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영령(護國英靈)들이 잠든 임란 창의(倡義) 공원
호국 영령(護國英靈)들이 잠든 임란 창의(倡義) 공원
  • 박기상 기자
  • 승인 2019.08.0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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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하에 무서울 게 없다. 천 번을 넘어지면 만 번을 일어선다.”

- 윤 희 순 <안사람 의병가> 중에서 -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위해 바치는 목숨이란 정말로 고귀한 희생이다. 죽음이라면 이보다 더 장렬한 죽음은 없을 것이다. 국가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데 오로지 구국 일념(救國 一念)에 타올라 스스로의 존재를 초개(草芥)같이 조국 강산에 던질 자가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그때마다 의연하게 일어서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숨져 간 영웅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순국선열(殉國先烈)이요, 호국 영령(護國 英靈)이라 부른다.

 

임란 창의 공원 표지석
임란 창의 공원 표지석

 

경주는 창의(倡義)의 진원지요 회맹(會盟)의 시발지였다

임란 창의 공원은 경주시 황성공원 남쪽 입구 언저리에 있는 작은 공원이다. 공원 입구에 ‘임란 창의 공원’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놓여 있다. 입구에 ‘동도객관벽상기(東都客館壁上記)’와 ‘경주임란의사추모탑 건립문’ 표지석이 양쪽으로 서 있다. 안쪽으로 약 20m쯤 들어가면 주탑(主塔)인 ‘경주임란의사추모탑’이 세워져 있다. 주탑 옆으로 ‘임란순국의사위령비’, ‘경주임란의사창의비’, ‘문천회맹기념비’가 나란히 있다.

 

경주임란의사추모탑
경주임란의사추모탑

 

임란순국의사위령비
임란순국의사위령비

 

공원 안에 들어서면 창의군들이 산천을 누비면서 지르는 함성이 들리는 것 같다. 얼마나 숭고한 희생인가? 그들의 위대한 희생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우리가 존재 할 수 있었을까? 그렇기에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공원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훌륭한 교육의 현장이다. 바로 옆쪽에 축구 공원이 크게 조성되어 있다. 그곳에 비하면 이곳이 너무 작아 보인다. 아무리 화려한 시설을 갖춰도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견줄 수 있겠는가? 주변에 나무도 많이 심고 정성을 다했으면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가장 먼저 의병을 거병한 곳은 영남 지역이었다. 이곳 경주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향토를 수호하기 위하여 창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의사들이 분연히 일어났던 곳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문천회맹(蚊川會盟)이 군민 합동 작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문천(蚊川)은 반월성(半月城)을 끼고 도는 경주의 남천(南川)을 말한다. 조선 선조 25년 4월 14일 왜(倭)는 20여 만의 대병을 동원하여 이 땅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조선 왕조는 건국 이래 유학에 바탕을 둔 도덕 정치를 표방하고 학문과 예의를 숭상하며 200년 동안 별다른 외세의 침범 없이 태평성대에 젖어 있었다. 그렇기에 왜병 침공에 변변한 방어책 한번 세워 보지 못하고 관군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문천회맹기념비
문천회맹기념비

 

부산진에 상륙한 적은 일거에 동래성을 함락하고 진주성으로 진입하니 이때 경주 부윤 윤인함(尹仁涵)은 포망장(捕亡將)으로 성 외에 나가 있었고 판관 박의장이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왜병과 싸웠다. 하지만 경주성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경주에 주둔한 잔당들이 약탈, 살상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분기에 찬 의사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충의의 일념으로 결사 항쟁에 나섰다. 그리고 관군과 함께 협력 작전을 펴기로 하고 타지방 의사들과도 함께하기로 한다.

6월 9일 이른 아침 반월성 문천가에서 경주성 관하 12읍 130명의 의사가 모여 부윤, 판관과 함께 일사보국(一死報國)의 결의를 다짐하였다. 이들은 문천회맹(蚊川會盟) 이후 전국 각지에서 창의한 의사들과 더불어 험난한 전진(戰陣)을 누비며 모든 대열의 선봉에서 싸웠다.

 

드디어 경주성을 수복하였다

의병들은 동해안을 비롯하여 경주 주변에 수시로 침투하는 적을 방어하며 그해 7월 27일에 있었던 영천성 복성전에도 참가하여 그곳 의사들과 합세하여 성을 회복하였다. 8월 21일 경주성 탈환을 위한 서천 대전(西川 大戰)을 치렀다. 의병장들의 활약으로 드디어 9월 8일 경주성을 수복하였다. 또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남하하던 적이 다시 경주성을 점령하고 울산으로 내려가 도산(島山)에 둔거하였다. 의사들은 이를 추적하여 조명 연합군과 함께 혈전을 벌였다. 그리하여 적이 물러날 때까지 무려 7년 동안 가족의 안전과 신변의 보장을 돌보지 아니하고 국가와 향토를 위하여 끝까지 항쟁했다.

마침내 왜병이 철수하고 전란이 끝나자 다음 해 12월 27일 왕은 어사 이상신과 순찰사 한준겸을 보내 경주 의사 215인과 울산 의사 165인을 경주 객사에 모아 놓고 선유문과 제주를 내려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모든 의사들이 이에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후 의사들은 공적에 따라 공신이 되기도 하고, 직품을 받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일체의 논공행상에 괘념치 아니하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며 한가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경주읍지(慶州邑誌)〉와〈동경속지(東京續誌)〉등에 자세히 기록이 남아 있다.

 

동도객관벽상기(東都客館壁上記)
동도객관벽상기(東都客館壁上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이야기는 경주 부윤 윤인함(尹仁涵)이 작성한 동도객관벽상기(東都客館壁上記)에도 잘 나타나 있다. 어떻든 우리 경주는 창의의 진원지요 회맹의 시발지였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잊고 사는 것 같다. 따라서 여기 그 사실과 사적을 소명하게 밝혀 청소년들이 이러한 충의 정신을 본받고 계승하여 장차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리고 임란 창의 공원에서 황성공원 안쪽으로 약 100m 거리에 박무의공비(朴武毅公碑)가 있다. 박무의공의 이름은 박의장(朴毅長)이다. 임진왜란 때 경주부 판관으로 왜적에게 빼앗겼던 경주성을 탈환할 때 이장손이 만들었다는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하여 큰 공을 세웠다. 7년 동안이나 경주에서 왜적의 공격을 막아 냈다. 이후 경주 부윤으로 특진되었다가 성주목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인동부사 등을 역임하고 1615년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조정에서는 무의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철종 12년 (1816)에 화강암으로 박무의공비(朴武毅公碑)를 만들었다. 높이 2.3m, 폭 89㎝, 두께 34㎝이다. 수난을 여러 번 겪은 뒤에 경주 유림들의 숙원 사업으로 현재 위치인 황성공원 입구로 옮겨 오게 되었다.

 

박무의공비(朴武毅公碑)
박무의공비(朴武毅公碑)

 

창의군(倡義軍)이 전국 각지에서 분연히 일어나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외적의 침략에 맞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민간 무장 조직을 의병(義兵)이라 하였다. 의병은 주로 한국의 역사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민병(民兵)을 뜻하는 말이다. 창의군(倡義軍)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의병은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향촌 공동체가 향토방위를 떠맡아 온 오랜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의병 부대의 조직은 매우 수월하였다.

그들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은 전직 관료와 사림 그리고 승려들이었다. 의병의 신분 구성은 다양하다. 사상적 기반도 다양하였지만 유교의 충의 정신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의병들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고, 향토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적대하기 위해서 정면충돌보다는 매복, 기습, 위장 등과 같은 유격 전술을 많이 써서 적에게 큰 괴로움을 주었다. 의병은 전국 각처에서 일어났으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전란이 장기화하면서 일본군에 대한 반격 작전은 한층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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