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문 들여다보기 4]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성문, 창의문
[사소문 들여다보기 4]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성문, 창의문
  • 이선주 기자
  • 승인 2019.08.01 18: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의문 전경
창의문 전경

 

‘사소문 들여다보기’의 마지막 시간이다. 혜화문, 소의문, 광희문에 이어 끝으로 살펴볼 성문은 바로 창의문이다. 창의문은 사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문으로, 2015년 12월 2일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될 만큼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창의문의 역사는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고 하는데, 창의문에 담긴 이야기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창의문보다는 자하문?

창의문(彰義門)은 한양도성의 서북쪽에 세워진 소문(小門)으로서, 다른 성문들과 마찬가지로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창의문이라는 이름은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부터 사람들은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을 더 많이 사용해 오고 있다. 창의문을 가리켜 간간이 북소문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이것은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고, 조선 시대에는 북소문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다. 예부터 창의문을 자하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일대의 마을 이름과 관련이 있다.

창의문 부근은 골이 깊었으며 수석이 맑고 아름다웠는데 이 모습이 마치 개성의 자하동(紫霞洞)과 유사하다고 하여 이곳 역시 자하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마을 이름이 자하동이다 보니 이 마을에 들어선 성문도 자연스럽게 자하문으로 불리게 됐다. 현재도 자하라는 용어를 창의문 주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창의문 바깥쪽에 위치한 터널의 이름은 자하문터널이며, 이 터널이 있는 도로 이름 또한 자하문로이다. 그런데 그 근방으로 창의문로라는 이름의 또 다른 도로도 있다. 창의문과 자하문은 동일한 문을 가리키는 명칭인데 창의문로와 자하문로는 각각 다른 도로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로니컬하다.

 

창의문과 자하문은 같은 문이지만, 창의문로와 자하문로는 다른 도로이다.
창의문과 자하문은 같은 문이지만, 창의문로와 자하문로는 다른 도로이다.

 

창의문과 자하문은 같은 문이지만, 창의문로와 자하문로는 다른 도로이다.
창의문과 자하문은 같은 문이지만, 창의문로와 자하문로는 다른 도로이다.

랜 폐쇄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창의문은 건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폐쇄된 비운의 문이기도 하다. 1413년(태종 13) 풍수학자였던 최양선(崔揚善)은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건의하였다. 태종은 최양선의 건의를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일대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했다. 그러나 1422년(세종 4)에는 군인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했고, 1617년(광해군 9)에는 궁궐 보수 작업 때 석재의 운반을 위하여 열어 주도록 했다는 기록을 보면 상황에 따라 임시적으로 문을 개방하기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4년경의 창의문 (출처 한양도성박물관)
1904년경의 창의문 (출처 한양도성박물관)

 

창의문에 관한 역사적 사실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조반정은 1623년(광해군 15)에 이귀, 김유 등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파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인 인조를 즉위시킨 정변이다. 반정군은 홍제원에 집결하여 창의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진입한 후 창덕궁을 점령했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났으나 곧 체포되어서 강화로 귀양을 가게 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후 1741년(영조 17) 당시 훈련대장(訓鍊大將, 조선 시대 군영이었던 훈련도감의 으뜸 벼슬)이었던 구성임(具星任)이 “창의문은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하면 좋을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영조는 이 건의를 받아들였고, 이때야 비로소 창의문의 문루가 세워지게 됐다. 일제 강점기 때 혜화문, 소의문, 광희문이 도로 확장 계획과 유지 비용 등의 문제로 훼손·철거됐음에도 불구하고, 창의문은 산속 외진 곳에 위치했기 때문인지 이 같은 수난을 면할 수 있었다.

 

창의문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생포된 무장 공비 김신조 (출처 한양도성박물관)
창의문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생포된 무장 공비 김신조 (출처 한양도성박물관)

 

동아일보 1928년 7월 12일 자에는 “경성성벽 구문 중에는 동북간 문인 동소문과 동남간에 있는 부정문이라고 하는 광희문은 퇴락하여 위험하기 짝이 없으며 또한 보관을 소홀히 하여 걸인의 숙박처가 되어 위생상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중략) 창의문마저 헐어 버리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아직 그럴 필요가 없다 하여 그것만은 고적보존회에서 관리하기로 되었다더라.”라는 내용의 기사가 있다.

창의문은 이렇게 철거의 위기를 버텨 냈으나, 참혹한 사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31명의 무장 공비가 창의문을 통해 청와대에 침투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 검문을 받고 정체가 탄로 나자 창의문 일대에서 총격전을 일으킨 것이다.

우리 군과 경찰은 현장으로 출동해 29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다. 나머지 1명은 다시 북한으로 도주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종로경찰서장 총경 최규식(崔圭植)이 순직하고, 많은 시민이 살상되기까지 했으니,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닭 대신 봉황?

창의문의 구조를 한번 살펴보자. 창의문의 육축은 높이 5.8m, 폭 8.6m의 규모이다. 단층 목조 문루의 높이는 6.2m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 형태이다. 성문의 천장에는 닭을 닮은 봉황이 그려져 있다. 창의문 일대의 지형이 지네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네의 독기를 누를 만한 동물을 그려 넣고자 한 것이다. 사실 지네의 천적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닭을 꼽을 수 있는데, 도성의 성문에 닭을 그리기에는 격에 맞지 않았기에 닭을 닮은 봉황을 그려 넣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창의문 천장의 봉황 그림
창의문 천장의 봉황 그림

 

수려한 풍경의 창의문 밖

예부터 창의문 밖의 종로구 구기동, 신영동, 부암동, 평창동, 홍지동을 한데 아울러 자문 밖이라고 불러왔다. 아마도 자하문 밖을 줄여서 이렇게 부른 것으로 보인다. 자문 밖은 북한산, 인왕산, 북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수려한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이곳에 아름다운 별장이 많이 지어졌다. 지금도 박물관, 미술관, 문학관 같은 문화 시설이 모여 있으며,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자문 밖 명소 중 대표적인 곳으로 석파정과 세검정을 꼽을 수 있다. 석파정은 1974년에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된 누정으로, 조선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金興根)이 지은 별서를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뒤 별장으로 사용한 곳이다.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에게 이곳을 자신에게 팔기를 청했으나 김흥근은 처음에는 거절을 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과 함께 이곳에 묵었고, 결국 김흥근이 “임금이 묵고 가신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다”고 하면서 헌납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세검정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된 정자인데, 이 정자를 중심으로 한 마을 일대를 부르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세검정 부근은 연산군이 수각(水閣, 물 위에 지은 정자)을 짓고 놀았을 정도로 예부터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원래의 세검정 정자는 1941년 화재로 타 버렸으나,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창의문을 둘러보면서, 이러한 주변의 고풍 있는 명소들을 함께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찾아가는 길

창의문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8(청운동)

석파정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길 4-1(부암동)

세검정 터 서울 종로구 세검정로 244(신영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