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사랑한 과학자, 이순지
왕이 사랑한 과학자, 이순지
  • 이선주 기자
  • 승인 2019.07.24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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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과학의 달이다. 조선 시대 과학이 가장 꽃피었던 시기는 세종 때인데, 아버지 태종이 탄탄히 기틀을 잡아 놓은 터 위에서 아들 세종은 인재 등용을 통해 과학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등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과학 기구가 발명된 것도 이때다. 그리고 이 시대의 과학자라고 하면 흔히 천민 출신이었던 장영실을 떠올린다. 하지만 장영실에 가려진 또 한 명의 과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순지다.

 

이순지 영정 (출처 양성이씨 대종회)
이순지 영정 (출처 양성이씨 대종회)

 

이순지는 누구인가?

이순지(李純之, 1406~1465)는 과학자이자, 천문학자 그리고 수학자로, 경기도 양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성보(誠甫),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그는 장영실과 함께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과학자였지만, 장영실과 출신 배경은 달랐다. 태종과 세종 때의 문관이었던 이맹상(李孟常)의 아들이었던 이순지는 동궁행수(東宮行首)로 있다가 1427년(세종 9)에 문과에 급제하여 서운관 판사, 좌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후 문종 때에는 첨지중추원사, 호조 참의를, 단종 때에는 예조 참판, 호조 참판을 지냈고, 세조 때에는 한성부 윤(현재의 서울특별시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간의. 조선 시대에 천체의 운행과 현상을 관측하던 기구 (출처 Wikimedia Commons, Jocelyndurrey, CC BY-SA 4.0)
간의. 조선 시대에 천체의 운행과 현상을 관측하던 기구 (출처 Wikimedia Commons, Jocelyndurrey, CC BY-SA 4.0)

 

이순지는 문과에 급제한 뒤, 한양의 위도를 묻는 세종의 질문에 “본국(本國)은 북극(北極)에 나온 땅이 38도(度) 강(强)”이라고 자신의 계산 결과를 보고했다. 다시 말해, 한반도의 가운데가 북위 38도라고 말한 것이다. 이순지의 보고를 받은 세종은 이 결과를 크게 신뢰하지 않았으나, 중국에서 들여온 역서(曆書)를 통해 이순지의 계산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이순지는 세종의 눈에 들게 되었고, 세종은 1431년부터 그에게 천문 관측과 역법에 관한 일을 맡겼다. “이순지의 자는 성보이며 경기도 양성 사람이니, 처음에 동궁행수에 보직되었다가 정미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세종은 역상이 정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문신을 가려서 산법을 익히게 했는데, 이순지는 우리나라가 북극에 나온 땅이 38도 강이라고 하니 세종이 그의 말을 의심하였다. 마침내 중국에서 온 자가 역서를 바치고는 말하기를 ‘고려는 북극에 나온 땅이 38도 강입니다.’ 하므로 세종이 기뻐하고 마침내 명하여 이순지에게 천문 기구를 교정하게 했다.”라고 <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어, 이순지와 세종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알게 해 준다.

 

이순지와 천문 기구

삼국 시대부터 우리나라는 중국의 역법을 빌려서 쓰고 있었는데, 고려에 이르러서는 수도를 기준으로 그것을 약간 수정해 사용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한 천체 운동의 계산은 여전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세종은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세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조선 왕조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이기 때문에 왕실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천문 역법을 정비는 필요했다. 이순지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세종의 천문 역법 사업에 이천, 장영실과 함께 참여한다. 이천은 천문 기구 제작을 총괄적으로 지휘한 감독자의 역할을 수행했고, 이순지는 천문 기구 개발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역법을 교정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장영실은 천문 기구를 실질적으로 제작하고 개발하는 일을 담당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간의, 앙부일구, 자격루 등의 개발에 이순지가 많은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세조실록>에는 “지금의 간의(簡儀), 규표(圭表), 태평(太平), 현주(懸珠),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보루각(報漏閣), 흠경각(欽敬閣)은 모두 이순지가 세종의 명을 받아 이룬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앙부일구. 조선 시대에 사용하던 해시계 (출처 Wikimedia Commons, Jocelyndurrey, CC BY-SA 4.0)
앙부일구. 조선 시대에 사용하던 해시계 (출처 Wikimedia Commons, Jocelyndurrey, CC BY-SA 4.0)

 

이순지와 책

이순지의 천문 역법 연구는 <칠정산(七政算)>(1444)이 편찬되면서 가장 크게 빛을 발한다. 칠정산은 ‘일곱 개의 움직이는 별을 계산한다’라는 뜻으로, 해와 달, 오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위치를 계산하여 예보하는 것이다. 1431년 세종은 정흠지, 정초, 정인지 등에게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이순지와 김담에게는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편찬하게 했다. <칠정산내편>은 1281년 원나라에서 만든 수시력(授時曆)을 한양의 위치에 맞게 수정·보완한 것이다. <칠정산외편>은 아랍의 역법을 중국에서 한역해 놓은 회회력(回回曆)을 연구·정리했다. 이 두 책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천문 계산술로 평가된다.

 

〈칠정산외편〉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유남해)
〈칠정산외편〉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유남해)

 

이후 이순지는 1445년(세종 27) 세종의 명을 받아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4권 3책을 완성하기도 했다. 이 책은 천문과 역법, 의상(천문 기구), 구루(해시계와 물시계) 등 여러 천문 기구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모아 정리한 것이다. 이순지는 “여러 전기(傳記)에 섞여 나온 것들을 찾아내어서, 중복된 것은 깎고 긴요한 것을 취하여 부문을 나누어 한데 모아 1질이 되게 만들어서 열람하기에 편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이 책에 의하여 이치를 연구하여 보면 생각보다 얻음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1457년(세조 3)에 김석재와 함께 <교식추보법> 2권 1책을 편찬했다. 이 책은 세종 때에 정리되었던 일월식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세조의 명에 따라,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노랫말로 변환하고 여기에 사용법을 덧붙인 것이다. 시와 노래는 원래 세종이 만든 것인데, 이순지와 김석재는 가사와 시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좀 더 자세하게 덧붙이는 일을 했다. 책은 나중에 천문 분야 관리 채용의 1차 시험(음양과) 교재로 쓰일 정도로 일반화되었다.

 

〈교식추보법〉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유남해)
〈교식추보법〉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유남해)

 

이순지를 향한 세종과 세조의 총애

세종은 유독 이순지를 아꼈는데, 1436년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의 일화를 통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이순지는 당시의 관습대로 3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기간에 이순지는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승정원의 젊은 천문학자인 김담(1416∼1464)을 추천했다. 김담의 당시 나이는 20세였는데, 세종은 어린 김담이 이순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게 미덥지 않았다. 결국 상중인 이순지를 정4품의 자리로 승진시키면서 1년 만에 다시 불러들였는데, 삼년상을 치르지 않고 관직에 있는 건 그 당시에는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1462년(세조 8) 김구석(金龜石)이라는 인물에게 시집을 갔던 이순지의 딸은 일찍이 남편이 죽어 홀로 되었는데, 그녀가 어려서부터 여장을 하고 살아온 노비 사방지(舍方知)와 10년 가까이 내연 관계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대신들은 이순지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할 것을 청했고, 세조는 마지못해 이순지를 파직했다. 하지만 열흘 만에 이순지를 복직시키고, 대신 그에게 사방지를 처결하게끔 했다.

이렇듯 몇 번의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이순지는 세종, 문종, 단종, 세조 때를 거치면서 대체로 평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1465년(세조 11)에 세상을 떠나고, 정평군(靖平君)이란 시호를 받았다. 현재 그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경기문화재자료 제54호)에 위치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이순지의 무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성철)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이순지의 무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성철)

 

<세조실록>은 이순지에 대해 “성품은 정교하며 산학, 천문, 음양, 풍수에 매우 밝았다. 그러나 크게 건명(建明)한 것은 없었다. 정평(靖平)이라 시호(諡號)하니,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드문 것을 정(靖)이라 하고, 모든 일에 임할 때 절제가 있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를 정교한 성품을 바탕으로 공손하고 절제 있는 삶을 산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건명(建明)한 것은 없었다’는 것은 얼핏 보면 부정적 의미로 여겨지지만, 정치적으로 큰 공적을 쌓지는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에, 오히려 과학에만 몰두했던 이순지의 전문성을 부각해 주는 셈이다. 오롯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서, 백성의 삶에 유익한 과학 기구와 서적을 남기고 국왕의 두터운 신망까지 얻었던 과학자 이순지. 그의 발자취가 의미 있게 재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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