남자 형제들 둘이 유배를 떠나고 아버지는 화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유배를 갔던 남자 형제들이 모두 처형당하고, 이 때문에 몸져누운 왕비를 문안하기 위해 궁궐에 왔다가 양녕 대군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또 다른 남자 형제 둘도 처형당한다. 그러나 태종은 신하들이 역적의 자손이기 때문에 폐비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음에도 원경 왕후를 폐위하지는 않았다. 민씨의 소생인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대군을 생각해서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왕이 되기까지 민씨의 공이 컸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태종은 무려 12명의 후궁을 두어 수많은 소생을 낳았지만 민씨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이 너무나 출중했기 때문에 왕위가 다른 소생들에게 돌아갈 가능성은 없었다. 따라서 왕의 어미를 폐비로 만드는 것은 태종으로서도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다. 결국 막내 성녕 대군의 죽음 이후 병을 얻어 숨을 거두지만 태종에게는 평생의 동반자이자 거사를 함께 치른 동료이기도 했다.

원경 왕후는 살아생전 12명의 후궁을 엄하게 단속했기 때문에 내명부의 기틀을 세우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여인으로서 질투한 것이 아니라 왕비로서 궁 안을 단속하는 척도를 만들었다. 온 가족이 죽임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왕비의 소임을 다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원경 왕후와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는 세종의 왕비 소헌 왕후 심씨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일족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소헌 왕후가 내명부의 기틀을 더 굳게 다질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원경 왕후의 힘이 컸다.

다음으로 세조의 왕비 정희 왕후의 삶을 살펴보자. 정희 왕후는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북방의 호랑이라 불리는 김종서 장군을 치러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손수 갑옷을 입혀 주며 “가야 할 길이면 망설이지 말라”고 조언해 세조가 거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한 인물이다. 세조는 생전에 이런 정희 왕후의 정치 감각을 높게 봤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정희 왕후에게 조언을 구했다.

세조가 죽고, 예종도 1년 2개월 만에 숨을 거두자 정희 왕후는 자신이 섭정하기 위해 어린 성종을 즉위시킨다. 이와 같은 결단에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들어있다. 적통을 잇고자 한다면 예종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야 했으나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불허하고, 세조의 첫째 아들인 의경 세자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린 것이다. 이 또한 마땅히 의경 세자의 첫째 아들을 왕위에 올려야 했으나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불허한다. 그 이유는 13살인 성종을 선택해야 자신이 섭정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종이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한명회의 막내딸과 혼인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국을 마음대로 이끌기 위해선 성종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기도 남양주 광릉의 정희 왕후지묘
경기도 남양주 광릉의 정희 왕후지묘

 

정희 왕후는 스스로 왕보다 더 뛰어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고, 정확히 7년간 섭정을 하면서 단 한 번의 민란도 없었을 만큼 평온한 정치를 했다. 그리고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성종이 스무 살이 되자 모든 권한을 물려줬다. 정희 왕후와 손을 잡고 정국을 주무르던 한명회가 정희 왕후에게 아첨하며 섭정을 더 할 것을 은근히 권하자 불같이 화를 내며, 한명회의 발언을 역모와 매한가지라고 질타한다. 한명회는 당시 왕비로 보낸 딸 둘이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에 정희 왕후가 왕실로 연결된 유일한 끈이었다. 그렇기에 정희 왕후가 조금 더 섭정하는 것이 한명회에게는 중요했다. 정희 왕후는 이를 간파하고 확실히 선을 그으며 왕을 견제할 세력을 끊어내 버렸다. 역시 세조에게 갑옷을 입혀주던 정치 감각과 과단성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이다.

세조는 단종처럼 아주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가 왕위에 오래 있지 못한 왕을 제외하면, 조선 왕 중 가장 후궁이 적었다. 세조의 후궁은 근빈 박씨 한 명이었는데, 왕이 되기 전에 사가에서 박씨의 춤에 반해 첩으로 들였다고 전해진다. 세조가 왕이 된 이후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후궁을 들이지 않고, 정희 왕후에게 의지했다. 세조는 정희 왕후의 청으로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고 첫째 아들인 의경 세자를 잃었을 때도 정희 왕후와 함께 슬픔을 달랬다. 세조와 의경 세자, 예종까지 꿈에서 단종의 어머니 현덕 왕후와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저주를 받고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정희 왕후는 현덕 왕후의 묘소를 파헤쳐 관을 강에 던져 버리는 등 강한 면모를 보여 준다. 그러나 결국 온천 목욕을 하다가 쓰러져 이후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다음은 정희 왕후를 도와 실질적인 왕비의 역할을 했던 인수 대비에 대해서 알아보자. 의경 세자의 아내로 세자빈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세자가 왕이 되기 전에 죽으면서 왕비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 즉 성종이 즉위하면서 의경 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해 왕비가 되었고, 곧바로 대비가 됐다. 그렇게 정희 왕후가 숨을 거둔 후 내명부의 최고 어른이 된 인수 대비는 <내훈>을 써서 내·외명부를 넘어 사대부의 여인들까지 지킬 규율을 만들었다. 성종의 두 번째 왕비인 제헌 왕후를 책봉한 것도, 폐서인으로 만들어 궁에서 내쫓은 것도 인수 대비였다. 인수 대비는 세자빈 시절부터 철저하게 자신과 주변을 통제했는데, 이런 모습을 지켜본 세조가 세자빈을 ‘폭빈’이라 부를 정도였다.

 

인수 대비의 〈어제내훈〉 내지 (출처 포털사이트)
인수 대비의 〈어제내훈〉 내지 (출처 포털사이트)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강직한 성격을 가진 인수 대비의 태도는 부작용을 일으키는데 그 시초가 제헌 왕후 윤씨의 폐위였고, 그 절정이 연산군의 폭정이었다. 성종은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유학을 통한 통치를 확립한 왕으로 꼽히지만 그의 아들이 연산군이라는 점에서 평가 절하된 왕이다. 흔히 폐비 윤씨의 피 묻은 적삼을 보고 연산군이 폭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연산군의 폭정이 시작된 것은 무오사화 이후이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에 일어났는데, 실록에 세조를 비판한 내용을 올린 것이 폭로됨으로 해서 일어났다.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벌인 폭로였지만 이로써 시작된 사화는 대표적으로 4회, 소규모의 사화까지 합치면 6회 이상 일어난다. 또 당파 싸움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사림 세력에게 벼슬을 하는 것이 곧 목숨을 내놓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기도 한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거치면서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게 되는데, 채홍사를 통해서 아름다운 여인들을 궁에 들이고 흥청을 만드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과 폭정을 시작한다.

이때 내명부를 장악하고 있던 건 인수 대비였다. 인수 대비는 연산군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그를 제어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연산군은 인수 대비의 지적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궁중의 최고 어른인 인수 대비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폐비 윤씨의 사연이 연산군 귀에 들어가게 되고, 그와 관련된 성종의 후궁들과 그 소생들을 모두 죽인다. 이 과정에서 인수 대비는 연산군을 말리려 하지만 연산군은 오히려 인수 대비의 얼굴을 자신의 머리로 가격한다. 이 일로 인수 대비는 화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니, 향년 68세였다. 수십 년간 궁의 최고 어른으로서 행실이 좋지 않은 왕비를 내쫓고, 성종의 수많은 후궁과 그 자식들을 통제하며 강력한 권한을 휘두르던 인수 대비지만 끝은 허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정 왕후가 조선 전기 최대 사찰로 만든 회암사에서 제작한 약사여래 삼존도
문정 왕후가 조선 전기 최대 사찰로 만든 회암사에서 제작한 약사여래 삼존도

 

인수 대비가 세상을 떠난 후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통해 폐비 윤씨를 억울하게 폐위시켰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관료를 죽였다. 인수 대비에게 너무 강한 압박을 받아온 탓일까? 연산군의 광기는 인수 대비의 죽음 이후 폭발하듯 터져 나왔고, 결국 중종반정을 통해 폐위된다. 이때 중종의 세 번째 왕비로 들어온 사람이 조선 전기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었던 문정 왕후이다.

문정 왕후는 조선판 철의 여인이라 할 수 있으며, 왕비가 어디까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지 그 한계를 보여준다. 중종은 대군 시절 혼인한 단경 왕후를 평생 잊지 못했기 때문에 문정 왕후는 왕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는 못했다. 또한 왕자를 생산하지 못한 세월이 길었고, 첫 번째 왕비인 단경 왕후 신씨를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가 수시로 올라오고 있는 상황 때문에 문정 왕후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또한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인 장경 왕후가 낳은 인종이 훌륭한 인품을 칭송받으며 자라나고 있었고, 중종의 사랑은 경빈 박씨에게 쏠려 있었다. 문정 왕후는 이때부터 독한 결심을 한다. 자신이 어렵사리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마음을 다진 것이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도 심약한 중종을 꾸짖듯이 다그치던 문정 왕후는 아들이 태어난 이후부터 걸림돌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이때 문정 왕후와 손을 잡은 것이 문정 왕후의 남동생인 윤원형의 첩 정난정이었다. 정난정은 계략이 뛰어난 인물로서 문정 왕후의 욕망을 현실로 실현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정난정이 문정 왕후와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자가 살고 있는 동궁전 앞의 은행나무에 사지와 꼬리, 코가 잘린 채 불에 타 있는 쥐가 발견되는데, 이를 ‘작서의 변’이라 부른다. 작서의 변 사건을 통해 경빈 박씨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문초를 당하다 죽게 된다. 이는 문정 왕후가 경빈 박씨를 범인으로 지목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피의 숙청이었다. 이후 동궁전에 불이 나는 일이 생기는데 이때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는 죽을 위기에 처한다. 기록에는 인종이 스스로 피하려 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세자가 살아남아 결국 인종이 되지만 문정 왕후는 중종을 닮아 심약한 인종을 줄기차게 괴롭혔다. 인종은 왕이 된 지 1년도 안 되어서 죽게 되는데, 문정 왕후가 건넨 닭죽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져 후손도 없이 세상을 떠난다.

이후 문정 왕후의 아들 명종이 왕위에 오르고, 어린 왕을 대신에 섭정을 하게 된 문정 왕후는 ‘양재역 벽서 사건’을 통해 자신을 왕후로 만들어 준 윤임 세력을 제거하고, 동생 윤원형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여 준다. 이른바 최초의 세도 정치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순조 대까지 가장 잘못된 정치 형태로 꼽히며 경계한다. 이때 윤원형이 갈취한 세금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면서 임꺽정의 난으로 대변되는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다. 그러나 문정 왕후는 임꺽정 패거리를 끝끝내 정벌하고 다른 백성들의 반란도 막기 위해 철권 정치를 펼쳤다. 또 승려 보우를 궁에 들여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했으며, 문정 왕후가 보우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를 퍼지게 하는 등 역사의 평가로 보자면 연산군에 대한 평가보다 더 끔찍한 시절을 만들었다.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지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지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다른 맥락으로도 살필 수 있다. 문정 왕후는 전에 없을 만큼 강력한 왕비였고, 유교적 문화 틀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과도하게 나쁜 것으로 묘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의 선비들이 궁에 승려를 들이고 불교를 장려하는 정책을 쓴 문정 왕후를 곱게 보지 않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연산군이 그 수많은 패악질을 했는데도 그의 가장 큰 죄목은 ‘폐모살제(廢母殺弟)’였다. 즉, 유교적 천륜을 어겼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만큼 조선은 유교가 지배하는 세상이었고, 문정 왕후의 숭불 정책은 유학자들에게는 커다란 위기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정 왕후에 대한 기록은 실제보다 더 잔악하고 치졸하게 묘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느 시대나 백성들의 난은 있었지만, 특별히 임꺽정이 역사에 남은 것은 문정 왕후의 섭정 시기 정치를 격하시키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은 꽤 그럴듯한 추리이다. 안타깝지만 이러한 추리는 충분한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증명할 수는 없다. 타임머신이 없는 상황에서 역사는 검증할 수 없고 다만 해석할 뿐이라는 것을 새삼 한 번 떠올리게 된다.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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