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가을 기운이 서리다 입추(立秋)와 처서(處暑)
여름, 가을 기운이 서리다 입추(立秋)와 처서(處暑)
  • 편집부
  • 승인 2019.10.02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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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을 지나 8월이 다가오면 더위로 밤새 밖으로 내놓고 잠들었던 배꼽에 찬 바람이 고인다. 물놀이로 흠뻑 몸을 적시며 뛰었던 사람들도 어느덧 날이 지면 서늘함에 담요로 몸을 감싼다. 점점 해가 짧아진다. 살며시 발을 들이미는 가을의 기운에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 본다.

 

여름휴가로 한창 도로가 막히는 시기가 찾아왔다. 온종일 흐른 땀으로 입은 옷도 조금은 찝찝하게 느껴진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 하늘도 물감을 푼 듯 새파랗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낮에는 오랜 시간 야외 활동을 하기도 힘들다.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맞은 곡식들이 영글어 가기 시작하는 때이다. 그러나 여전히 태풍이 몰려오기도 하고, 갑자기 비가 쏟아져 널어 둔 빨래를 급하게 걷어 오기도 한다.

무엇보다 습한 기운 때문에 제습기를 작동시켜도 귀밑으로 땀이 뚝 떨어지는 것이, ‘한여름이란 쉬이 지나가는 계절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손등으로 턱까지 흘러 내리는 땀을 눌러 닦으며 얼음 띄운 대야에 발을 담가 본다. 물에 적신 수건을 목에 두르고, 볼에 닿은 머리카락을 아무리 높게 올려 묶어도 더위는 가시지 않는 것 같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린 탓일까. 기력이 쇠해져 눈앞이 아찔하기도 하다. 오랜 시간 푹 끓인 삼계탕과 소금 간을 한 장어가 입에 당겨 오기도 한다.

하지만 새벽에는 볕이 들지 않고 조금은 서늘한 탓에 기온 차가 느껴진다. 저도 모르게 배꼽을 보이며 누웠던 몸을 웅크리기도 하고 조금은 멀리했던 이불을 제 품으로 끌어당기기도 한다. 한여름에 차가운 바람이 머물기 시작한다. 가을이 저 멀리에서 허리를 곧추세우는 시기가 오게 된 것이다.

 

 

입추, 한여름에 가을을 맞이하다

입추는 24절기 중 열세 번째에 해당한다. 여전히 한여름인데도 밤이 되면 제법 서늘해 가을 초입의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양력으로 8월 8일 무렵이며 음력으로는 7월이다. 올해의 입추는 8월 8일에 속해 있다. 태양의 황경(黃經)이 135˚에 있을 때이고 대서(大暑)와 처서(處暑) 사이에 위치한다. 날씨상으로는 아직 후덥지근하지만 뜻밖에 이 절기부터 입동(立冬) 전까지를 동양의 역(曆)에서는 ‘가을’이라고 칭한다. 여름에 해야 할 밭일도 끝나 가 서서히 가을을 맞이할 채비를 시작한다.

옛날 중국에서는 입추의 15일간을 5일씩 3후(三候)로 나누었다. 이는 <고려사(高麗史)>에 잘 나타나 있는데, 3후는 ‘초후(初候)·’ ‘차후(次候)·’ ‘말후(末候)’로 나뉘며 “초후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차후에는 흰 이슬이 진하게 내린다. 또한, 말후에는 쓰르라미가 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려사> 6권에서는 “입하(立夏)부터 입추까지 백성이 조정에 얼음을 진상하면 이를 대궐에서 쓰고, 조정 대신들에게도 나눠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 당시에도 입추까지는 날씨가 매우 더웠다는 것을 알려 준다. 더불어 84권에는 “입추에는 관리에게 하루의 휴가를 준다”는 기록도 있다.

입추는 한 해의 풍년을 좌우했기에, 조선 시대에는 입추가 지나고 비가 닷새 이상 지속해서 내리면 조정이나 고을에서 비를 멎게 해 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 입추는 벼가 한창 익어 가는 때여서 맑은 날씨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기청제를 올리는 이유였다. 그 때문에 벼가 한창 여무는 시기에 비가 내리는 것을 가장 큰 재앙으로 여겼다. 이 기청제는 입추 무렵의 풍속에 속하며 ‘성문제(城門祭)’,

혹은 ‘천상제(川上祭)’라고도 불렸다. 가뭄이 계속되어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 비를 내려 달라고 지내는 기우제(祈雨祭)와는 반대의 제사이다.

 

 

이와 비슷하게 입추에는 날씨를 보고 점을 치기도 했는데, 이때 하늘이 맑고 청명하면 풍년이라고 여겼다. 반대로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그나마 길한 편이지만, 너무 많이 내리면 벼가 상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또한, 천둥이 치면 벼의 수확량이 떨어지고, 지진이 나면 다음 해 봄쯤 소와 염소 등 가축들이 죽는다고 점치기도 했다. 특히 입추에는 미리 무와 배추를 심어 김장을 대비하기도 한다. 농촌에서는 참깨나 옥수수를 수확 하는 시기로 이 무렵에는 김매기가 끝나는 시기라 농촌이 한가해지기도 하지만, 잦은 태풍과 장마로 인해 논에서는 병충해 방제를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태풍으로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느라 분주한 때이다.

서남해안에서는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때 달과 태양이 일직선상에 놓여 밀물과 썰물의 차가 가장 크게 벌어진다는 ‘사리 현상’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저지대는 침수가 되기도 하고 농작물이 해를 입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기도 한다. 물이 불어나면 논둑이 무너지기 때문에 논둑 돌보기에도 힘을 써야 한다.

모내기하는 5월, 벼가 자라는 6월, 알이 차오르는 7월을 지나 씨를 맺기 시작하는 8월에 접어들며 벼꽃이 피어난다. 이때 수십, 수백 개의 알갱이가 영글면 밥상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입추에는 강낭콩 꼬투리가 맺혀 일찍 여문 풋콩을 찾아 밥에 함께 넣어 먹는다. 토마토가 빨갛게 익어 가고 한 아름 따온 오이로 오이지를 담근다. 가지로 반찬을 해 두고 단호박, 애호박, 호박잎을 따다가 온갖 국과 전을 해 먹는다. 메밀을 솎아다가 나물을 하고 깻잎을 따서 김치도 한다. 수박은 제철을 맞아 속살이 빨갛고 복숭아는 과육이 달곰하게 익어 맛이 좋다.

 

처서, 더위가 물러나고 가을바람이 불어오다

처서는 24절기 중 열네 번째에 해당한다. 이제 여름이 지나고 더위가 잦아들며, 신선한 가을을 맞게 된다는 의미가 있다. 입추(立秋)와 백로(白露) 사이에 들며, 음력 7월을 가리키는 중기(中期)이기도 하다. 올해는 양력 8월 23일, 음력으로도 7월 23일에 위치한다. 입추까지만 해도 기승을 부렸던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완연한 가을이 시작된다.

옛 중국의 <고려사> 50권에서는 “처서의 15일간을 5일씩 3분한 3후 중 초후에는 매가 새를 잡아 놓기도 하고, 차후에는 천지에 풀과 나무가 말라 죽기도 하는 서늘한 가을 기운이 돈다. 말후에는 논에 곡식이 익어 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가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을 타고 온다’라고 할 정도로 여름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가을이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되는 때이다. 이를 통해 <고려사>는 자연의 변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처서가 지나면 햇볕도 누그러져 풀이 더 자라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를 기회 삼아 논두렁의 풀을 깎거나 산소를 찾아가 벌초를 하곤 한다. 옛 부인들과 선비들은 이 무렵에 여름 동안 장마에 젖은 옷이나 책을 바람이 통하는 음지나 햇볕에 말렸다. 이를 ‘음건(陰乾)’과 ‘포쇄(曝曬)’라고 했다.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맴돌아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는 속담이 나올 정도였다. 날이 서늘해지면 모기의 극성도 사라지고 귀뚜라미가 나오기 시작한다. 농부들은 그동안 썼던 쟁기와 호미를 깨끗하게 씻어 갈무리한다. 농사철 중에 비교적 한가한 때라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는 어정거리며 7월을 보내고 건들거리면서 8월을 보낸다는 말이다. 이처럼 처서에 나온 속담 중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줄어든다’는 말이 있는데, 처서에 오는 비를 ‘처서비(處暑雨)’라고 하여 처서비가 내리면 흉년이 든다는 뜻에서 생긴 속담이다.

비가 내리면 곡식에 빗물이 들어가 결국 썩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처서비는 농사에 유익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어 몹시 꺼리게 되었다. ‘어정뜨기는 칠팔월’이라는 속담은 ‘어정칠월 건들팔월’과 언뜻 비슷하게 들리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몹시 엉뚱하여 덤벙대기만 함’을 비유한 속담으로 그 뜻이 다른 표현이다.

처서 무렵의 날씨는 가을이 왔다고는 해도 여전히 햇살이 왕성하고 맑아야 벼가 성숙할 수 있기 때문에 한 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아무리 한가로운 7월과 8월을 보내도, 한결같이 날씨에 관심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처서에는 현미밥을 주로 먹으며 옥수수를 쪄 간식으로 먹는다. 간혹 옥수수 알갱이를 넣어 옥수수밥을 해 먹기도 한다. 농촌에서는 가을걷이를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바로 참깨다. 제때 걷어야 참깨 알이 쏟아지지 않기 때문에 참깨를 먼저 거두는 것이다. 단호박은 쪄서 죽으로, 혹은 호박전으로도 먹었으며 이 시기까지 방울토마토가 나온다. 입추가 지나 늙은 오이가 군데군데 달려 있고 들깻잎이 쇠어진다. 산버섯이 돋아나기 시작하는데 김칫거리가 마땅치 않아 고구마 대를 꺾어 김치를 해 먹기도 한다. 복숭아가 제철이라 당도가 높고, 포도는 아직 채 익지 못해 신맛이 강한 편이다. 처서에는 새로 나오는 작물이나 과일이 없는 편이라 입추에 나온 것들을 그대로 이어 먹는다. 가을이 다가오니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다 처서가 가을의 시작인 만큼 <농가월령가>에서는 처서의 풍경을 온연히 담아내고 있다. 고된 농가의 일이 조금씩 줄어들며 그동안 일구었던 논밭을 돌아보는 농부들의 한숨 돌리는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팔월이라 중추(中秋)되니 백로 추분 절기로다

북두성 자루 돌아 서천을 가리키니

선선한 조석(朝夕) 기운 추의(秋意)가 완연하다

귀뚜라미 맑은 소리 벽간에 들리누나

아침에 안개 끼고 밤이면 이슬 내려

백곡(百穀)을 성실하고 만물을 재촉하니

들 구경 돌아보니 힘들인 일 공생하다

백곡의 이삭 패고 여물들어 고개 숙어

서풍에 익는 빛은 황운(黃雲)이 일어난다

백설 같은 면화송이 산호 같은 고추다래

처마네 널었으니 가을볕 명랑하다”

- 농가월령가 8월 中 -

 

 

가을이 오면 찌는 듯한 더위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밤이 벌써 저만치 도망치는 것 같다.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간지럽힌다. 농사꾼들도 잠시 쉬어 가는 이 계절, 그동안 무더위로 조금은 지쳤던 몸과 머리를 창가에 두고 선선하게 잠을 청해 보는 것은 어떨까.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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