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 공간에 나온 잡지의 외침
8·15 해방 공간에 나온 잡지의 외침
  • 권민정 기자
  • 승인 2019.08.0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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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 해방을 맞았다. 경술국치로부터 35년, 을사조약으로부터 40년 만의 일이었다. 기쁨도 컸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해결할 문제들이 산재하였으니 그중 하나는 민족 문화의 독립이었다. 여기, 일제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형성된 조선 근대 문화의 근본을 바로 세우고 민족 문화 건설에 애쓴 사람들이 만든 잡지가 있다. 문화 조건이 척박하던 8·15 해방 공간에 나온 잡지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 시대 상황은 어땠을까.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지 잡지를 통해 살펴보았다.

 

〈문학〉 창간호 표지 , 〈문예〉 창간호 표지
〈문학〉 창간호 표지 , 〈문예〉 창간호 표지

 

우리나라 첫 잡지는 1896년 11월 30일에 창간된 <대조선독립협회보>로 전해진다. 잡지의 역사가 100년이 넘는 셈이다. 흔히 한국인은 한(恨)이 서린 민족이라고 하는데 일본 제국주의 지배의 영향이 강화되던 시기부터 종이 책자의 형식은 그 원통함과 억눌린 감정을 표출할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연유에서 보면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해방을 맞은 1945년까지 약 800종의 잡지가 발간(참고: <한국신문·잡지총목록 1883-1945>, 국회도서관)되었다는 사실은 크게 놀라운 일도 아닌 듯하다.

잡지와 단행본 등 출판 산업 전체를 보아도 해방 시점부터 6·25 전쟁 전까지 출판의 기세는 대단하였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인물과사상사)에 인용된 1946년 3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당시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종이의 소비량으로는 아마 조선 유사 이래 처음일 것이다. 출판 홍수라 함이 단순한 형용이 아니오 과장이 아닐 듯싶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홍수도 터짐 즉하리라.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였고 붓이 있어도 글을 못 씀은 40년 동안 통한이 뼈에 사무쳤거든, 자유를 얻은 바에야 무엇을 꺼릴 것인가? 눌렸던 것이 일시에 터진 것이니 세고당연이라. 한동안 그대로 방치해 무방하리라.” 해방 전의 시대 상황을 잘 보여 주는 부분이다.

 

<문학>에서 살펴보는 해방 전 우리 민족의 삶

잡지 <문학>은 민족 해방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근대적인 민족 문학 재건과 수립이라는 과업을 위해 세상에 나왔다. <문학>은 1946년 7월 15일자로 창간된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로 1948년 7월 통권 8호까지 발행되었다. 봉건 잔재의 청산, 일제 잔재의 소탕, 국수주의의 배격이라는 세 가지 항목을 민족 문학 건설 기본 강령으로 주장하였던 이 잡지는 1940년대의 상황을 잘 보여 주는 글들이 실려 있다. 그중 <한국잡지백년 3>(현암사)에 게재된 <문학>의 연재 글을 그대로 옮긴다. 이 글은 글쓴이가 1944년 11월 서울을 출발, 1945년 4월 5일 중국 연안에 도착, 8월 15일 일제 패퇴 후 9월 4일 연안을 출발, 11월 하순 서울에 도착하는 동안의 기록을 담고 있다.

 

때는 1944년 11월이었다. 일제는 1937년 7월 7일 중국과 선전한 지 8년째요. 1941년 12월 8일 미영과 선전한 지 4년째였다.

일제는 쓰러져 가는 환자처럼 타성적인 전쟁을 아무 승산도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하고 있었다. (중략) 조선은 일본의 상품 시장, 금융 시장이라 하지만 팔아먹을 상품도 고리대금할 돈도 없고, 오직 동물성·식물성 원료와 풍부한 지하자원과 전력과 식량과 현금 등을 헌납이니 공출이니 하는 미명하에 끝없는 약탈을 하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귀중한 조선의 아들딸을 정신 보국대니 징용이니 징병이니 하고 도살장으로 몰아냈다. (중략) 조선을 군사기지로 하고 대륙 침략에 쓰는 무기를 대부분 여기서 만들고 80만의 이민단, 즉 재향 군인단을 가져오고 몇 개의 사단을 두고 갖은 압박과 약탈을 하고 있었다. 특히 문화적 압박은 언어도단이었다. 조선어와 조선사, 조선 성명, 조선 의식 습속의 사용까지 금지하고 조선신의 신앙까지 금지하고, 모든 것을 순전히 일본색으로 강요하였다.

나중에는 ‘나는 황국신민이라’고 서사까지 시켰다.

이 글의 하단에 언급된 부분은 교과서나 역사책을 통해 누구나 알고 있는 ‘황국 신민화 정책’에 관한 내용이다.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는 동시에 우리 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한 시기가 1930년대부터이다. 그 핵심 정책이 조선인의 황국 신민화였다. 한국인을 천황에 충성하는 백성으로 동화시키겠다는 황민화 정책은 교육 부분에서부터 실시되어 우리 민족의 일상생활 곳곳에 침투하였다. 일본어 상용을 강제하기 위해 1938년 조선 교육령이 개정되었고 1942년부터 학교에서 조선어가 사라지기 시작하였으며 학교 안은 물론 밖에서도 우리 민족은 서로 일본어를 사용하는지 감시해야만 하였다. 1937년에는 한글 연구자와 그 후원자들을 일망타진한 조선어학회 사건도 벌어졌다.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공포해 우리 민족의 사상 전향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 즈음이다. 특히 일상생활 곳곳에서 일제의 정책을 전달하고 지시하는 ‘애국반’이 조성되었는데 마을, 은행, 공장 등에 조성된 애국반은 애국반상회를 열어 조선 민중의 일상과 의식을 일본식으로 강요하였다. 애국반상회의 과정은 이러하였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인원이 모두 모인 가운데 국기 게양, 국가 합창, 천황의 조서 봉독 등이 이어지고 해당 의례를 논의 후, ‘황국 신민서사’를 모두가 봉창하고 천황 폐하 만세 삼창을 한 후에 마무리되었다.

<문학>의 본 글로 하여금 우리는 조선의 언어, 사상, 관습, 생활까지 철저히 단속하여 일본의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려는 일제의 정책이 해방 직전까지 강력히 시행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문예〉 신년 특대호에 실린 소설 중 일부. 순수 한국어로 쓰였다. 1948년 8월 1일자로 창간된 순수 문예지 〈문예〉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1954년 3월 통권 21호로 종간되었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소장)
〈문예〉 신년 특대호에 실린 소설 중 일부. 순수 한국어로 쓰였다. 1948년 8월 1일자로 창간된 순수 문예지 〈문예〉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1954년 3월 통권 21호로 종간되었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소장)

 

새 국가 건설에서 ‘우리의 역할’을 고민하다

<문학>의 창간 연유와 마찬가지로 해방 공간에서 새 국가 건설을 위한 문학의 역할을 중요시 여긴 수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기개를 펼치고 의기투합하여 잡지를 발행하였다. 40년간 일제의 지배 아래 강력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조선의 근대적인 문학을 앞으로 어떻게 성장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제각각의 고민과 나름의 해답을 담은 잡지들이 나왔다. 대표적인 잡지가 1949년에 발행된 <문예>이다.

 

조절-〈문예〉 제1권 제3호 10월호(1949)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소장)
조절-〈문예〉 제1권 제3호 10월호(1949)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소장)

 

<문예>는 발행인 모윤숙, 편집인 김동리로 1949년 8월 1일에 창간된 순수 문예지이다. 모윤숙은 한국 문단 제1의 여류 시인이며 김동리는 <무녀도>, <역마> 등을 집필한 것으로 우리가 익히들어 알고 있는 바로 그 소설가이자 시인인 김동리이다. <한국잡지백년 3>(현암사)에 게재된 <문예>의 창간사 내용에는 정치 상황, 경제 조건, 문학 기반이 척박한 시기에 문인으로서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다짐이 잘 드러나 있다.

 

문인이 붓을 잡는 것은 일부 정치 문학 청년들이 오신하는 바와 같은 ‘칩거’도 아니요, ‘도피’도 아니다. 붓대를 던지고 당과 싸움이나 정치 행렬에만 가담하는 것이 현실을 알고 문화를 건설하는 방법이라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 흔히 있는 '거짓'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러한 ‘거짓’을 거절해야 한다. 소설가는 소설을 쓰고 시인은 시를 쓰는 것만이

민족 문학 건설의 구체적 방법의 제1보가 되리라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

그러면서 모윤숙은 “모든 문인은 우선 붓대를 잡아라”라고 외치고 있다. 이어 “이것이 민족 문학 건설의 헌장 제1조가 되어야 한다. 본지가 모든 당파와 정실을 초월하여 진실로 문학에 충실하려 함은 당파보다 민족이 더 크고 더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 문학 건설의 공동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문인은 본지를 통하여 그 빛나는 문학적 생명을 새겨 주기 바란다.”라고 마치고 있다.

단순히 직분으로서의 문인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던 수많은 문인들이 <문예>를 빛냈다. 본지에는 창작 소설, 감상과 비평, 시평,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다양한 순수 문학들이 실렸다.

문인이 글을 쓰기 위해 붓을 들었다면 예술가들 또한 동일한 의미로 붓을 들었다. 1947년 예술신문사가 발행한 <예술연감>은 그들의 작품을 담고 조선의 근대 예술로의 성장을 염원하며 예술계를 총망라한 정보를 제공하는 종합지로 발간되었다. 1부 개관, 2부 자료, 3부 편람으로 구성되었으며 1부 개관은 문학계, 미술계, 영화계 등 다양한 예술 분야별 현황을 기술하였다. 개관 도입부에는 조선 미술 운동이 보수주의적이며 스스로에게 빠져 있는 점을 경계하고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밝고 넓은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글이 실렸다. 이로써 식민지 지배 아래 억압된 사상에서 탈피하여 근대 세계 사회의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여야 함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해방 공간에서 해결되지 못한 양극화된 정치적 이념 또한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는데,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책자가 <민족문화>이다. 1949년 좌익 계열의 문화 단체 조직에 대항하여 결성된 우익의 문화 관계 단체인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1949년 발행한 <민족문화>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통권 1호만 발행되었다.

우리 민족의 독립된 문화적 기반을 세우기 위해 근대적 민족 문학의 성장이 필요하였지만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봉건 사회의 뿌리 깊은 전통주의를 근대 사회로의 성장으로 개편하지 못한 채 일제의 총칼 지배 아래 강력한 영향으로 받으며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조선의 근대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갑자기 맞이한 해방. 해방의 기쁨만큼 누구보다 우리 민족의 자주적 성장을 치열하게 고민한 문인과 예술가들은 그들의 의지를 잡지에 실었다. 자본이 풍부하기 때문도 실력을 자랑하기 위함도 아닌, 순수한 의지의 발현이었다. 경제적 손해를 보면서까지 민족의 독립적 문화 기반을 세우기 위해 애쓰던 이들의 결과물이 오래 기억되기를 바란다.

 

〈문학〉 창간호 차례
〈문학〉 창간호 차례

 

〈문예〉 창간호 내용 일부
〈문예〉 창간호 내용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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