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회, 그들은 누구인가?
서북청년회, 그들은 누구인가?
  • 김도윤 기자
  • 승인 2019.07.24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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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에서 ‘우익 단체’라고 하면 늘 거론되는 단체가 있다. 바로 북한에서 내려온 우익 반공 청년들로 구성된 ‘서북청년회’이다. 이들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초기 정권 때 양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살해했으며, 제주도 4·3 사건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들이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를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봤다.

 

서북청년회 옛터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서북청년회 옛터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공공 기관의 손과 발이 된 무소불위

서북청년회는 북한에서 내려온 우익 반공 청년들이 결성한 단체이다. 정식 명칭이 서북청년회이며 서북청년단, 서북청년당으로도 불렸다. 줄여서 서청이라 칭하기도 했다.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미국 정청의 G2보고서에 서북청년회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경찰이나 공무원이 꺼려 하는 각종 폭력적이고 잔혹한 행위들을 맡아서 강행한 인물이 전문 서북청년회 소속”이라고 할 정도로 그들은 경찰이나 공무원들을 대신해서 각종 잔혹 행위를 강행했던 집단이었다.

 

북한의 청년들이 월남했던 이유는?

1945년 8월 24일 평양에서 군정을 실시한 소련은 광복 초기에 만든 건국 준비 위원회를 해체하고 평남임시인민정치위원회를 출범시킨다. 이 모임은 1946년 2월 12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이하 ‘북임위’)로 개편됐다. 북임위에는 반민주주의적 정당 단체의 개인 활동을 금하며 매국노 및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할 것이라는 조항이 나온다. 이 조항에서 비롯된 토지법으로 인해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 지주 계급은 토지를 몰수당하고 재산이 압류됐다. 여기서 지주는 상당수가 친일파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일제에 협력하는 대가로 부를 축적한 것이다. 그런데 친일 분자로 규정된 이들 중에서 처벌을 받은 사람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이 대거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것이다. 논문 <친일파 처리, 그 배제와 수용의 메커니즘>에 따르면 1946년부터 1948년 8월까지 월남한 사람 수는 8만 4,000여 명으로 집계된다고 한다. 이 당시 월남한 반공주의자 청년들이 서북청년회를 조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월남한 사람들 모두가 친일파이자 반공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지식인, 학생부터 친인척을 방문하기 위해 온 사람 등 월남 이유도 다양했다.

 

서북청년회의 탄생 배경

해방 후 한국의 모습은 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조직했으며 그와 관련된 여러 법안을 제정했다. 그 청년 단체는 건준 산하 조직으로 활동했으며 급하게 꾸려진 건준에는 우익과 좌익이 혼재된 상태였다. 도중에 안재홍을 중심으로 우파들이 대거 탈퇴하고 좌파인 박헌영이 기득권을 잡았고 그로 인해 청년 단체도 우익과 좌익으로 양극화됐다. 이에 한국민주당을 조직한 우익 지도자들은 미군정에 의지했으며, 미군정 역시 좌익을 상대할 파트너로 한국민주당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좌익에 대적하면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우익 청년 단체가 필요했다. 월남 청년들은 주로 동향민을 중심으로 청년 단체를 세웠다. 북한 개혁 체제에 피해를 입고 내려온 사람들이 대다수여서 남한에 연고를 둔 청년 단체보다 반공 투쟁에 더욱 격렬히 참여했다. 당시 창립된 청년 단체 중 하나가 ‘평남동지회’였다. 평남동지회는 조선민주당과 서울 광화문 네거리의 동아일보 3층에 있었는데 그곳에 서북청년회의 초대 회장인 선우기성을 비롯한 평안남북도 월남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이후 평남동지회는 평안청년회로 확대 개편됐으며, 선우기성은 당시 평안청년회 부회장이 됐다. 평안청년회는 선우기성이 권유한 대로 오계석이 건넨 자금으로 활동을 시작해 평안도 출신 유지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때부터 좌익 세력 숙청에 나섰다. 1946년 청년 단체를 통합하는 바람이 불어 서북청년회 결성준비위원회가 결성됐고 선우기성이 유력한 위원장 후보로 거론됐다. 같은 해 11월 서울 종로 YMCA 대강당에서 서북청년회가 결성됐다. 서북청년회는 결성 이후 월남 청년들의 수효가 급증하자 대전에 남선파견대총본부를 설치하고 임일을 장으로 임명했다. 이곳 단원들은 대전을 중심으로 좌익 세력을 탄압했고, 이것이 점차 확대돼 전국으로 뻗어 나가 제주도에도 지부를 결성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를 견제하고자 서북청년회의 활동을 지지했다. (출처 위키백과)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를 견제하고자 서북청년회의 활동을 지지했다. (출처 위키백과)

 

서북청년회의 서로 다른 리더

오늘날 서북청년회의 주된 활동은 좌익 척결과 백색 테러를 통한 공포 조성이었다. 그런데 초반 서북청년회는 우리가 잘 아는 그 서북청년회와는 좀 다르다. 물론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은 창립부터 존재했다. 다만 초기와 이후 서북청년회는, 초대 회장이었던 선우기성과 재건된 서북청년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문봉제의 생애와 세력이 달랐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선우기성은 105인 사건과 상해 임시 정부 요원이었던 선우혁과 선우훈의 조카였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광주 학생 운동의 영향을 받아 만세 운동에 가담했으며 체포돼 신의주 지방 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형을 살고 나온 선우기성은 만주로 망명했고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정주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곳에서 반공 투쟁을 벌이다가 신변의 위험을 느껴 월남했다. 월남 이후 평남동지회를 시작으로 평안청년회를 거쳐 서북청년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의 집안은 반(反) 이승만 계열이었으며 자신 역시 김구 지지자였다. 서북청년회는 분열의 시기를 겪는다.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이 청년 단체들을 통합해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자 선우기성은 여기에 합류했다. 이때 선우기성을 지지하던 사람들도 그를 따랐다. 이들의 상당수가 함경도·황해도 출신이었으며 강원도 북부 출신도 일부 포함돼 있었다. 이후 서북청년회는 문봉제가 이끌어 갔다. 이때부터의 서북청년회를 ‘재건서청’이라고 한다. 문봉제는 선우기성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평안남도 개천 출신인 그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 니혼대학교를 졸업하고 조민당 군당 서기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평남동지회의 위원장과 평안청년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서북청년회 창립 당시에는 부위원장으로 선임됐으며 분열된 이후에는 위원장을 맡았다. 후에는 정계에 진출해 내무부 치안국장, 국문회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2004년 사망했다. 창립 초반 김구를 따르던 세력과 이승만을 따르던 세력이 혼재돼 있던 서북청년회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만 남게 됐다. 재건서청은 이승만의 권력을 더욱 공고하기 위해 악행도 서슴지 않았다. 제주도 4·3 사건도 이 과정에 발생했다.

 

서북청년회의 활개 칠 수 있었던 이면

제주도 지역 신문에 따르면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억지로 범하거나 사위가 장모를 겁간하도록 하는 등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야만 행위를 저질렀다. 때로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공비 분자의 가족으로 지목된 양민을 공개 총살하기도 했다. 한 도민은 사무실까지 끌려가 영문도 모른 채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피를 토하고 허리가 휘어져도 매질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서북청년회는 수많은 양민을 공산주의자로 지목했으나 그들 중 정작 공산주의자는 몇 안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지목된 사람 중에 상당수가 무고한 시민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민족주의자, 항일 운동가, 좌익 세력 모두를 몰아세웠다. 죄 없는 시민들을 잡아가 고문하는 것은 물론이요, 가는 곳마다 함부로 양민들을 학살하는 등 여러 방법들이 동원됐다. 서북청년회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 것은 당시 정치 세력과 미군정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치권과 미군정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지역에 서북청년회를 파견하는 등 이들을 적극 활용했다.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도 서북청년회 간부 출신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시절 태극기부대 (출처 위키백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시절 태극기부대 (출처 위키백과)

 

제2, 제3의 서북청년회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어

1948년 12월 대동청년단이 청년 단체와 대한청년회로 통합되면서 재건서청이 사라졌으나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서청은 잠시 부활했다. 하지만 국민 방위군 사건 이후 국민 방위군이 해산되고 대한청년회는 침체됐다. 대통령 선거 이후 내분이 더욱 심해지자 1953년 9월 모든 청년 단체는 해체하여 민병단에 참여하라는 지시에 서북청년회 역시 해체됐다. 하지만 근래 들어 제2의 서북청년회를 자처하는 집단들이 생겨나고 있다. 서북청년회 해체 이후 2014년 이를 재건하겠다는 목표로 서북청년회 재건위원회라는 단체가 등장하면서 사회적 우려를 높이기도 했다. 이 단체는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이 의거’라고 주장하는 글을 극우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에 올려 사회적 비난을 받은 데 이어 서울광장에서 세월호 추모를 위한 노란 리본을 철거하려다가 저지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하는데, 바로 ‘태극기부대’다. 이들은 그 옛날 서북청년회처럼 반공산주의를 주장하며 현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 불어닥친 냉전은 이념 갈등을 더욱 극대화했다. 서북청년회는 그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들이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했음에도 큰 제재가 없었던 것은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과 공공 기관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제주도 4·3 사건이 있던 4월, 이념 갈등으로 목숨을 잃은 제주도민들을 기억하며 제2의 서북청년회와 그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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