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 문화유산 성당기행 첫 번째 이야기 ]
[ 근대 문화유산 성당기행 첫 번째 이야기 ]
  • 이현정 기자
  • 승인 2019.10.0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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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강화성당과 온수리성당

 

성공회강화성당 옛날 사진
성공회강화성당 옛날 사진

 

근대문화재에 애정을 가지고 있던 필자가 성당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장 원형 그대로, 다양하게 보존된 근대문화재가 바로 성당이었기에. 더구나 이 성당들은 문화재로 보존만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믿음으로 세운 선조부터 지금의 후손들까지 함께 사용하고 있는 곳이라서 더욱 그 의미가 깊다.

필자는 건축과 역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건축물이란 돌과 흙으로만 동떨어져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축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외국 문물에 대한 개방과 함께 지어진 우리의 성당들도 건축물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다양한 이야기들도 함께 들려줄 것이다. 그리하여 시작된 근대 문화유산 성당기행 첫 번째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성당 두 곳이 있는 강화도에서 시작해 보기로 하자.

강화군청 근처 철종이 강화도령 시절에 살았던 용흥궁을 지나 언덕길을 올려다보면 전체적으로 방주 모양의 형태로 지어 올린 한옥 한 채가 하늘로 날아갈 듯 솟아있다. 바로 성공회강화성당이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성당이며, 역사상 중대한 사건과 시설의 자취를 기념하여 국가에서 지정한 사적 제424호이다. 성공회유지재단 등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는데, 일명 ‘성베드로와 바울로성당’이라고도 한다.

1896년 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김희준이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1899년 1대 성공회 주교인 코프 신부가 조선 후기 천주교도들의 처형지인 강화도에 있던 군영인 진무영 순교성지를 포함한 견자산 언덕마루 3000여 평을 사들여 성당 건립을 시작했다. 그 후 제2주교 터너 신부를 거쳐 3대 주교인 트롤로프 신부가 이어 받아 성당을 완공하게 되었다. 이때에 경복궁의 재건으로 성당의 목재인 소나무가 부족하게 되자 신의주에서 직접 백두산 적송을 공수하였고, 경복궁 재건 책임자였던 도편수가 성당 건립에도 참여하여 1900년 11월 15일 이곳 강화에 한국 최초의 한옥성당을 세우게 되었다.

 

솟을대문
솟을대문

 

신미양요, 병인양요를 겪으며 프랑스와 미국에게 반감이 있었던 강화도에서 고종의 부탁으로 수군의 지휘관 양성에 도움을 주겠다며 해군사관학교의 원조격인 조선수사해방학당을 건립한 영국인과 성공회는 좀 더 호의적으로 받아 들여졌다. 이에 힘을 얻은 영국 성공회는 미국의 개신교와는 다르게 시내 중심부에 자연스럽게 진입할 수 있었다. 거기에 트롤로프 신부는 조선의 문화와 현실을 수용하여 성공회가 자연스럽게 조선에 녹아들어 갈 수 있도록 토착화 선교정책을 펼쳤는데, 최초의 한옥성당인 성공회강화성당을 보면 그것이 잘 드러나 보인다.

오래전 이 성당을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일반적인 성당 건축물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낯설음과 익숙함이 공존하는 아주 묘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계단을 올라 솟을 대문 위에 한문으로 써진 대한성공회강화성당이라는 현판을 보지 않았다면 처음 찾는 사람은 이곳이 성당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할 것이다. 대문에 커다랗게 그려진 태극 문양 위에 십자가 표시가 이채롭다. 대문의 윗측과 양쪽에 세워진 홍살과 태극을 단 행랑창이 있는데, 태극은 전통적으로 악한 것을 몰아내고 길운을 바라는 의미이다. 이 태극무늬는 성당 외관 여러 곳곳을 조화롭게 장식하고 있다.

 

강화성당 정면
강화성당 정면

 

 

강화성당 측면
강화성당 측면

 

솟을대문을 지나 내삼문을 거치면 적색과 청색의 단청이 화려한 2층 한옥이 나타난다. 기와지붕 위 용마루 끝에는 강화성당의 소박한 십자가가 보이고 한옥의 정면에는 ‘천주성전(天主聖殿)’ 이라고 호방하게 쓰인 한문 현판이 보인다.

예수님의 12제자를 연상케 하는 용머리 12개가 추녀마루의 끝에 올라앉아 있는데 1층은 나무와 벽돌로 만들고, 2층은 격자무늬 유리창이 달려 있다.

또 한옥의 측면에 두 개, 옆면에 하나씩 있는 이채로운 아치 출입문은 트롤로프 신부가 영국에서 직접 가져다 달았다고 하는데 더구나 문 안쪽은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Union Jack)의 모양이라 전통의 한옥과 영국 문화의 조화가 감탄스럽다.

강화성당은 외부공간은 경사지의 대지에 계단, 외삼문ㆍ내삼문ㆍ성당ㆍ사제관을 동남향으로 배치한 불교사찰의 구릉지 가람 형태를 따르고, 교회의 내부공간은 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을 따랐다. 특히 보통 가로 축에 문이 있는 한옥의 구조와 달리 세로의 긴 축에 문을 만들었는데, 전통 목조 중층한옥의 축을 바꾸어 서양의 바실리카 건축 양식을 잘 조화시킨 획기적인 기법으로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강화성당 내부
강화성당 내부

 

외부의 한옥 느낌과는 다르게 강화성당의 내부에 들어서면 회랑으로 나눠진 예배석과 천장에 드리워진 상들리에, 자연 채광이 들어오는 2층의 유리창에서 유럽식 성당의 느낌이 강해진다. 여기에 한옥의 벽이나 기둥에 한시나 한자를 써서 걸어 놓는 전통적인 주련들이 걸려 있는데, 자세히 보니 성경 구절이 한자로 적혀 있다. 동서양의 조화로움이 아주 인상적이다.

성공회강화성당의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을 따랐다. 일반적으로는 바실리카 양식이란 가톨릭 성당의 원형에 해당하는 회랑이 긴 내부 구조를 가리키는데, 기본형식은 회랑풍의 앞뜰이 있고, 건물 내부에 현관에 이어진 전실, 줄지어 늘어선 기둥인 열주로 구성된 내당과 내당의 양쪽에 측랑, 제단과 후진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강화성당은 이러한 바실리카양식을 한옥에 적용하여 건물의 앞쪽에 툇마루를 만들어 전실의 효과를 냈고, 안에는 2층의 높은 기둥 고주를 열주로 하여 내당을 만들고 그 안쪽에는 지성소를 모셨으며, 뒤에 후진의 공간을 만들어 예복실로 사용했는데, 이 역시 서양의 건축 양식을 한옥의 전통 건축과 훌륭하게 조화시킨 것이다.

 

강화성당 세례대
강화성당 세례대

 

강화성당의 의례물인 제대 및 세례대는 1900년 건축 당시 강화도 지역의 화강암을 재료로 제작되었으며 세례대에는 수기세심거악작선(修己洗心去惡作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자신을 닦고 마음을 씻으며, 악을 떨쳐 선을 행한다는 뜻이다. 이것 역시 종교의 토착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서 등록 문화재 제70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당 앞마당 오른쪽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보리수나무를, 왼쪽에는 유교를 상징하는 회화나무를 심어서 전통과의 융합을 보여 주었는데, 회화나무는 태풍 볼라벤 때에 부러져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어 안타깝다.

최초의 한옥성당, 최고의 동서양 문화융합 사례로 불리는 이 특별한 강화성당이 지난 백십여 년간 그랬듯 앞으로도 믿음의 귀한 역사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온수리성당 옛 모습
온수리성당 옛 모습

 

강화도엔 또 하나의 특별한 한옥성당이 있는데 바로 성공회온수리성당이다. 이 온수리성당 역시 성공회 3대 주교인 트롤로프 신부가 강화성당에 이어 1906년에 건축했다. 성 안드레아성당이라고도 하며 2003년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

1897년 성공회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로스는 따뜻한 지하수가 나오는 온수리에서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1898년 1월부터 9개월간 여러 마을의 242가정을 돌아보면서 3,528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헌신적으로 의료 활동을 하였을지 짐작이 간다. 로스의 의료 선교 활동으로 그에게 치료받은 환자들은 대개 성공회 신자가 되었고 거기에 1904년 힐러리 신부가 진명학교를 시작하면서 학생들의 전도를 받은 부모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1906년에는 영세 희망자가 100명이 넘을 정도로 신자수가 증가하였다. 이에 기존에 예배당으로 쓰던 곳을 허물어 15칸의 한옥을 증축하기로 하였으나 원래 교구가 계획한 규모보다 약 두 배가 늘어난 27칸의 전통 한옥으로 성당을 만든다. 평신도들이 열성을 내어 땅을 기증하고 특별헌금을 마련하였고, 자발적으로 일손을 보태고 기둥을 다듬고 기와를 구웠다고 한다.

 

종루 전체의 모습
종루 전체의 모습

 

이 온수리성당의 특별한 점이 거기에 있다. 강화성당이나 다른 지역의 교회와 달리 선교본부의 지원이나 사제들이 주도가 아니라 시작부터 건립까지 모두 신도들의 힘으로 이뤄낸 대한성공회 최초의 성당이라는 것이다.

강화읍 성당처럼 야트막한 계단을 지나 외삼문 형식의 종루를 통해 들어간다. 하지만 당시 무덤이 많았던 주변의 대지 조건 때문에 종루와 성당, 그리고 사제관이 강화성당처럼 한눈에 보이는 일직선은 아니다.

조선 시대 성곽의 망루를 본떠서 만든 솟을지붕의 종루에는 쇠 종이 매달려 있고, 아래층은 출입구지만 문을 만들지 않아서 종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게 만들었다. 문득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줄을 잡아당겨 낭랑한 종소릴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루에 매달린 종
종루에 매달린 종

 

정문을 들어서면 정문과 직각 축으로 바로 만나는 온수리성당은 정면 3칸, 측면 9칸, 도합 27칸 되는 단층 팔작지붕의 전통 한옥이다. 이 성당도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전통 한옥의 축을 바꿔서 가로가 아닌 세로축에 입구를 만들었다. 성당 서쪽면이 정면 출입구가 되고 두 짝의 양식 판문으로 문짝을 달았다. 양측에는 유리 창문을 설치해 채광에 신경을 썼고, 밑은 벽돌을 쌓아 벽체로 하였다. 건물의 동쪽 면은 중앙에 양식 판문 한 짝을 설치하여 본당 뒷문으로 삼았다.

건물 정면 처마 밑에는 연꽃 문양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토착종교인 불교와의 조화도 생각했을까,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에 성서적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정면 입구 위에 성안드레성당이라고 한글로 써진 나무 현판이 왠지 정겹다.

 

온수리성당 정면
온수리성당 정면

 

 

온수리성당 측면
온수리성당 측면

 

지붕 용마루 양쪽에는 소박한 십자가 장식을 세웠고, 지붕 양쪽 끝 합각 벽면에도 벽돌로 새긴 십자 장식을 하였다. 강화성당처럼 유리창이 달린 중층도 아니고 강렬한 색의 단청이 칠해진 것도 아니어서 압도하는 느낌은 없지만, 온통 나무의 자연스러운 색이 가득한 이 단아한 한옥에서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소박하지만 꼿꼿한 의지를 가진 선비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 본다.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긴 회랑을 가진 바실리카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재의 구조와 색을 그대로 드러낸 투박한 내부는 12사도를 상징하는 12개의 기둥으로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강화성당의 구조와 달리 회중석 가운데 복도가 남녀석을 구분되어 있으며 직사각형의 제단인 후진이나 빛을 끌어 들이는 고창등이 생략된 바실리카 구조로 되어있다.

2004년에 옆으로 서울성공회성당과 비슷하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새 성전이 축성되었기 때문에, 현재 온수리성당은 예배당이 아닌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안에는 성공회 유물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100년이 넘은 나무들이 천장을 받히고, 오래된 난로와 빛바랜 사진, 예복과 낡은 성경책들을 보고 있으니 시간이 고스란히 멈춘 것만 같았다.

 

온수리성당의 내부
온수리성당의 내부

 

 

온수리성당 전시 자료
온수리성당 전시 자료

 

성당 옆에는 ‘ㄷ’자형으로 배치된 한옥 사제관이 있는데, 트롤로프 신부가 1896년 강화도에 부임하여 선교를 시작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 건물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제관 외부는 한옥이지만 내부는 사제의 생활에 맞게 조금씩 변형되어 영국인 사제가 한국 전통 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여 왔는가를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온수리성당은 선교와 의료뿐 아니라 교육 사업도 활발했는데 1906년 설립한 진명학교가 지금의 길상초등학교가 되었다.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에도 가담하여서 원래 주일이나 대축 일을 알리는 교회의 깃발이 일본에 대항하는 저항군들에게 적진의 상황을 전달하는데 쓰이기도 했다.

근대 문화유산 성당기행 첫 번째는 조선인의 삶 속으로 다가와서 융합하려는 성공회의 신념이 남긴 아름다운 결과물, 최초의 한옥성당 두 곳의 이야기를 해보았다. 건축과 역사가 많이 다르지 않다고 여기듯 종교와 생활도 크게 유리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허허로운 바람이 불어올 때 훌쩍 떠나 보면 어떨까. 백년을 넘게 삶을 지켜온 믿음의 유산이 이야기를 걸어오는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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