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이 말하는 우리 선조들의 일상
‘빛깔’이 말하는 우리 선조들의 일상
  • 정세진 기자
  • 승인 2019.07.24 2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색 美麗 기품' 전시 관람기

 

 

‘오색 美麗 기품’ 전시장 입구
‘오색 美麗 기품’ 전시장 입구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만 해도 매년 설빔을 챙겨 입는 풍경이 흔했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입는 설빔의 저고리는 대부분이 알록달록한 색동이었다. 지금 보면 조금 촌스러워 보이기도 한 색동옷은 자투리 천을 활용한다는 실용적인 목적 외에도 오행 사상을 상징하는 색으로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조금 이른 봄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 어느 주말, 필자는 경기여자고등학교 100주년 기념관 내에 자리 잡은 경운박물관 전시실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오색 美麗 기품’이라는 제목의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전시실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금빛에 가까운 샛노란 색의 황룡포였다. 구한말 고종 황제가 입었던 옷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색 용포가 아닌 노란 황룡포를 고종이 입게 된 이유는 당시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고종 황제가 입은 황룡포
고종 황제가 입은 황룡포

 

고려 시대와 조선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왕들은 황룡포를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와서 명나라를 섬기는 사대 정책을 꾀하게 되자 세종 때부터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과 자색 등의 사용이 금기시됐고, 세종 자신도 붉은색 곤룡포를 입기 시작했다. 그러니 대한 제국 출범과 함께 돌아온 황룡포는 우리나라가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 국가임을 천명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분과 지위에 따라 옷의 색깔이 정해진 것도 세종 대의 일이다. 이전까지는 모든 관리가 짙은 남색이나 검붉은 옷을 입었으나 이때부터는 각 관청의 하급 관리와 지방관, 상공업자, 노비 등 천민은 붉은 옷을 입을 수 없도록 금지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와서는 당상관은 남색 옷, 그 이하는 검은 옷으로 관복이 정해졌다.

 

조선 시대 국왕의 대례복인 면복
조선 시대 국왕의 대례복인 면복

 

황룡포 바로 옆에는 왕과 왕비의 대례복인 면복과 적의가 전시돼 있었다. 왕이 입는 면복은 붉은색이 강조된 반면 적의는 푸른색 바탕으로 되어 있는 점이 신기했다. 붉은색은 여성, 푸른색은 남성이라는 통념과는 반대되는 배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는 남녀가 상징하는 음양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닌지 추측이 든다.

겹겹이 겹쳐 입는 면복은 한 벌씩 따로 모양을 볼 수 있었는데 검은색 옷 위에 녹색 겉옷을 입고 허리에는 앞치마처럼 생긴 붉은 천을 늘어뜨린다. 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얇은 옷감에 놓인 섬세한 자수와 금박이 이 옷 한 벌에 들어간 정성과 노고를 짐작하게 했다. 앞에 구슬을 엮어 늘어뜨린 면류관은 왕의 위엄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왕비의 대례복인 적의
조선 시대 왕비의 대례복인 적의

 

파란색 바탕에 빨간 끝동이 달린 적의는 수십 쌍에 이르는 꿩 문양이 눈길을 끈다. 이 문양은 수를 놓은 것이 아니라 비단을 짤 때 직접 무늬를 넣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 이 적의는 명나라 황후가 입던 옷이라고 하는데,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왕비의 대례복으로 명맥을 이어 왔다.

적의를 입은 왕비의 머리 위에는 십여 개의 비녀를 꽂은 대수가 화려함을 더한다. 왕과 왕비의 대례복 모두 오색 천을 덧대어 만든 후수로 장식돼 있어 오색이 상당히 중요한 상징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적의와 면복 뒤에 늘어뜨렸던 후수
적의와 면복 뒤에 늘어뜨렸던 후수

 

왕실의 화려한 대례복 옆에는 조선 시대 선비들이 입던 검소한 느낌의 옷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두루마기와 전복, 천담복 등의 옷들은 흰색과 검은색을 기본으로 옅은 청색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한때 흰옷 착용을 법으로 금지하자는 논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오행의 원리에 따르면 고려는 중국의 동방이며, 동방은 금목수화토의 ‘목’에 해당하고 ‘목’을 상징하는 색은 청색이다. 그런데 흰색은 ‘금’을 상징하는 색으로 나무를 베는 쇠를 나타내기 때문에 서로 상극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흰색이나 청색과 흰색의 중간색인 옥색 옷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조선 시대 태종이 팔도의 각 군졸의 복색을 푸른 옷으로 정한 이유가 “우리나라는 동방(東方)에 있고 따라서 동방색(東方色)인 청색(靑色)을 숭상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후일 <영조실록> 10권에도 “모든 공경(公卿), 선비, 서민을 막론하고 길복(吉服)으로 푸른 옷을 입도록 하라고 명했다.”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선비가 입던 두루마기
조선 시대 선비가 입던 두루마기

 

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어 온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음양오행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백색은 서쪽에 해당하며 결백과 진실, 삶, 순결 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관혼상제 때 입는 옷이나 예복에 오색을 이용한 것도 각각의 색깔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가령 ‘화’에 해당하는 붉은색은 만물이 무성한 남쪽이며 태양이나 불, 피와 같이 생성과 창조, 정열과 애정, 적극성을 뜻한다. 또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빛깔이다 보니 신부의 혼례복인 활옷에 쓰였다. 대갓집 혼례에서나 입을 수 있었다는 활옷에는 각종 길상문에 연꽃과 새, 그밖에 복을 기원하는 문양들이 가득 수놓아져 있어 화려함을 더한다.

 

궁중 대례복으로 혼례 때도 입었던 원삼
궁중 대례복으로 혼례 때도 입었던 원삼

 

혼례식에 신부가 빨간 연지 곤지를 찍는 이유도 붉은색이 가진 이런 의미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 사람들이 설날 붉은색 봉투에 세뱃돈을 넣어 주고받으며, 붉은색 속옷이 재운을 불러온다고 믿는 것도 오행 사상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검은색은 ‘수’에 해당하는 색으로 북쪽을 나타내며 인간의 지혜를 관장한다. 학문을 탐구하는 선비들의 옷에 검은색 끝동이 달리고 검은색 갓을 쓴 것은 이 때문으로 추측된다. 다만 검은색은 죽음, 혹은 북방의 상징이어서 꺼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어린이들에게 오색 색동저고리를 입히는 것이나 신부의 혼례복 끝단이 오색으로 장식된 것은 복을 기원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오행에 따르면 방향 말고도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다섯 가지로 대표되는데, 이를 한데 모은 오색 의상은 풍족함과 복을 상징하는 것이다. 오행 사상의 흔적은 보자기와 염낭 같은 일상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정월 대보름에 다섯 가지 곡식을 넣은 오곡밥을 먹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린이가 입던 색동두루마기
어린이가 입던 색동두루마기

 

음양오행에서 비롯된 우리 선조들의 색채 감각은 각종 생활용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혼례날 쓰는 베개는 청색 홍색 바탕에 수를 놓아 만들었다. 삼작노리개에 달린 술도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등을 써서 화려함을 돋보이게 했다. 아이들이 신는 타래버선이나 머리에 쓰는 굴레에도 오색을 이용해 색감을 살리는 동시에 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색색 가지 술로 장식된 노리개
색색 가지 술로 장식된 노리개

 

그런데 박물관 해설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처럼 일상에 뿌리내린 오색은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곳을 방문한 한 외국인은 오색 의상과 장신구들을 보고 “눈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화려하지만 요란하지 않다는 의미다.

가만히 보니 새롭게 복원된 전시품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옷이 세월의 손때가 묻고 적당히 바랬다. 특히 궐 안에서 탔다는 가마에 달린 술은 또렷이 구분되는 오색이 아니라 서로 조화되는 듯한 옅은 색이다. 당시 염색 기술로는 지금처럼 선명한 색을 내기 어려웠던 것도 오색을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했을 것이다.

색색 가지 천들은 신부의 혼례복이 되었다가, 다시 아이들의 옷이 되고, 너무 낡아 작아지면 조각보의 재료가 됐다. 복을 기원하는 오색은 이처럼 한국인의 삶 전반에 스며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