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지켜 온 제주인의 터전, 성읍민속마을
전통을 지켜 온 제주인의 터전, 성읍민속마을
  • 이영혜 기자
  • 승인 2019.07.26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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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전통 가옥과 마을의 형태가 복원되어 현재까지 가장 잘 유지되고 있는 곳은 성읍민속마을이다. 성읍마을은 조선 시대인 1410년(태종 10)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된 정의현청이 1423년(세종 5) 옮겨 온 뒤, 500여 년간 현청 소재지였던 유서 깊은 곳이다. 마을 앞 주차장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웅장한 성벽과 그 위에서 펄럭이는 붉은 깃발의 행렬이다. 마치 역사극의 한복판으로 들어온 듯, 성곽으로 둘러싸인 제주의 전통 마을이 골목을 열고 우리를 기다린다.

 

성읍민속마을 전경
성읍민속마을 전경

 

국가 지정 문화재인 600년 전통의 제주 마을

성읍민속마을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민속촌처럼 영화, 드라마 촬영이나 전통문화 체험만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이 아니다. 마을 안 모든 가옥에 실제로 주민들이 사는 생활의 터전이라서 관광을 할 때는 각별한 배려와 주의가 필요하다. 마을에는 몇 채의 체험 가옥을 두어 하룻밤 묵으며 몇백 년 전 이곳에서의 생활을 경험할 수 있다.

 

민박 체험 가옥
민박 체험 가옥

 

관광객들을 위한 전통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는데 제주민요 체험, 전통주인 오메기술과 고소리술 빚기 등을 직접 도전해 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여러 종류의 체험 공방도 있어서 여행지에서의 다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선조들의 살아온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여 보여 주는 민구류 전시, 전통혼례 체험, 천연염색, 귤·녹차 등의 가공법을 배우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오메기술 체험 공방
오메기술 체험 공방

 

평일에 찾은 마을은 고즈넉했다. 윤기 반지르르한 이파리 사이로 동백의 붉고 예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돌담 안에서는 하귤이 노란빛으로 달콤하게 익어 간다. 집들을 구경하며 골목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제주에 유독 흔한 까마귀 소리가 귓가로 섞여든다.

봄날의 훈풍이 머리카락을 스치는 따스한 날, 고요한 뜰 안에서는 어떤 이가 볕 좋은 날을 기다렸다 빨래를 마친 이불을 내다 말리고 있다. 조선의 마당 안 풍경과 다른 것이라고는 이불을 너는 이가 아낙이 아니라 젊은 남자라는 것뿐. 우리에겐 익숙한 이런 모습이 500여 년 전 그날엔 아마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었으리라 생각하니, 세월이 흐름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끝없이 흐르는 유구한 시간을 살며 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인간 사회가 놀랍다.

 

성읍민속마을 골목길
성읍민속마을 골목길

 

돌담 안에서 익어가는 하귤
돌담 안에서 익어가는 하귤

 

세종 대에 성읍으로 이전, 번성했던 정의성

옛 기록을 보면 원래 정의현은 1416년(태종 16) 안무사 오식의 건의에 따라 성산읍 고성리에 축성하였으나, 현청이 중앙에 위치하지 않고 동쪽으로 너무 치우쳐 행정 업무를 보기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태풍의 피해가 잦아 수난을 겪었다. 또한 우도가 가까이 있어 외적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안무사 전관이 건의하여 1423년(세종 5), 당시 진사리(현재의 위치인 표선면 성읍리)로 위치를 옮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진사성’이라고도 불리던 정의성은 축성을 시작한 지 5일 만인 세종 5년 정월 13일에 총 둘레 2986척, 높이 13척의 규모로 완공되었다. 성에는 동서남쪽으로 세 개의 문을 두었고 성 안에는 두 곳의 우물이 있어 식수를 해결했다.

 

근민헌 안내판
근민헌 안내판

 

1702년(숙종 28) 이형상 목사가 그린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정의현은 민가가 1436호, 전답이 140결, 성 수비군이 664명, 말 1178필, 흑우 228수를 보유할 정도로 상당히 번성한 읍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423년 이후 약 5세기 동안 정의현의 도읍지로 번성하였던 성읍은 제주의 촌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이던 1915년 5월 1일 제주군제가 폐지되고 도제가 실시되면서, 정의고을이었던 성읍은 표선면 면 소재지로 전락하였다.(지금의 표선면은 1935년 동중면이 개칭된 이름임)

그 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읍마을의 역사적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비로소 문화재로서 보호해야 마땅하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를 계기로 제주도 지정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고, 1984년 6월에는 1425필지, 319만 1711㎡의 면적이 중요 민속자료 188호 국가지정 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이후 1987년 9월에는 보호 구역이 국가 지정 문화재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의현감이 사무를 보던 근민헌(현재의 군청 청사)
정의현감이 사무를 보던 근민헌(현재의 군청 청사)

 

성읍마을에서 본 제주인의 옛 신앙과 풍속

제주에서는 전통적으로 본향당을 중심으로 무속 신앙이 발달해 있다. 성읍마을 역시 당 신앙을 중심에 두고 유교식 의례인 포제가 이어져 왔다. 제주도의 무속 신앙은 3개의 현을 둔 체제가 오랫동안 지속된 영향으로 제주(濟州), 대정(大靜), 정의(旌義)권이 각각 다른 특징을 지닌다.

제주에도 과거에는 다양한 의례가 전승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유교의 전통을 따르는 마을제인 ‘포제’가 대표적이다. 이곳 성읍마을에서도 오랫동안 포제를 지내 왔다. 포제는 제주의 어느 마을이나 대개 비슷하여 특성을 찾기는 어렵다. 제석제(帝釋祭)가 오래도록 잘 전승되다가 1920년 즈음 중단되었으며, 현재는 ‘제석동산’이라는 지명만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성읍1리와 2리에서는 각각 포제를 지내고 있으며, 조선 중엽까지는 마을 외곽에 절이 많았다고 하나 목사 이형상이 신당과 사원을 없애는 정책을 써서 대부분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영주산 동쪽과 서쪽에 절터의 흔적이 있으며 ‘정수암(정소암)’이 가장 유명한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성읍마을에서 지내 오던 세시 풍속을 살펴볼 때 특이한 점이 하나 눈에 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정부에서는 구정과 신정으로 설을 두 번 지내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하여 전통의 설을 없애고 신정을 지내도록 강제하였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성읍마을만은 끝까지 음력설을 고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설은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로서, ‘신일(愼日)’이라고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부터 양력 1월 1일을 명절로 정하고 음력설을 없애려 했던 것. 하지만 유독 전통을 아끼고 지키려는 마음이 강했던 성읍마을 주민들은 신정을 ‘일본 멩질(‘일본 명절’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라 부르며 이를 무시하였다. 해방 후 정부의 방침에 따라 양력설을 권장하고, 특히 공무원들은 음력설(구정)에 반드시 정상 출근하도록 하는 등 불이익을 주었지만 이들은 전통을 버리지 않았다. 이처럼 꿋꿋이 음력설을 지켜 온 것은 성읍마을의 구성원으로 살았던 선조들의 전통과 고유 명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민족의 2대 명절 중 하나인 추석은 음력 8월 보름날을 기리는 명절로 제주에서는 ‘8월 멩질’로 부른다. 농사일을 모두 마치고 수확을 앞둔 시기에 풍년을 기원하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며, 이웃과 따스한 정을 나누는 세시 풍속이다.

음력 5월 5일에는 모두 잘 아는 ‘단오’라는 명절이 있는데, 성읍마을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그네뛰기를 하였다. 느티나무 서쪽으로 뻗은 가지에 그넷줄을 묶고, 발판에 거리가 표시된 노끈을 달아 더 높이, 더 멀리 그네를 뛴 사람에게는 상품을 주곤 했단다. 이 전통 행사는 느티나무 밑에 돌로 쌓은 루(광장)가 도로 확장과 성읍초등학교 교실 신축 등으로 매우 좁아져 안전 문제가 생기고, 보리 베기 농번기와 시기가 겹치면서 1960년대 들어 사라졌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성읍마을을 지키는 보호수
성읍마을을 지키는 보호수

 

제주의 특별한 풍습, 신구간을 지키는 마을

우리나라 전통의 24절기 중 대한(大寒)이 지난 5일 뒤부터 입춘(立春) 3일 전까지 약 일주일 동안을 제주에서는 ‘신구간’이라고 부른다. 지상에 내려와 인간사의 여러 가지를 관여하던 신(神)들이 한 해의 임무를 마치고 새해 업무를 보고하기 위해 하늘의 옥황상제에게 돌아간다는 제주도 토속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신구간에는 인간들에게 간혹 해코지했던 토속신들이 지상에 없기 때문에 이사하기 좋은 날(육지에서 말하는 ‘손 없는 날’)이라고 믿었다.

이사할 계획이 있는 주민들은 반드시 신구간에 이사하여 이맘때면 이삿짐을 나르느라 분주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여전히 신구간에 이사하는 것을 당연시했지만, 외지인의 이주가 많이 늘어나면서 요즘은 이 같은 이사 풍습이 사라져 가고 있다. 신구간에 할 수 있는 일로는 이사와 집수리, 화장실이나 외양간 고치기 등 평소에 힘이 들어 미루었던 일들을 이때 주로 한다.

 

정의읍성 성벽 위의 붉은 깃발
정의읍성 성벽 위의 붉은 깃발

 

신석기 시대에서 현대를 아우르는 마을의 역사

제주에서는 최근에 대규모 개발 사업이 많이 진행되면서 유적이 발굴되는 일이 종종 있다. 성읍마을에서도 마찬가지로 특히 신석기 시대의 생활 유적이 많이 출토되어, 선사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가 수집되고 있다.

제주도의 신석기 시대 관련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67년 오라1동 한천변 일대에서 수습된 빗살무늬 토기 자료의 보고를 시작으로, 현재 100여 개소에서 확인·조사되었다. 제주도에서 발굴된 선사 시대 유적의 대부분은 식수를 얻기 어려운 화산섬이라는 조건 때문에 주로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각종 도로공사와 토지 개발이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중산간의 하천변에서 선사 시대 유물과 유적의 발견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곳 성읍리에서 조사된 유적도 마찬가지로 중산간을 중심으로 생활했던 선사 시대의 생활 영역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역사 유적을 보면 당시 성읍마을에서 일어났던 일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마을에 있었던 역사 유적으로는 동중면사무소 터, 정의공립보통학교 터, 조선야소교장로회 성읍리교회, 정의우편소 등이 있다. 4·3 관련 유적으로는 성읍지서와 성읍초등학교가 있다. 성읍지서에는 평소 3명 정도의 경찰이 근무하다 무장대에 대한 토벌이 강화될 즈음에는 10여 명이 근무했다고 한다.

‘애향용사순직비(愛鄕勇士殉職碑)’는 성읍리 1024번지에 있는데, 성읍초등학교 입구 ‘굴멍엣동산’에 6·25에 참전, 순직한 장병들을 기리는 충혼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당시 성읍국민학교는 성읍리 1002번지에 있었으며, 1949년 1월 13일 무장대의 습격으로 전소되었다고 한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긴 역사를 가진 마을에는 살아온 흔적이 땅과 나무, 풀포기, 집과 오래된 건축물에 스며들어 독특한 역사의 냄새를 발산한다. 성읍민속마을 역시 흔한 제주의 마을이라고 치부하기엔 아쉬운 오랜 역사의 향기가 느껴졌다. 마을 한가운데 높디높은 나무 위에 앉아 우짖는 까마귀의 울음소리마저 먼 옛날 조선의 어느 한낮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성벽 위를 펄럭이는 붉은 깃발은, 멀고 먼 선사 시대부터 이곳에 살았던 이들의 뜨거운 숨결을 품고 마을의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마을 혼의 상징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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