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암 외리 문양전을 통해 본 백제인의 사상
규암 외리 문양전을 통해 본 백제인의 사상
  • 송영대 기자
  • 승인 2019.10.0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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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여박물관의 3번째 전시실은 ‘백제의 불교문화’라는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전시실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벽면에 간격을 두고 네모난 유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총 8점의 유물이며 모두 비슷한 크기로 제작되었다. 다만 색깔은 약간씩 차이를 보이며, 문양 또한 서로 다르게 새겨졌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된 규암 외리 문양전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된 규암 외리 문양전

 

이 유물들은 흙을 빚고 구워서 만든 벽돌로 흔히 ‘전돌’이라 부른다. 전돌 중에서도 문양이 새겨진 것을 문양전이라고 한다. 오늘날 벽돌이라고 하면 투박한 건축 재료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당시에는 집을 장식하는 고급 재료였다. 특히 백제인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미적 감각을 최대한 발휘하여 다양한 문양전을 만들었다. 규암 외리 출토 문양전은 역사적 가치와 미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343호로 지정되었다.

 

규암면 외리에서 출토된 문양전과 발굴 당시 사진의 전시 모습
규암면 외리에서 출토된 문양전과 발굴 당시 사진의 전시 모습

 

보리밭에서 발견된 백제의 문양전

부여읍의 서쪽에 흐르는 백마강을 건너면 규암면이 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7년 3월 9일, 외리 부근에 살던 농부가 보리밭 남쪽에서 나무를 캐다가 우연히 15점의 문양전을 발견하게 되었다. 농부는 이 사실을 부여경찰서에 신고하였고, 이 사실은 조선총독부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에 의해 1937년 4월 18일부터 5월 3일까지 발굴 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외리 유적은 주변 논보다 10m 정도 높은 대지에 위치하였는데, 당시 유적 대부분이 개간되어 보리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발굴 조사 면적은 150평 정도였지만 조사 기간은 불과 보름밖에 되지 않았고 더구나 많은 비가 내리는 등 악천후까지 겹쳤다. 때문에 유적의 형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발굴을 종료하게 되었다.

당시 문양전은 약 150매가 출토되었으며 이 중에서 완전한 형태를 갖춘 유물은 42매였다. 문양전은 남북 방향으로 9m의 길이로 일렬 배치되어 발견되었다. 42매의 문양전은 산수문전·산수봉황문전·산수귀문전·연화귀문전·반룡문전·봉황문전·연화문전·연화와운문전의 여덟 종류로 구분이 가능하다. 모두 백제의 빼어난 조각 솜씨로 만들어졌으며, 뒷면 네 모서리에 홈이 파져 있어서 서로 연결될 수 있게 하였다. 이 문양전은 백제 시대에 건물의 바닥이나 벽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과 물이 어우러진 신선 세계가 표현된 문양전

백제의 문양전은 백제인의 사상이 고스란히 표현된 유물이다. 각 문양전마다 서로 다른 주제를 담고 있는데, 산과 구름 같은 경치·도깨비 문양·용과 봉황·연꽃 등을 소재로 삼았다. 모두 개성 있는 모습으로 현대 디자인이라고 해도 그대로 믿을 정도로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다.

산수문전(山水紋塼)은 말 그대로 산과 물을 주요 문양으로 삼은 문양전이다. 둥그스름한 산봉우리들이 그려졌으며, 각 산봉우리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산수문전의 아래쪽에는 기암절벽과 함께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산봉우리는 산수문전의 절반 이상 가득 채워 놓았는데, 위쪽에는 바람에 따라 흘러가는 구름을 그렸다. 백제인들이 동경하였던 선경(仙境) 즉 신선이 사는 산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수문전
산수문전

 

산수문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운데의 아랫부분에 있는 산에 팔작지붕을 얹은 집 한 채가 양각되어 있다. 그 오른편으로는 한 스님이 우두커니 서서 집을 바라보고 있다. 혹은 천천히 집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선경을 찾아가던 스님이 안식처를 찾고, 그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도교적인 색채와 불교적인 색채가 함께 어우러진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산수문전에 새겨진 집과 스님
산수문전에 새겨진 집과 스님

 

산수봉황문전(山水鳳凰紋塼) 역시 산수 문양을 바탕으로 제작된 문양전이다. 위아래로 2등분이 되어 아래쪽에 산수문전과 마찬가지로 여러 산봉우리와 기암괴석, 강물이 새겨져 있다. 위쪽의 가운데에는 봉황이 한 마리 새겨져 있는데, 주변의 불꽃이 마치 날개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봉황의 주변에는 구름이 새겨져 있어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문양전은 백제 금동 대향로의 윗부분과 도상적으로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산수봉황문전
산수봉황문전

 

윗도리를 벗어젖힌 도깨비가 새겨진 문양전

산수귀문전(山水鬼紋塼)은 체구가 큰 도깨비를 중심에 두고 도깨비의 다리 주변에 산을, 발밑에 강물을 새겨 놓은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도깨비의 눈은 우락부락하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입은 뒤집어진 사다리꼴을 하고 있으며 이빨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입 주변에는 밤송이 같은 수염이 나 있으며, 건장한 어깨에는 갈기와 같은 털이 돋아나 있다.

가슴과 배가 크고 불룩하게 표현되었고 여러 고리가 달려 있는 허리띠를 하고 있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날카롭게 휘어져 있으며, 윗도리는 입지 않은 건장한 장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산수문전에서 보이는 산과는 다르게 기암절벽에 가까운 날카로운 산이 주변에 새겨졌고 물 또한 잔잔하지 않고 빠르게 흘러가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산수귀문전
산수귀문전

 

 

연화귀문전
연화귀문전

 

연화귀문전(蓮花鬼紋塼)에 새겨진 도깨비는 산수귀문전의 도깨비와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되어 있다. 다만 차이점을 들자면 연화귀문전의 도깨비는 연꽃을 밟고 있는 모습으로 새겨졌다는 점이다. 연꽃은 불교에서 주로 쓰이는 상징물이다. 연화귀문전은 연꽃에서 도깨비가 태어나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여기에서의 도깨비는 악귀(惡鬼)가 아닌, 사악한 것을 막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도깨비 무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백제인들이 창안한 문양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러한 귀문(鬼紋)의 원형은 중국에서 확인된다. 백제가 존재하던 시기에 중국에서는 이른바 위진 남북조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백제는 남북조 시대의 여러 국가들 중에서도 남조의 국가들, 특히 양(梁)나라와 두터운 교분이 있었다.

 

중국 강소성 단양의 건릉 석각 석주의 기단부
중국 강소성 단양의 건릉 석각 석주의 기단부

 

중국 강소성 진강시의 단양에는 남조 시대 황제와 황족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양문제 소순지 건릉 석각은 무덤으로 가는 묘도를 경계로 양쪽에 석수·방형 초석·석주·귀부가 모두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유적이다. 건릉 석각의 석주(石柱)는 그리스 신전의 코린트식 기둥과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제일 아래의 기단 부분에 규암 외리 문양전과 유사한 귀문(鬼紋) 즉 도깨비 문양이 새겨져 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이빨이 새겨져 있으며, 어깨에는 갈기가 날리는 모습이며 양팔을 아래로 내리고 웃통을 벗어젖힌 모습이다. 즉 남조의 도깨비 도상이 백제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가 규암 외리 문양전에 반영된 것이다.

 

건릉 석각 석주의 기단부에 새겨진 귀문
건릉 석각 석주의 기단부에 새겨진 귀문

 

전설 속의 용과 봉황이 새겨진 문양전

반룡문전(蟠龍紋塼)은 승천하려는 용이 새겨져 있는 문양전이다. 문양전의 가운데에 용의 머리가 있고 용의 몸과 팔이 둥글게 말려 꿈틀거리는 모습이며, 바깥에는 구슬이 둥글게 이어진 연주문(連珠紋)을 이루고 있다. 용의 모습은 도깨비의 얼굴과 흡사한 모습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귀문전에 새겨진 것이 도깨비가 아니라 정면을 바라보는 용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반룡문전
반룡문전

 

용의 머리는 몸통이나 꼬리에 비해 크게 그려졌는데, 마치 원근법을 살리듯이 새겨진 점이 특징이다. 발가락의 구부러진 모양새는 백제 금동 대향로 받침 부분에 새겨진 용의 모습과도 유사하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또한 각 모서리에는 꽃무늬가 1/4로 표현되었다. 즉 4매의 문양전을 합치면 하나의 꽃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반룡문전 외에 봉황문전과 연화문전, 연화와운문전에서도 확인된다.

봉황문전(鳳凰紋塼)은 반룡문전과 비슷한 구도로 되어 있다. 중심이 되는 대상이 용이 아닌 봉황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만 다르고, 이외의 부분은 거의 유사하게 구성되었다. 봉황은 닭의 벼슬과 부리를 하고 있지만 상서로운 구름이 감싸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날개는 산수봉황문전과 마찬가지로 형상화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백제 금동대향로에서 확인되는 봉황의 존재와 전체적으로 유사한 모습으로 되어 있다는 점 또한 특징이다.

 

봉황문전
봉황문전

 

백제인의 균형 감각이 돋보이는 연꽃이 새겨진 문양전

연꽃은 연못이나 늪의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낸다. 진흙 속에 있더라도 더렵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변 환경의 극복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를 맺는다는 점은 중생이 태어남과 동시에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지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울러 고상한 기품이 있어서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는 비유도 담고 있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연꽃을 다양한 상징으로 사용하였으며, 건축물이나 조각품에서도 연꽃무늬를 자주 활용하였다.

백제에서도 연꽃은 주요 장식 소재로 사용되었다. 문양전 중에서는 연화문전(蓮花紋塼)이 대표적이다. 삼국 시대의 수많은 연화문와당과 마찬가지로 백제에서는 연화문을 전돌에 새겼다. 연주문을 두르고 있다는 점과 네 모서리에 꽃잎이 새겨졌다는 점은 앞서 살펴본 반룡문전이나 봉황문전과의 공통점이다.

 

연화문전
연화문전

 

연화문전은 연꽃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을 형상화하였는데, 가운데에는 연꽃의 씨가 배치되었다. 가운데에 1개의 씨가 있고 그 주변에 6개의 씨가, 다시 그 바깥에 10개의 씨가 있어서 총 17개의 씨가 살짝 튀어나온 모습이다. 연꽃잎은 총 10개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는 살짝 부풀고 바깥쪽은 안으로 들어가서 매우 입체적이다. 연꽃잎 안쪽에는 작은 풀잎이 새겨졌으며, 연꽃잎 사이사이에도 이파리가 새겨졌다. 백제인의 균형 감각이 유감없이 드러난다는 점이 인상 깊다.

연화와운문전(蓮花渦雲紋塼)은 가운데에 연꽃이 있으며, 그 주변을 소용돌이 모양의 구름이 감싼 형태로 만들어졌다. 연주문과 네 모서리에 꽃잎이 새겨진 점은 연화문전과 동일하다. 가운데에 동심원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8개의 꽃잎이 그려졌으며, 연꽃이 원 안에 있어 바깥의 소용돌이와 구분되었다. 소용돌이 모양의 구름 또한 8개가 새겨졌는데, 가운데의 연꽃잎과는 약간씩 방향을 다르게 하여 배치되었다. 연화와운문전은 연꽃을 감싸고 있는 상서로운 구름이 연상되는 유물로, 균형의 미가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연화와운문전
연화와운문전

 

 

상자형전
상자형전

 

참고로 이러한 연화문전과 유사한 유물이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바로 상자 모양 전돌 즉 상자형전(箱子形塼)으로, 1939년에 부여 군수리 사지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문양이 새겨진 부분을 앞면으로 보았을 때 뒷면과 윗면, 양 측면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어 속이 비어 있는 상자 모양을 하고 있다. 앞면에 연꽃무늬와 넝쿨무늬로 장식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두 종류의 무늬를 나란히 배치하고 각각에 톱니 모양의 테두리를 둘러놓았다. 이와 유사한 상자 모양 벽돌은 부여 정암리 가마터에서 발견된 바가 있으며, 이곳에서 사찰 등에 공급한 것으로도 추측된다.

 

현재에도 통용되는 규암 외리 문양전 디자인

규암 외리 문양전은 다양하고 독특한 문양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 디자인 또한 현대적인 감각으로 다가온다. 산수문전 등에서는 백제의 신선 사상이 돋보이는데, 승려의 모습도 함께 새겨져 있어서 백제에서 불교와 도교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백제 금동 대향로에서 보이는 여러 요소들은 규암 외리 문양전에서도 확인된다. 산수문전은 금동 대향로의 윗부분에 새겨진 모습과 흡사하며, 산수봉황문전은 봉황의 모습까지도 빼닮았다. 아울러 봉황문전에 새겨진 봉황과 백제 금동 대향로에 조각된 봉황 또한 서로 유사한 모습이다. 백제 금동 대향로에서 용이 몸을 둥글게 말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비튼 모습 또한 반룡문전에서 확인되는 모습이다. 이처럼 백제인의 사상은 백제 금동 대향로는 물론, 규암 외리 문양전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부여 관광지에서 확인되는 연화와운문전 보도블록
부여 관광지에서 확인되는 연화와운문전 보도블록

 

규암 외리 문양전은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부여의 여러 유적지를 가 보면 규암 외리 문양전을 복제하여 보도블록을 깐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각종 관광지의 조형물에서도 규암 외리 문양전의 디자인을 본떠 활용하는 사례들도 다수 존재한다.

규암 외리 문양전은 귀면문전의 사례로 보아 중국의 유물들을 참고하여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백제는 중국의 유물에 나타나는 디자인에만 그치지 않고, 백제만의 디자인과 감각을 접목시켜 더욱 뛰어난 유물로 만들었다. 그 미적 감각은 오늘날에도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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