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문화유산 기행 4]
[백제 문화유산 기행 4]
  • 송영대 기자
  • 승인 2019.09.0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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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년간 무령왕릉을 지켜 왔던 수호신, 진묘수

 

1971년 7월 8일 오후 4시, 충청남도 공주에서는 역사적인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선 7월 5일에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를 위해 작업을 하던 중 송산리 6호분과 동일한 벽돌이 발견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고서 급박하게 발굴 조사 팀이 꾸려졌으며, 무덤의 입구를 찾아 발굴을 시작하였다. 오후 4시경에 입구를 틀어막은 벽돌을 꺼내면서 고고학자들은 숨을 죽이고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들이 제일 먼저 마주한 대상은 입술을 붉게 칠한 짐승 모습의 석상이었다. 1446년 동안 무령왕릉을 지켜 오던 석상은 이렇게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국립공주박물관을 지키는 진묘수 모형
국립공주박물관을 지키는 진묘수 모형

 

고대 동아시아 무덤의 수호신, 진묘수

국립공주박물관의 상설 전시실은 크게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에서 1층은 사실상 무령왕릉 전시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위주로 전시하였으며, 무령왕릉 유물 출토 배치 상태에 맞추어 전시를 하였다. 무령왕릉의 연도 즉 무덤길에서는 매지권과 동전 묶음 그리고 진묘수가 나왔다. 앞서 언급한 입술을 붉게 칠한 짐승 모양의 석상이 바로 ‘진묘수’에 해당한다.

오늘날 국립공주박물관에 들어서면 박물관 바깥에 큼지막한 진묘수 모형이 세워져 있다. 살짝 헤실거리면서 웃는 모습이 마치 돼지 같기도 하고 하마 같기도 하다. 짧고 뭉툭한 다리는 왠지 귀여운 인상을 주며 관람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박물관에 놀러 온 꼬마들은 다들 이 진묘수 모형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 번씩 다리나 엉덩이를 쓰다듬기도 한다. 현재 이 진묘수 모형은 박물관의 대표 브랜드로 지정되어 국립공주박물관의 수호신이라는 의미로 설치되었다.

‘진묘수’란 무덤을 지키는 수호 동물로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다. 국내에서는 무령왕릉의 사례만이 알려져 있어서 매우 이례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이는 무령왕릉이 중국 남조의 전축분 즉 벽돌무덤의 구조를 모방하여 만들어졌고, 중국 무덤 내부의 유물들도 차용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진묘수는 중국의 유물 혹은 중국과 연관된 존재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작 중국의 사례와 비교하면 완전히 동일하지 않고 여러모로 차이를 보인다.

 

〈고대 동아시아 무덤의 수호신, 진묘수〉 특별전
〈고대 동아시아 무덤의 수호신, 진묘수〉 특별전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와 관련하여 ‘고대 동아시아 무덤의 수호신, 진묘수’라는 주제로 특별 전시를 개최하였다. 상설 전시실인 1층의 ‘웅진 백제실’ 안쪽 오른편에 전시 공간을 마련하고, 중국에 있는 진묘수 유물들을 전시하여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와 비교할 수 있게 하였다. 전시는 2018년 12월 11일에 개최하여 지난 2월 10일까지 진행되었다.

 

특별전 전시실의 모습
특별전 전시실의 모습

 

진묘수의 출현과 확산 그리고 다양화

진묘수는 무덤에서 출토된 짐승 모양의 조각품이다. 중국 후한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진묘수가 외부 침입자들로부터 죽은 사람을 보호하고, 죽은 이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믿었다.

후한 시대에 혀를 내민 진묘수는 중국 서남부의 사천성과 중경 지역을 중심으로 출현하였으며, 이는 사람 모양과 짐승 얼굴로 나뉜다. 혀를 내민 것은 생명을 뱉어 내는 것이자 죽음에 대한 부활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중국 서남부에서 나타난 혀를 내민 진묘수는 점차 동쪽으로 전파되며 서진 시대까지 이어졌다.

뿔이 하나 달린 진묘수는 중국 서북부의 감숙성과 산서성 지역을 중심으로 출현하였다. 어깨에는 날개가 표현되었으며, 걷는 모습을 한 동물이 고개를 숙이고 뿔을 앞으로 향해 외부의 적을 위협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점차 청동이나 흙을 빚어 제작하였다. 후한 말기에 이르러서는 뿔 뒤로 몇 개의 뾰족한 송곳 모양의 장식이 더해지는데, 이는 여러 개의 갈기를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중국 삼국 시대에는 후한 시대 진묘수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각 지역의 특징에 맞게 새로운 유형의 진묘수가 등장한다. 삼국 시대 조위의 영역에 있었던 낙양에서는 진묘수의 전통이 이어져 걷는 모습의 보행형 진묘수가 제작되었다. 반면 동오(손오)의 영역이었던 양자강 중류 지역에서는 네발로 기어가는 천산갑형 진묘수와 뿔이 하나 달린 사람 얼굴이나 짐승 얼굴의 진묘수가 출토되었다.

이번 특별전에는 삼국 시대의 진묘수부터 전시되었다. 남경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동오 시대의 진묘수는 머리에 하나의 뿔이 달려 있고,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몸을 하였다. 얼굴은 원반형으로 만들어졌으며 눈·코·입·귀는 물론 수염도 모두 표현되었고, 다리는 좀 뻣뻣한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배 부분에는 남경박물원에 입수되기 이전에 소장가가 쓴 글씨가 남아 있는데, 이에 따르면 247년에 안휘성 안산시 당도현의 용산교진에 위치한 무덤에 부장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경박물원 소장 동오 시대의 진묘수
남경박물원 소장 동오 시대의 진묘수

 

서진 시대의 다양한 진묘수들

중국 서진 시대의 진묘수는 삼국 시대 진묘수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롭게 변화가 나타난다. 낙양을 중심으로 갈기가 표현되며, 진묘수와 함께 무사 모습의 도용(무사용)이 조합을 이루어 부장되기 시작한다. 반면 강남 지역에서는 물소 모양의 진묘수가 단독으로 부장되었다. 후한 때의 뿔이 하나인 진묘수보다는 몸이 비대해지고 뿔은 더 짧아졌으며, 꼬리를 내리고 고개는 숙이지 않은 채 앞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동진 시대 남경에서는 서진 시대 낙양의 진묘수와 강남의 진묘수가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진묘수가 나타난다.

 

서진 시대의 진묘수
서진 시대의 진묘수

 

서진 시대의 진묘수는 육식 동물처럼 날렵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다른 진묘수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목과 등에 뿔 혹은 갈기가 3개 돋았으며, 그 뒤의 척추 위에는 원판형의 장식이 있고 꼬리 끝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소나 말의 굽과 같은 다리가 있어서 기이한 모습을 한 진묘수는 고개를 살짝 내린 채 정면으로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빛이다.

반면에 말의 모습을 한 서진 시대의 진묘수도 있다. 역시 3개의 뿔 혹은 갈기가 달렸다는 점이 같고, 어깨에는 날개를 표현한 흔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꼬리 끝도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이는 암컷을 의미한다. 배 부분에는 구멍이 뚫렸으며 내부는 비어 있다고 한다.

남경 석갑호에서 출토된 서진 시대의 진묘수는 청자로 만들어졌으며 소 형상으로 보고 있다. 제단의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머리는 무덤 입구를 향해 있었다고 한다. 머리와 등에 뿔 혹은 갈기가 부착되어 있으며, 눈썹과 목덜미에는 털이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아울러 몸체 옆에는 날개가 음각으로 표현되었다.

 

남경 석갑호 출토 서진 시대의 진묘수
남경 석갑호 출토 서진 시대의 진묘수

 

남북조 시대 진묘수의 변화와 정형화

남북조 시대에 진묘수는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남조는 동진 시대의 전통을 유지하며 발전하였지만, 북조에서는 북방 민족의 영향에 따라 앉아 있는 진묘수가 나타나고 섬서성 서안 주변에서는 엎드린 진묘수가 출현하였다. 앉아 있는 진묘수는 바닥판 위에 사람 얼굴과 짐승 얼굴을 한 진묘수가 무사용과 함께 조합을 이루며, 그 중에서 짐승 얼굴의 진묘수는 불교의 영향으로 사자를 닮기도 한다. 엎드린 모습의 진묘수는 섬서성 서안과 함양 등지에서 제한적으로 나타난다.

북위를 세운 선비족은 본래 진묘수를 부장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적극적인 한화 정책에 따라 무덤 안에 진묘수를 부장하는 문화를 갖게 되었다. 이때 진묘수는 네발로 걷는 모습에서 앉아 있는 자세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학자들은 북방 민족이나 불교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북위가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로, 진묘수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등 뒤에 갈기 혹은 뿔이 3개로 정형화가 이루어진다.

남조는 서진과 동진의 전통을 이어받아 걷는 모습의 진묘수를 단독으로 부장하였다. 재질은 도자 혹은 자기나 돌로 만들어졌다. 등 쪽의 갈기 혹은 뿔은 5개로 정형화되었으며, 남조 말기에 이르면 톱니 형태로 바뀌게 된다. 특히 톱니 형태의 갈기를 가진 진묘수는 이빨을 드러내고 얼굴을 들고 있다.

중국 강소성 남경 영산 남조대묘에서 출토된 진묘수는 돌을 쪼아서 만든 것으로, 남조 말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얼굴은 소의 형상이며 등에는 톱니 형태와 같은 갈기가 표현되었다. 고개를 들어 이빨을 드러내었는데, 그 모습이 익살스러운 인상을 준다. 위협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도리어 주인을 향해 반갑게 쳐다보는 모습이어서 귀엽다는 느낌도 준다.

 

남경 영산 남조대묘 출토 진묘수
남경 영산 남조대묘 출토 진묘수

 

남경 강녕개발구 M1에서 출토된 진묘수 역시 남조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석 재질의 돌로 전체적으로 형태만 조각하였으며 정교하지는 않다. 눈은 돌출되었고 입은 짧다. 등의 갈기는 톱니 형태이다. 영산 남조대묘 출토 진묘수와 유사한 유물로 보이지만 거칠게 다듬어져서 마치 멧돼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남경 대산현 M3에서 출토된 진묘수도 남조 말기로 추정된다. 이 또한 돌로 만들어졌는데, 돌출된 입은 이빨을 드러내며 등에는 톱니 형태의 갈기가 있다. 꼬리는 희미하게 윤곽만 확인되고 별도의 뿔은 보이지 않는다. 앞다리와 뒷다리 위쪽에 휘감는 문양이 보이는데, 이는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와 유사한 모습이다.

 

남경 강녕개발구 M1 출토 진묘수
남경 강녕개발구 M1 출토 진묘수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서역의 진묘수 수용

중국의 진묘수는 주변 세계에도 여러 영향을 미쳤다. 그 대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서역을 꼽을 수 있다. 백제의 진묘수는 앞서 거론하였듯이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가 있으며, 고구려에서는 진묘수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벽화에 표현된 사례가 확인된다. 아울러 실크로드를 잇는 중국 신장의 아스타나 고분군에서는 중국 서북부의 영향을 받은 나무로 만든 뿔이 하나 달린 진묘수가 발견된다.

 

남경 대산현 M3 출토 진묘수
남경 대산현 M3 출토 진묘수

 

투르판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발견된 진묘수들은 3~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모두 걷는 모습이고, 채색으로 무늬를 표현하였다. 이는 중국 감숙성에서 만들어진 진묘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일부 뿔이 없는 진묘수도 확인된다.

특별전에 전시된 진묘수는 호랑이 형태로 보고 있다. 팔과 다리를 따로 제작하여 끼워 넣었으나, 현재 뒷다리와 오른쪽 앞다리가 결실되었다. 몸 전체는 노란색으로 채색한 후 등줄기를 굵은 흑선으로 표현하여 호랑이의 줄무늬를 나타냈다. 코 윗부분에 뿔을 삽입했던 흔적이 있어서 본래는 뿔이 하나인 진묘수로 추정된다.

 

투르판 아스타나 고분군 출토 진묘수
투르판 아스타나 고분군 출토 진묘수

 

고구려에서는 진묘수 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5~6세기에 만들어진 무덤 널길 벽화에서 소량의 진묘수 그림이 확인된다. 벽화에 표현된 진묘수는 앉아 있는 모습으로 북조의 진묘수와 같다. 표현 방식은 중국과는 달리 5세기에는 호랑이와 표범 무늬를 섞어 진묘수를 표현하였고, 6세기에는 사자형의 진묘수가 나타나지만 등에 신선을 표현하였다는 점이 중국 진묘수와의 차이점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구려 개마총 널길 벽화에 표현된 진묘수 모사도가 진열되었다. 진묘수는 앉아 있는 자세로 입을 벌렸으며 풍성한 갈기와 함께 꼬리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등에 신선이 앉아 있어서 중국의 진묘수와는 차이가 있는데, 이는 진묘수가 죽은 자를 하늘로 안내하는 역할로 본 것으로 여겨진다.

 

평양에 위치한 고구려 시대 개마총의 진묘수 모사도
평양에 위치한 고구려 시대 개마총의 진묘수 모사도

 

백제의 진묘수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가 유일하다. 발굴 당시 무령왕릉 진묘수는 널길 가운데에서 문 밖을 향해 놓여 있었다. 외부 침입자로부터 죽은 이를 보호하고,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는 뿔이 하나이고 걷는 모습을 하고 있다. 즉 중국 서북부에서 보이는 뿔이 하나 있는 진묘수의 계보를 잇는 남조 진묘수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철로 뿔을 만들어서 꽂고, 뿔의 형태가 가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등에 타원형의 뿔 혹은 갈기와 돌에 채색을 하였다는 점은 중국 진묘수와는 다른 백제 진묘수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공주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의 앞모습
공주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의 앞모습

 

 

공주 무령왕릉 출토 지묘수의 옆모습
공주 무령왕릉 출토 지묘수의 옆모습

 

백제에서는 중국의 진묘수라고 하는 독특한 매장 의식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고 백제만의 색채로 새롭게 해석하였다. 오랫동안 무덤을 지킬 수 있도록 돌로 제작하되 빼어난 조각 솜씨를 발휘하였으며, 음각이 아닌 양각을 선택하여 더욱 입체적인 모습이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아울러 철로 뿔을 달아서 중국과는 구분되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무덤이 그대로 보존되기를 바라는 백제인의 바람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던 것일까? 무령왕릉은 일본인의 손이 아닌 한국인의 손에 의해 발굴되었다. 1446년간의 잠에서 깨어난 진묘수는 이제 더 이상 무덤 안에 있지 않지만, 오늘날 다시 깨어나서 우리의 곁을 그리고 백제를 지켜 주는 또 다른 사명을 부여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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