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향기를 머금은 태화산 마곡사
천년의 향기를 머금은 태화산 마곡사
  • 송영대 기자
  • 승인 2019.10.08 1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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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21년 전인 1898년, 한 청년이 공주의 조용한 사찰을 찾아왔다. 그 청년은 스님이 되어 절간에서 지내다가 다시 속세로 나아갔다. 그리고 약 50년이 지나 그 청년은 중년의 신사가 되어 다시 사찰을 찾아 젊은 시절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 청년은 독립운동가 김구였다. 천년의 사찰에 김구가 다시 찾아왔듯이, 필자 또한 수년 전에 찾아왔던 마곡사를 다시 찾아왔다. 기존에는 조용한 절간을 여행 삼아 찾아왔다면, 이번에는 유네스코에 지정된 사실을 상기하며 다시 사찰을 찾게 되었다.

 

태화산 마곡사 경내
태화산 마곡사 경내

 

2018년 6월 유네스코에서는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이름으로 7곳의 전통사찰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에 해당하는 사찰로는 양산의 통도사, 영주의 부석사, 안동의 봉정사, 보은의 법주사, 순천의 선암사, 해남의 대흥사 그리고 공주의 마곡사가 있다. 모두 천년의 역사를 지닌 오래된 전통사찰들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의 불교문화를 그대로 보여 주는 곳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충청도에서는 보은의 법주사와 공주의 마곡사가 선정되었다. 명실공히 두 사찰은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를 대표하는 사찰 이라 할 수 있다. 법주사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목탑과 현대에 만든 금동미륵대불이 함께 있어, 현재와 전통이 공존하는 느낌이다. 반면 마곡사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의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마곡사로 들어서는 길
마곡사로 들어서는 길

 

봄에는 마곡사, 가을에는 갑사

공주를 대표하는 사찰은 크게 4곳이 있다. 마곡사를 비롯하여 동학사, 갑사, 신원사가 이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도 마곡사는 대전·충남 지역 70여 사찰을 관장하는 대본산으로,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봄 경치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마곡사가 처음 세워진 것은 643년 자장율사에 의해서라고전한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자장율사는 신라의 고승이며, 당시 공주는 백제의 영토에 해당하였다. 더구나 산에 사찰을 짓는 것은 선종의 전통으로,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서야 산사가 조성되었다. 때문에 삼국 통일 이전에 마곡사가 자장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는 후대에 마곡사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생각된다.

마곡사는 고려 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1172년에 중건했다고 하였다. 오히려 지눌의 중건 시점이 곧 마곡사 창건 시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곡사라는 이름은 신라의 보철화상이 법문을 열 때 모인 대중들이 삼밭(麻田)의 삼대(麻)와 같이 많다고 하여, ‘마(麻)’가 모인 계곡이라 하여 마곡사라 이름 지은 것이다.

 

 

마곡사는 〈택리지>나 〈정감록>에서 전란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고,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십승지지(十承之地)의 한 곳으로 손꼽힌다. 풍수지리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지역들을 손꼽았는데 이곳은 속세와 적당히 떨어져 있으면서, 산과 물이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데 좋은 위치에 해당한다. 바깥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십승 중 하나로 꼽히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외부로부터 차단되는 점 때문에, 통일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는 도적떼의 소굴로 200년 간 사용되기도 한 어두운 과거도 존재한다.

 

태화천 옆길을 따라 마곡사로 들어서다

마곡사는 운암마을에서 천천히 걸어서 들어간다. 주차장을 마주하고 기념품점과 밥집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을 지나 마곡사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마곡사로 들어선다. 마곡사로가는 길에는 ‘태화산 마곡사(泰華山麻谷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절의 첫 출입구인 일주문을 지나게 된다. 보통 일주문은 두 개의 큰 기둥으로 버티고 있는데, 마곡사의 일주문은 그 이름과는 달리 작은 기둥이 중앙 기둥을 함께 받치고 있어서 사실상 삼주문인 셈이다.

마곡사로 들어가는 길은 태화천 옆으로 조성되어 있다. 바위와 계곡 사이에 길이 나 있는데, 태화천이 매우 구부러진 모습으로 흐르고 있다. 때문에 태화천의 흐름을 태극의 모습에 비유하기도 한다. 마곡사 경내는 태화천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나뉘어져 있으며, 자연스럽게 남쪽에서 북쪽으로 진입하게 된다.

 

해탈문
해탈문

 

해탈문(解脫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은 마곡사의 정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로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한다. 중앙 통로 양편에 금강역사상과 보현동자, 문수동자상이 자리하고 있다. 1864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기에, 그 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금강역사는 웃통을 벗은 모습임에 반해, 마곡사의 금강역사는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며, 그 표정이 익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천왕문
천왕문

 

천왕문(天王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2호)는 해탈문을 이어 마곡사의 2번째 대문으로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안쪽에는 동서남북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인 사천왕상이 자리하고 있다. 사천왕은 천상계의 가장 낮은 곳인 사천왕천의 동서남북 4지역을 관장하는 존재로, 부처님이 계시는 수미산의 중턱 사방을 지키면서 인간들이 불도(佛道)를 따라 사는지 살피면서 그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천왕문의 서편에는 명부전(冥府殿,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4호)이 위치한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중앙에 두고, 양편에 염라대왕을 비롯하여 저승에서 인간의 죄를 벌로 다스린다는 시왕(十王)들을 모셔 놓았다. 1939년에 건립되었는데, 단청의 색이 오래되어 고색창연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는 세상을 먼저 떠난 이를 위한 천도재가 이루어진다.

 

마곡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돌다리
마곡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돌다리

 

마곡사 북쪽 경내
마곡사 북쪽 경내

 

다리 건너 개울 건너편의 경내를 거닐다

마곡사의 가람 배치는 크게 태화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나뉜다. 남쪽에는 앞서 살펴보았던 해탈문과 천왕문, 명부전을 비롯하여 매화당, 국사전, 영산전, 홍성루, 수선사가 자리하고 있다. 해탈문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면 중심 건물들이 위치한 북쪽의 가람으로 이동하게 된다.

북쪽 가람의 중심에는 마곡사 오층석탑(보물 제799호)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석탑은 고려 말기에 티베트불교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탑으로 다보탑이라고도 불린다. 2층의 기단 위에 5층으로 탑신을 쌓아 올렸으며, 탑의 제일 윗부분에 해당하는 상륜부에는 청동으로 된 장식을 씌워 놓았다. 1층 탑신에는 자물쇠를 새겼으며, 2층 탑신에는 사방을 수호하는 사방불을 새겨놓았다. 상륜부에는 티베트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한, 라마탑에 보이는 풍마동(風磨銅) 장식을 두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에 해당한다. 대광보전 화재 때에 훼손되어 원래의 탑재가 아닌 화강암으로 보수한 부분들도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고려 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고려 후기에는 몽골의 침입과 내정간섭을 통해, 몽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는 정치·사회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불교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몽골제국에서는 티베트 불교 즉 라마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 영향이 고려에도 미치게 되었다. 마곡사 오층석탑은 고려 말기 라마교의 영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마곡사 오층석탑
마곡사 오층석탑

 

마곡사 오층석탑의 상륜부
마곡사 오층석탑의 상륜부

 

티베트에서 조성된 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석탑이나 목탑의 형태와는 다르게 둥그스름 하면서도 고깔을 씌운 듯한 모습을 한 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마곡사 오층석탑은 고려의 전통적인 탑 양식과 티베트 불교의 양식이 함께 어우러져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서로 이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대광보전(大光寶殿, 보물 제802호)은 대웅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本殿)에 해당하는 주요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탔지만, 1813년에 다시 지어졌다. 건물 내부에는 진리를 상징하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 동쪽을 바라보며 모셔졌으며, 불상 뒤에 그려진 후불탱화로는 영산회상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91호)가 봉안되어 있다. 건물 내부의 바닥에는 참나무로 만든 돗자리가 깔려졌으며, 전면의 창호에는 다양한 꽃살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대적광전
대적광전

 

대웅보전은 대광보전의 뒤편에 위치하며, 서로 위아래로 배치된 구도를 하고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801호) 역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51년에 각순대사에 의해 중수되었다. 본래는 대장경을 보관하는 대장전(大藏殿)으로 지었다고 기록되었으나, 언제부터 대웅보전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외관상으로는 2층 건물 형태로 되었지만, 내부는 하나의 공간이다. 건물 내부의 중심에는 석가모니불이 있으며, 좌우에는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있다. 즉 마곡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상(충청남도 유형문화제 제185호)에 해당한다. 현존하는 전통 목조건축물 가운데 많지 않은 중층 건물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대웅보전
대웅보전

 

마곡사를 기억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건축물

마곡사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있다. 각 건물들이 모여서 가람을 구성하며 사람들에게 기억을 남겨준다. 또한 건물 내에 부처님이나 큰스님을 모셔서 또 다른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조사전(祖師殿)은 사찰에 계셨던 큰스님들을 모셔놓은 건물이다. 주로 큰스님의 진영 즉 초상화를 걸어 놓으며, 그들의 업적을 기억하는 역할을 한다. 마곡사 조사전의 중앙에는 큰스님 3명의 진영 즉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조사전
조사전

 

이 중에서도 중앙에 가장 크게 만들어진 게 불일 보조국사 지눌의 진영이며, 그 양옆으로는 신라의 승려였던 옥룡사 도선국사 진영과 개산조 자장율사 진영이 있다. 이 외에 호세 범일국사 진영, 서산대화상 휴정 진영,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대선사 유정 진영이 있다,

마곡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이는 신라의 고승인 자장율사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내력으로 보았을 때 그가 마곡사를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마곡사 또한 이 점에 착안하여 자장율사보다는 보조국사를 중심에 두었다. 사실상 창건자를 보조국사 지눌로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눌이 도적떼를 몰아내고 사찰을 창건하였다는 설화도 상기한다면, 본래 이곳은 사찰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적광전의 옆모습
대적광전의 옆모습

 

응진전(應眞殿,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5호)은 아라한전이라고도 하며, 1852년에 중수되었다. 석가모니의 제자 혹은 불교의 수행자들을 아라한 혹은 나한이라고 한다. 응진전은 아라한을 모신 전각을 의미하며, 석가모니불이 가운데에 위치하고 양쪽에 아난과 가섭이 협시불로 모셔졌다.

삼존불의 주변에는 16나한상이 있으며 끝에는 불법의 수호신인 법천과 제석천의 존재가 함께 모셔졌다. 16나한은 수행을 완성하여 성자의 지위에 오른 존재를 의미하며, 중생에게 복을 주고 바른 법으로 인도하는 불제자를 의미한다. 건물 내부에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가 자리한 다포식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이렇게 조립된 공포의 구조가 건물 내부에까지 그대로 나타나서 독특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다.

 

백범 김구와 함께 걷는 마곡사

독립운동가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젊은 시절에 마곡사에 머물면서 승려 생활을 하였다. 김구는 대한제국 말에 명성황후 시해사건 즉 을미사변에 가담한 것으로 생각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壞亮)를 타살한 치하포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김구는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고 승려로 위장하였다. 당시 김구는 1898년에 마곡사로 와서 승려생활을 하였으며,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게 되었다.

마곡사에서는 이러한 김구와의 인연을 기억하면서, 그와 관련된 지역들에 관련 지명 안내를 하고 있다. 마곡사 뒤편에 가면 백범 명상길이라는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다. 즉 백범 김구가 은둔생활을 하면서 산책을 하였던 길을 지정한 것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백범 김구선생 삭발터’라는 곳이 나온다.

 

백범 김구 선생 삭발터
백범 김구 선생 삭발터

 

〈백범일지>에서도 당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사제 호덕삼이 머리털을 깎는 칼을 가지고 와서 냇가로 나가서 삭발을 시켜주었다는 내용이다. 김구는 이미 결심을 굳히고 삭발을 하였다. 그렇지만 막상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을 때, 김구의 눈물도 함께 떨어졌다고 기록되었다.

마곡사의 중심인 대광보전의 서편에는 백범당(白凡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곳은 백범 김구가 머물렀던 곳으로, 본래 이름은 심검당이었다. 백범당의 벽면에는 김구와 관련된 여러 글씨와 사진들을 걸려 있다. 또한 백범 김구의 사진을 실제 크기에 맞춰 입간판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였다.

김구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 이후에 충청남도를 방문하였다. 그는 자신의 옛 기억을 떠올리며, 지난날 잠시 승려생활을 하였던 마곡사를 찾았다. 마곡사에서 김구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을 배경으로 함께 방문한 사람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또한 옛 기억을 떠올리면서 향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백범당과 김구 선생의 사진
백범당과 김구 선생의 사진

 

혈기왕성하였던 젊은 날에 마곡사에 왔던 김구는 어느덧 중후한 중년의 독립운동 지도자가 되어 돌아왔다. 김구는 50년 전, 일본에 악감정을 품었던 청춘 시절을 회상하면서, 독립을 맞이한 조국을 다시 한 번 떠올렸을 것이다. 김구가 방문 하였을 적에 마곡사는 예전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50년은 긴 세월이지만, 천년고찰에 있어서 50년은 어찌 보면 찰나와 다를 바가 없다. 김구는 백범당의 마루에 걸터앉아 옛 추억을 다시금 되뇌면서 이 풍경을 영원한 기억에 간직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마곡사와 함께 김구도 함께 기억하며, 김구가 바라보았던 풍경을 함께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다시금 역사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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