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路 문화재 탐방 8〕
〔지하철路 문화재 탐방 8〕
  • 이승리 기자
  • 승인 2019.09.02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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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공원 전경이다.
장충단공원 전경이다.

 

‘장충’이라는 것은 주로 자정이 넘은 시간, 잠들지 않은 채로 배꼽시계가 울리면 생각나는 지명이다. 휴대 전화 속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뭘 먹을까’를 고민하다 쫄깃쫄깃한 식감에 콜라겐이 많아 피부 미용에 좋다는 ‘족발’을 고르고 나면 으레 앞에는 ‘장충동’이라는 세 글자가 붙어 있다.

서울 중구가 아니더라도 동네에 하나 둘씩은 있는 이 ‘장충동 족발’. 하지만 ‘장충’이란 이름을 앞세운 곳 중 족발 골목의 아성을 훌쩍 뛰어넘는 역사가 숨 쉬는 공간이 있다.

 

대한 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친필이 있는 곳, ‘장충단공원’

-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

국내 설계로 지어진 한국의 1호 돔 경기장 장충체육관과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가 인접한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 내려 6번 출구로 나오면 장, 충, 단, 공, 원이라는 다섯 글자의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이게 일종의 힌트다. 공원 안에서는 글자에 주목하면 역사가 보인다.

 

장충단공원이다.
장충단공원이다.

 

우선 동대입구역과 신라호텔 방면 게이트로 들어가면 보이는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1호 장충단비는 특별한 사람이 새긴 ‘세 글자’가 숨겨져 있다. 그 인물은 바로 부침(浮沈), 그 자체의 삶을 살았던 ‘순종’이다. 1874년 고종과 명성 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되고, 1907년 고종의 양위를 받아 황제가 된다. 재위 기간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단 4년뿐. 내정 간섭을 일삼는 일본으로 인해 ‘힘없는 황제 자리’조차 지킬 수 없었다. 황손으로 태어나 왕세자가 됐던 순종은 강등, 폐위 등의 수모를 겪다 1926년 4월 25일 승하한 비운의 마지막 황제다.

이 비석 앞쪽에 새겨져 있는 장충단(獎忠壇)이라는 한자, 바로 이것이 대한 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글씨다.

 

장충단비다.
장충단비다.

 

비석의 뒷면에는 당시 육군 부장을 역임했던 민영환이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과 그 의미가 새겨져 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장충단비가 세워진 계기는 을미사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명성 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인 을미사변 과정에서 일본군에 대한 우리의 대항은 매우 거셌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시위 대장 홍계훈 등 많은 병사는 외세로부터 왕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했다.

고종 황제는 이같이 희생된 영령들을 기리고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장충단을 지으면서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글씨를 새겨 장충단비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주권을 상실한 나라의 아픔은 비석에도 사무쳤다. 1910년 국권 침탈이 이뤄지면서 장충단은 폐지됐고 비석은 뽑혔다. 그러다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벚나무를 심어 공원이 되었고 그대로 광복 전까지 유지된다.

장충단공원은 국권 침탈, 그 가슴 시린 기억에도 동행한다. 공원 내의 국가 보훈처 지정 현충 시설인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는 일제 강점기 시대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김창숙 등은 파리장서운동을 발의하고, 서명자를 모으고 문안을 확정했다.

이때 영남, 호서, 호남의 유림 등 저명한 다수의 유림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일본은 참여한 유림에게 체포, 투옥 등 강력한 탄압을 가했지만 유림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다.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다.

 

결국 김복환, 곽종석 등 137명의 유림(儒林)은 일본이 대한 제국을 강제 병합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식민 통치에 맞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내용의 청원서에 서명한다. 이 글을 파리장서라고 일컫는다.

파리장서는 향교 등에 배포되어 국내에서 독립에 대한 힘을 모았고, 파리에 머물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리인 김규식을 통해 청원서는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된다. 그러면서 ‘모든 국민이 독립을 간절히 열망하고 있음’을 국외에 알리는 데에도 성공한다.

이러한 모두의 노력에 힘입어 1945년 대한민국은 다시 주권을 되찾게 된다. 광복은 장충단비를 다시 세상 앞에 서게 한 전환점의 원년이 됐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장충단비는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새롭게 터를 잡았고, 1969년 지금의 자리로 한차례 더 이동했다.

 

수표교다.
수표교다.

 

장충단공원에서는 대한 제국보다 앞선 조선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로 철거됐다가 1965년 옮겨 세워진 길이 27.5m, 폭 7.5m, 높이 4m의 수표교가 그 주인공이다. 현재 유형 문화재 제18호다.

이 다리는 청계천을 가로질러 쌓은 돌다리로, 물의 수위를 측량하던 관측기구인 수표(水標)를 세웠다 해서 수표교라 불렸다.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교각 하부를 마름모꼴로 만들고 측우기를 설치하는 등 조선의 과학 기술을 가늠케 한다.

 

‘장충단, 기억의 공간’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장충단, 기억의 공간’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수표교는 애초 지금의 모습은 아니었다. 태종~세종 재위 기간에 화강석 재질의 석교로 개조됐다고 한다. 그 후 1760년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물 높이를 측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다리 자체가 수량을 측정하는 수중주석표(受重柱石標) 역할을 했다. 다만, 함께 있었던 보물 제88호 수표는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겨 장충단공원 현장에서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공원에는 2017년 ‘장충단, 기억의 공간’이 조성되어 장충단을 비롯해 남산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되돌아보는 역사 탐험의 장으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장충단공원

위치 서울 중구 동호로 261

관람 시간 365일 24시간

관람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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