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화유산 거리 탐방 3]
[근대문화유산 거리 탐방 3]
  • 이현정 기자
  • 승인 2019.09.0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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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 언덕에서, 대구

 

근대문화유산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역사였고, 격동의 시기에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증거물이다. 근대문화유산은 없애 버리고 싶은 일제 강점기의 잔재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소중히 보존해야 할 독립운동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펼쳐 보면 대한민국의 다사다난 했던 근대사가 그대로 묻어나는 교과서 같기도 하다.

어느덧 마지막으로 접어든 근대문화유산 거리 탐방 이야기, 근대문화 1번지 서울 정동을 시작으로, 근대 시간 여행의 거리 군산을 거쳐 청라 언덕의 도시 대구에서 마무리를 맺을까 한다.

대구광역시 중구의 근대 골목 투어는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도 선정되어 있는데, 그중 필자는 노래로 잘 알려진 청라 언덕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더욱 뜻깊은 3·1 운동길 계단이 있는 2코스를 중심으로 돌아보았다.

 

청라 언덕 노래비
청라 언덕 노래비

 

청라 언덕과 동무 생각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맘때가 되면 꼭 생각이 나는 이 노래는 바로 <동무 생각>이다. 첫 구절인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이 구절은 굉장히 유명하다. 이 곡은 1922년, <오빠 생각>으로 유명한 작곡가 박태준이 만든 가곡으로 원래 제목이 ‘사우(思友)’였으나 후에 제목을 쉽게 풀어쓰게 되어 ‘동무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곡에 나오는 청라 언덕의 청라는 푸른 담쟁이를 의미하는데 박태준 선생이 계성학교를 다녔을 무렵 언덕에 위치한 학교 건물인 아담스 관과 맥퍼슨 관이 온통 푸른 담쟁이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에 청라 언덕이라 불렸다고 한다. 박태준 선생이 계성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여학생에 대한 일화를 마산 창신학교 시절에 만난 국어 교사였던 이은상 선생에게 얘기를 들려주었고, 즉석에서 가사를 붙여 이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훗날 두 사람은 사돈이 된다. 이 노래엔 풋사랑의 풋풋함과 수줍음이, 쉽게 다가가진 못했지만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듯하다.

이 청라 언덕은 노랫말로 잘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대구의 기독교가 뿌리내려 발전하고 교육과 의료로 사회에 봉사했던 중심지라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곳은 지난 100년간 놀라운 변화를 이룬 대구의 근대 역사를 보여 준다. 그래서 지금도 역사를 체험하고 느끼려는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 스윗츠 주택은 마르다 스윗츠 선교사가 살았던 사택으로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주택은 1893년에 대구를 찾아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1910년경에 지었는데 1907년 대구읍성 철거 때 가져온 안산암의 성돌로 기초를 만들고 위에 붉은 벽돌을 쌓은 건물이라고 한다. 1층엔 거실을 중심으로 주방, 침실을 배치하고 현관에서 거실과 응접실로 직접 연결되는 구조로, 2층에는 계단이 있는 홀을 중심으로 남쪽에 2개의 침실과 북쪽에 욕실을 배치했다. 건물의 형태와 내부 구조가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대구의 초기 서양식 건물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지금은 선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1층은 개신교에 관한 자료와 2층은 구약과 신약에 관련된 세계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스윗츠 주택
스윗츠 주택

 

챔니스 주택은 챔니스 목사의 사택으로 1911년 계성학교 2개 교장인 레이너와 챔니스에 이어 1948년부터 동산 병원장이었던 마펫 병원장의 생활 공간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이 주택도 1910년경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건축하여 스윗츠 주택과 마찬가지로 대구읍성 철거 때 가져온 안산암의 성돌로 기초를 만들었으며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은 건물이다. 이 건물 역시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스윗츠 주택과 같은 2층 구조인 구성된 이 집은 남북 긴 직사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1층 중앙에 있는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거실, 서재, 부엌, 식당 등을 배치하였다.

2층에는 계단실을 중심으로 좌, 우측에 각각 침실을 두고 욕실, 벽장 등을 두었으며 1층에는 거실 등에서 이용할 수 있는 비교적 넓은 베란다가 있다. 당시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남부에서 유행한 방갈로 풍의 저택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특이하고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금은 역대 병원장들의 생활 모습과 1900년대 의료 기기 등이 소장된 의료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챔니스 주택
챔니스 주택

 

 

블레어 주택
블레어 주택

 

블레어 목사의 사택이었던 이 주택은 대구의 유형 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역시 1910년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지은 주택으로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2층에 계단 공간을 중심으로 3개의 침실과 욕실을 두고 특이하게 현관홀 위에 늘 빛을 받아들이는 선룸을 설치하였다.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튼튼한 콘크리트로 하고 그 위에 미국식으로 붉은 벽돌을 쌓았는데 당시 미국의 주택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조선 시대 서당과 1970년대 초등학교 교실을 재현해 놓았으며 시대별 교과서부터 2002년 월드컵 자료까지 망라되어 있다. 특히 대구 3·1 운동의 역사와 사진이 전시되어 훌륭한 역사 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근대 교육과 의료 선교에 일조한 제일교회
근대 교육과 의료 선교에 일조한 제일교회

 

제일교회는 대구, 경북 지역 최초의 개신교 교회로 복음 전파와 제중원(현 동산의료원)을 세워 의료 활동을 하였고 희도학교, 신명여학교, 계성학교를 세워 근대 교육에 기여하였다. 대구의 선교 역사는 조선 말 미국 선교사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목사가 경상도 북부 지역 전도 여행 중, 1893년(고종 30년) 4월 22일 대구 읍성에 첫발을 디디면서 시작되었다. 1896년 1월 남성로(현 약전골목) 구 대구제일교회(현 선교관) 터에 있던 건물을 구입한 후 수리하여 기와집 단칸에서 7명으로 예배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1933년에 백은 최재화 목사의 부임과 함께 벽돌 한 장 사기 운동을 펼쳐 지금의 붉은색 벽돌 예배당을 세 번째 성전으로 건축하게 되었다. 남성로의 교회 구내에 이 지역 최초 신교육 기관인 희도학교(1900년) 개성학교(1906년)를 개교하였고 신명학교(1907년)를 설립했다. 1898년에는 지역 최초의 서양 의술 의원인 제중원을 만들어 의료 선교와 구제에 힘썼다.

 

영남 최초의 고딕 양식, 계산성당
영남 최초의 고딕 양식, 계산성당

 

계산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이 건축물은 1900년대 영남 최초의 고딕 양식 성당이기도 하며 그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프랑스인 프와넬 신부가 설계하여 1902년에 완공했는데, 1911년에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높이는 등 증축을 하여 1918년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라틴 십자형의 평면 건물이며 8각의 첨탑 두 개를 종탑부 대칭 구조로 세웠다. 앞면과 양쪽에 장미창으로 장식되어 있다. 계산성당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계산 주교좌 대성당으로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함께 한 애국의 길, 이상화와 서상돈 고택
함께 한 애국의 길, 이상화와 서상돈 고택

 

함께 한 애국의 길, 이상화와 서상돈 고택
함께 한 애국의 길, 이상화와 서상돈 고택

 

이상화 고택으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서니 그의 대표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그린 벽화가 먼저 발걸음을 붙잡는다. 이상화(1901~1943) 시인은 대구 출신으로 홍사용, 현진건, 이상화, 나빈, 박종화, 박영희, 노자영 등 시인·소설가로 구성된 한국의 낭만파로 불리는 백조 동인지의 시인들과 함께하면서 <나의 침실로>와 같은 탐미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1926년 <개벽지> 6월호에 실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시작으로 같은 식민지의 민족 현실을 바탕으로 한 저항 정신과 향토적 세계를 노래하였다.

많은 근대 문화재가 그랬듯 이상화 시인의 고택도 지역 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2002년부터 대구 시민과 문화계에서 상화고택 보존 운동을 전개하여 40만 명이 서명 운동에 참여하고 자금을 모아 군인 공제회에서 상화고택을 매입하여 대구시에 기부 채납하였다. 거기에 유족과 문인들이 이상화 시인의 유물과 자료를 기증하여 현재와 같이 이상화 고택을 온전히 보존하게 되었다. 문화재뿐 아니라 어떤 것이든 사라지긴 쉬워도 지키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 어려운 일을 대구 시민들이 힘을 모아 해낸 곳이라니 이 공간이 새삼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이상화 고택 옆에는 국채 보상 운동의 주역인 서상돈의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대구 김천 출신의 서상돈은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부의 검세관이 되어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하였는데, 1907년 이천만 동포로 하여금 석 달 동안 담배를 끊어서라도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의 국채를 갚아 국권을 사수하고 민족 경제를 지키자는 뜻의 국채 보상 운동을 일으켰다. 비록 일제의 방해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국채 보상 운동은 국권 회복을 위한 자발적 사회 운동의 모범이 되었다. 대구시는 나라를 위한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이상화 고택 옆에 있었던 서상돈의 생가를 복원하였고 국채 보상 공원을 조성하였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100년의 외침, 3·1 운동길 계단
100년의 외침, 3·1 운동길 계단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이 3·1 운동을 앞두고 한 말이다. 올해는 3·1 운동과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3·1 운동은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는데, 3월부터 4월까지 매일 전국에서 수십 차례에 이르는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고 한다. 3·1 운동은 신분과 계층, 나이를 망라하여 온 국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참여한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다.

대구에서는 이 만세 운동이 3월 8일 오후에 시작되었다. 신명학교(현 신명여고), 계성학교(현 계성고), 대구 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 등 학생과 교사, 서문시장 상인과 주민 등 많은 군중이 시가행진을 하면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작점이 된 큰 장터에서부터 동산교 근처에서 그리고 약전 골목에서 시민들과 합류하면서 대구의 만세 운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제일교회 신관 왼편에서부터 동산박물관을 지나는 좁은 언덕길이 지금의 3·1 운동 계단인데 당시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성서학당 등의 각 학교 학생들이 이곳을 지나 3·1 운동 집결지로 이동했다고 한다. 90 계단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 길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고자 상인으로 위장한 학생들이 약속 장소인 큰 장(서문시장) 강씨 소금집으로 갈 때 안전하고 은밀한 통로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3·1 운동길 좌우 벽에는 1900년대 대구 모습과 3·1 운동에 관련된 사진들이 설명되어 있어서 더욱 의미가 깊다. 사실 이 길도 모르고 보면 좁고 작은 언덕길에 불과하겠지만 역사를 되살리고 이야기를 부여하는 노력이 있었기에 되새길 수 있는 것 같다. 가로막힌 현실보다 더 굳센 신념으로 독립을 부르짖었던 100년 전의 외침을 말이다.

 

대구 근대로의 여행
대구 근대로의 여행

 

근대문화유산 거리 탐방을 마치며

대구는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불릴 정도로 지역 곳곳에 만세 운동 터, 독립지사의 생가, 동상, 기념비, 장소 등이 비교적 많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지면 관계상 이번 근대 골목 투어 2코스에선 소개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크다. 근대문화유산 거리 탐방을 연재하며 근대문화의 통로였던 정동을 시작으로, 일제 수탈의 아픔이 서린 군산의 근대문화유산들을 살펴보았고, 독립운동 유적이 많은 대구에서 맺음을 하게 되었다. 근대문화유산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역사이지만 없애 버리고 싶은 일제의 잔재라는 역사적인 관점과 경제적 계발의 논리에 밀려 그동안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빨리 사라진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침략의 역사는 곧 독립운동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포기하지 않은 저항 정신도 어리석고 아픈 역사도 다 우리의 것, 똑바로 봐야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지금도 빠르게 사라져 가는 근대문화유산들이 앞서 탐방했던 서울 정동과 군산과 대구의 사례처럼 잘 보존하고 영리하게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간절히 바라며 근대문화유산 거리 탐방을 끝맺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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