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문화유산 기행 3] 백제 예술 공예의 극치, 백제 금동 대향로
[백제 문화유산 기행 3] 백제 예술 공예의 극치, 백제 금동 대향로
  • 송영대 기자
  • 승인 2019.08.0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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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의 어느 날, 백제의 조정에는 급보가 빗발쳤다. 상상도 못하였던 소식들이 연이어 들려왔다. 동쪽에서는 신라의 5만 대군이 몰려들고, 서쪽에서는 당나라의 13만 대군이 수많은 함선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백제의 왕과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소문이 퍼져 나갔다. 백제의 조정에서는 매일같이 회의가 열렸으며,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황산벌로 그리고 기벌포로 군대를 내보냈다.

 

백제 금동 대향로의 정면
백제 금동 대향로의 정면

 

온갖 흉흉한 소식은 능사에도 전해졌다. 능사는 사비로 천도한 이후 역대 백제 왕들의 명복을 빌었던 사찰이었다. 이곳의 승려들과 공인들은 평소처럼 행동하고 생활하였지만, 마음 한편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기벌포의 백제군이 패배하였다는 소식이 들렸다. 뒤이어 모든 백제인들이 믿고 의지하였던 계백 장군이 황산벌에서 5천 결사대와 함께 전사하였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패배의 소식과 함께 백제인들은 아비규환에 빠졌다. 모두들 짐을 챙겨 나성 안으로 들어와서 방비하였다. 이는 능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능사에는 역대 백제 왕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수많은 기물이 있었다. 적군이 몰려오자 승려와 공인들은 큰 갈등에 빠졌다. 선왕들의 제사를 위해 공들여 만들었던 기물들을 허무하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나성 안으로 기물을 모두 옮긴다고 하더라도 약탈을 피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능산리사지에 있는 백제 금동 대향로 출토 당시의 모습
능산리사지에 있는 백제 금동 대향로 출토 당시의 모습

 

고민을 거듭하던 승려와 공인들은 능사 금당 오른편에 있는 공방의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질퍽거리는 진흙이 나올 때까지 구덩이를 팠다. 그들은 구덩이에 가장 중요한 보물을 넣기로 하였다. 그 보물이 바로 백제 금동 대향로였다.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법당에 놓았던 백제 금동 대향로를 분리하여 구덩이에 넣었다. 그 위로는 진흙과 기와를 덮었다. 기와 위로 다시 건물 바닥을 다졌으며, 바닥 위로 가구를 옮겨 놓았다. 자신들 외에 아무도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승려와 공인들은 공방을 빠져나오며 결심하였다. 당나라군과 신라군을 몰아낸 다음, 반드시 금동 대향로를 다시 꺼내 선왕들을 위하여 향을 피우겠노라고. 그렇지만 이들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이미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몰려들어 왔고, 능사 중심의 목탑에 불길이 타올랐다. 그리고 승려와 공인들의 목과 등에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이렇게 백제 금동 대향로의 행방은 신라와 당나라는 물론 백제인 모두에게 잊히게 되었다.

백제 금동 대향로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난 지 1333년이 지난 1993년 12월 12일이었다.

 

국립부여박물관의 백제 금동 대향로 전시실
국립부여박물관의 백제 금동 대향로 전시실

 

백제 최고의 보물, 백제 금동 대향로

백제 금동 대향로는 백제의 모든 유물 중에서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진 최고의 보물이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나성 성벽 사이에 위치한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되었다. 수혈 즉 구덩이 속에 진공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으며, 그 보존 상태는 놀라울 정도로 양호하였다. 1993년에 유물을 발견한 고고학자들은 그 자태에 모두 깜짝 놀랐다. 이들은 무령왕릉 발굴의 실패를 상기하면서 최대한 조심히 발굴에 임하였다. 결국 완전한 상태로 유물을 발굴하게 되었다. 각 신문에 백제 금동 대향로 발굴 소식이 대서특필되었다. 그 결과 1996년 5월 30일에 국보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백제 금동 대향로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상설 전시실의 제2관 ‘사비 백제와 백제 금동 대향로’ 전시실에 들어가면 제일 안쪽에 백제 금동 대향로만을 전시한 공간이 있다. 다른 전시 공간보다 비교적 조명을 매우 어둡게 하여, 오로지 금동 대향로만 집중하여 볼 수 있게 하였다.

 

백제 금동 대향로의 측면
백제 금동 대향로의 측면

 

백제 금동 대향로는 크게 뚜껑, 몸체, 받침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모두 정교하게 조각되어 만들어졌으며, 백제의 사상과 예술이 모두 반영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허리가 잘록한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습이다. 둥그스름한 받침은 향로를 안정적으로 받치며, 그 위에 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계란과도 같은 타원형의 향로 몸체가 줄기를 따라 올라가며, 개화 직전의 모습으로 살짝 꽃잎이 벌어진 채 오므라들었다. 그 위에는 자그마한 새가 한 마리 올라와 있어서 정점을 찍는다.

다시 백제 금동 대향로를 살펴보자. 백제 금동 대향로에는 3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받침은 수중 세계로 용이 자리하고 있다. 그 위의 연꽃잎 위로 봉래산이 피어올라 있다. 지상 세계이자 신선의 세계이다. 다시 꼭대기에는 봉황 1마리가 자리한다. 즉 천상 세계를 의미한다. 수중, 지상, 천상이라는 3개의 세계가 각자의 모습을 간직하면서 존재하고 있다.

 

백제 금동 대향로의 받침에 있는 용의 모양새. 앞 발을 치켜들고 있다.
백제 금동 대향로의 받침에 있는 용의 모양새. 앞 발을 치켜들고 있다.

 

백제 금동 대향로 안에 펼쳐진 세계

백제 금동 대향로의 가장 윗부분에는 봉황 1마리가 자리하고 있다. 둥글넓적한 알처럼 생긴 물체 위에 봉황이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다. 양쪽으로 날개를 활짝 펼쳤으며 날개보다 훨씬 긴 꼬리가 S자형으로 휘날린다. 봉황은 머리를 살짝 숙였는데, 턱과 윗가슴 사이에 작은 여의주가 끼워져 있다. 머리 위에 달린 벼슬과 꼬리를 함께 보면 마치 긴꼬리닭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백제 금동 대향로 윗부분의 봉황
백제 금동 대향로 윗부분의 봉황

 

향로의 뚜껑은 봉래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피어나기 직전 연꽃의 윗부분을 연상시키기도 하며,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꽃 같기도 하다. 꽃잎과도 같은 얇은 산봉우리 혹은 그 사이사이마다 다양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5명의 악사가 서로 다른 악기를 들고 연주하고 있으며, 낚시하거나 지팡이를 짚거나 말이나 코끼리를 탄 사람도 표현되었다. 상상의 동물 즉 사람의 얼굴을 한 동물이나 새도 보여, 백제인들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엿보게 해 준다. 호랑이, 원숭이, 사자, 멧돼지, 사슴, 새, 독수리와 같은 동물도 새겨졌으며, 나무나 바위와 같은 풍경도 함께 조각되었다.

뚜껑과 받침 사이는 긴 줄로 구분되어 있다. 중간 부분을 열면 향로의 안쪽을 살필 수 있다. 뚜껑에는 구멍이 안쪽으로 5개, 바깥쪽으로 5개가 뚫려 총 10개가 확인된다. 받침에 향을 올려놓고 이를 태우면 은은한 연기가 피어난다. 그 모습은 마치 비가 내린 다음날 산에 운무가 피어오르는 모습이리라. 백제인은 향로를 보며 경탄하면서 제사를 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향로 윗부분의 세부 모습
향로 윗부분의 세부 모습

 

백제 금동 대향로의 세계는 다시 아래로 이어진다. 뚜껑 아래의 받침은 전체적으로 반으로 나뉜 공처럼 생겼다. 둥그스름한 공에 피어나기 직전의 연꽃 잎사귀가 둘러진 모습으로, 뚜껑과 마찬가지로 꽃잎이 살짝 바깥으로 나와 있다. 각 꽃잎 혹은 꽃잎의 사이사이마다 조각이 하나씩 새겨졌다.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동물들 즉 악어, 황새, 물고기, 날개 달린 짐승, 물고기 등이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악어나 물고기와 같은 존재는 뚜껑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인데, 이는 수중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처럼 생각된다. 물 위에 피어난 연꽃처럼 물 밖으로 드러난 부분과 함께 물 안에 잠겨 있는 부분이 공존하는 셈이다.

향로의 받침에는 수중 세계를 대표하는 용이 표현되었다. 용은 위를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받침을 지탱하는 모습이다. 뿔은 세밀하고 유려하게 만들어졌으며, 몸체와 저부 사이에는 앞발 하나를 들추어 놓았다. 최대한 꺾은 앞발의 모습은 마치 작은 용이 공존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다른 세 발은 용의 몸통과 함께 저부 전체로 뻗어 나갔다. 앞발과 뒷발, 몸통 사이사이에는 조각한 파도와 꽃을 연결하여 안정감을 더하였다.

 

백제 금동 대향로의 받침 부분
백제 금동 대향로의 받침 부분

 

백제의 예술이 집약된 백제 금동 대향로

백제 금동 대향로는 백제 예술의 극치이다. 그 예술적 수준이 너무나도 뛰어나서 과연 백제의 유물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되었다. 백제 금동 대향로는 이른바 박산향로라는 유물의 형태를 하고 있다. 박산향로는 중국 한나라 때 유행하여 제작되었던 향로였다. 하나의 다리로 된 받침 위에 산의 모양으로 된 향로를 올린 형태가 기본이 된다. 이러한 형태의 유물은 중국에서 자주 발견되는 데에 반해, 백제는 물론 삼국에서는 백제 금동 대향로의 발견 이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발견되지 못하였다. 오직 낙랑 고분으로 알려진 평양 석암리 9호분과 219호분의 출토품만 전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백제 금동 대향로는 발견 직후부터 그 국적이 의심된 것이다.

 

부여군 규암면 외리 출토 산수봉황무늬 전돌
부여군 규암면 외리 출토 산수봉황무늬 전돌

 

다만 백제 금동 대향로의 요소가 백제의 여러 유물 곳곳에서 확인된다는 견해도 있다. 꼭대기에 있는 봉황, 받침에 있는 용, 몸체에 있는 산의 모습과 연꽃 문양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유물은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서 출토된 산수봉황무늬 전돌이다. 외리의 옛 절터에서 1937년에 8종의 전돌이 출토되었으며, 이들은 보물 제343호로 지정되었다. 이 중에서도 산수봉황무늬 전돌은 다양한 문양이 공존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이 유물의 중앙에는 여러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 자리한다. 안쪽에 있는 각 봉우리마다 나무가 세워져 있고, 산의 양편에는 기암괴석이 있다. 산의 위쪽으로는 구름이 마치 용처럼 새겨졌다. 눈길을 끄는 것은 산꼭대기에 있는 새의 형상이다. 두 다리를 딛고 타오르는 듯한 날개를 치켜든 모양새인데, 봉황의 존재로 생각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백제 금동 대향로의 상단 부분, 즉 몸통 윗부분과 꼭대기 부분을 평면으로 옮겨 놓은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유물의 존재는 백제 금동 대향로에 보이는 세계관이 단지 향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제인들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음을 알려 준다.

 

무령왕릉 출토 동탁 은잔
무령왕릉 출토 동탁 은잔

 

아울러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 은잔의 존재와도 서로 비교된다. 동탁 은잔은 받침은 구리, 잔은 은으로 구성된 유물이다. 전반적인 구성이 박산향로와 유사하다고 평가된다. 여기에서도 은잔의 아랫부분에 연꽃이 새겨졌으며, 은잔 윗부분에는 산봉우리가 네 곳에 걸쳐 솟아 있다. 은잔 아랫부분에는 기다란 용이 전체를 휘감고 있으며, 은잔 윗부분은 산 사이에 새와 용이 날고 있는 모습이다.

백제 금동 대향로에서는 백제의 도교 사상과 불교 사상이 함께 나타난다. 이 유물이 출토된 능산리사지 즉 능사는 백제 사비기 역대 왕들의 옆에 조성되었다. 이러한 사찰을 원찰이라고 부르며, 죽은 왕과 왕족의 명복을 기원하는 역할을 한다. 제사를 지낼 때는 향로에 향을 피워 올리는데 이 향로는 특히 가장 고급의 유물에 해당하며, 이에 왕들을 위해 사용되던 기물로 생각되는 것이다.

백제 금동 대향로는 백제의 정신과 의지가 모두 반영되었던 유물로, 백제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향로를 만들었던 공인, 그리고 제사를 올리던 승려들은 이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단코 외세의 손에 이 향로는 내어 줄 수 없었다. 때문에 언젠가 다시 이곳에 돌아왔을 때, 즉 백제가 힘을 회복하고 신라와 당나라를 물리쳤을 때 다시 구덩이에서 꺼내 향을 피우고자 하였을 것이다. 백제인들의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오늘날 향로는 다시 잠에서 깨어나 백제가 어떤 나라였는지 그 자태를 바탕으로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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