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역사 산책
도심 속 역사 산책
  • 이정현 기자
  • 승인 2019.10.08 12:3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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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숲을 거닐다 보면 문득 자연의 흙내음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있다. 가끔은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벗어나 가까운 도심 속 자연을 거닐어 보는 것은 어떨까.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자리한 효창공원은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좋은 휴식의 공간이 된다. 효창공원의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를 걷다 보면 푸르른 자연의 모습만이 아니라 일평생 소나무와 같은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의 마지막 흔적 역시 마주할 수 있다. 8월, 광복절을 맞이하여 효창공원 안에서 독립운동가의 삶과 그 의미를 되새겨보도록 하자.

 

효창공원 정문
효창공원 정문

 

서울 효창공원은 시민에게 개방된 공원인 동시에 사적 제330호로써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일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은 담벼락 너머에 두고 온 것만 같은 고요함만이 존재하는 효창공원에서 위로를 받는 것은 현대인만이 아니다.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독립운동가에게도 효창공원은 안식의 공간이 된다. 김구 선생과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와 안중근 의사 그리고 이동녕 선생과 조성환 선생, 차리석 선생 등 나라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친 소중한 분들이 이 효창공원에 잠들어 계시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 묘소
김구 선생 묘소

 

효창공원 북쪽의 가장 높은 동산 위에는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묘소가 자리해 있다. 당신의 소원으로 대한의 자주독립을 목이 터져라 외쳤던 선생의 묘소는 비교적 단출했다.

봉분 좌우에 자리한 돌기둥인 망주석과 더불어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내쫓는다는 장명등, 그리고 영혼이 나와 앉아서 후손들이 올리는 제수를 흠향한다는 혼유석과 묘비를 제외하고는 봉분 뒤에 병풍처럼 위치한 자연이 전부였다. 흔한 호석 하나 없었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출발점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에 참여했다. 더불어 임시정부의 주석을 맡아 독립운동을 지휘·전개했다. 그의 일평생 단 하나의 소원이었던 광복 이후에는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생이었으나 1949년, 안두희의 총격으로 말미암아 효창공원에 영면하게 되었다.

개인보다 민족을 우선으로 했던 선생의 삶과 그 정신을 온전히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선생의 묘소 옆에는 그의 삶과 사상을 소개하는 ‘백범김구기념관’이 자리한다. 독립 운동사의 큰 별인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더욱 알고 싶다면 함께 방문할 것을 권한다.

 

삼의사 묘역
삼의사 묘역

 

김구 선생 묘역의 동쪽 언덕에는 삼의사(三義士)의 묘가 자리해 있다. 분명 삼의사 묘역이지만 이곳에 자리한 묘는 4기이다.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그리고 백정기 의사의 유해는 이곳 묘역에 안치되어 있으나 안중근 의사의 경우 안타깝게도 아직 그 유해를 찾지 못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후일을 기약하며 가묘(假墓)를 마련하였다.

제각기 다른 인생을 걸어오셨던 4분 모두 한 묘역에 자리해 계시지만 주목할만한 점은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는 앞서 살펴본 김구 선생과 함께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했지만, 그와 반대로 백정기 의사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이다.

한인애국단은 193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하여 일제의 주요인물을 암살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이다. 삼의사 묘역에 잠든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 역시 한인애국단의 단원이다. 이봉창 의사(1901-1932)는 1932년, 당시 중일전쟁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등 일본의 팽창주의에 가담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불행히 폭탄은 일왕에 명중하지 못했고 이봉창 의사는 체포되어 그해 10월 순국하였다.

윤봉길 의사(1908-1932)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진행된 일제의 전승기념 겸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식장에 잠입해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그 결과 7명의 일제 요인이 즉사 혹은 중상을 입었고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순국하였다.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거사는 대한의 독립운동만이 아닌 중국의 항일운동 세력에서도 주목했다. 이봉창 의사의 거사에 관하여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라고 보도했다. 또한,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관하여 중국의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평했다. 당시 얼어붙은 한·중 관계를 녹여준 작지만 거대한 움직임이었다.

백정기 의사(1896-1934)는 3·1운동 이후 외국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이다.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는 각각 무정부주의, 무정부주의자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정부 체제’에 대한 것만이 아닌 사회 일반의 제도화된 정치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 등을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 혹은 그러한 활동가를 의미한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략 사건인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백정기 의사는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 남화아나키스트연맹,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등 아나키즘 세력을 중심으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했다. 1932년과 1937년 상해에서는 ‘상해사변’이라 일컫는 중국과 일본 간의 무력충돌사건이 발생했다. 제1차 상해사변 이후 항일구국연맹은 ‘흑색공포단’을 조직했으며 이는 일제 기관 파괴와 주요인물의 암살을 목적으로 했다.

1933년, 백정기 의사는 일본 주중 공사인 아리요시를 상하이 육삼정에서 사살하고자 했으나 일제의 밀정으로 말미암아 실패하여 1934년 6월, 순국하였다. 아라요시 암살은 실패로 끝났지만 ‘육삼정 사건’은 실패가 아니었다. 육삼정 사건은 우리의 항일의식은 물론 대륙을 침략하고자 하는 일제의 음모를 폭로시킴으로써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후에 중국의 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1909년, 안중근 의사(1879-1910)는 ‘동의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피로 맹세했다. 그는 피의 맹세대로 같은 해 10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안중근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순국하였다.

그와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는 어머니 조마리아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면회를 가는 이들을 통해 전한 서신의 내용 중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당부이다.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 그리고 백정기 의사의 유해는 광복 후, 김구 선생 등에 의해 조국으로 봉환되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 꿈에 그리던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8년 남북협상 당시 김구 선생은 김일성에게 안중근 의사의 유해 공동 봉환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2006년 ‘안중근 의사 유해 남북한 공동발굴단’이 구성되어 2008년 뤼순 감옥 인근을 조사했으나 안타깝게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북한 역시 단독으로 1970년대에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뤼순 감옥 주변을 조사한 바 있다. 근래, 안중근 의사 유해를 남북한에서 다시 공동으로 발굴하고자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인 올해, 2019년에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희망한다.

 

임정요인 묘역
임정요인 묘역

 

삼의사 묘역에서 내려와 효창공원 정문을 향해 걷다 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인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의 묘소가 자리한 ‘임정요인 묘역’의 팻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동녕 선생(1869-1940)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오늘날의 국회와 같은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군무총장, 국무령, 법무총장, 주석 등 주요 요직을 역임했으며 1932년의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김구 선생과 함께 지도했다.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선생이지만 그토록 갈망하던 조국의 독립을 마주하지 못하고 1940년, 중국 쓰촨성 치장에서 영면했다.

조성환 선생(1875-1948)은 노령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으로 군무부장직을 수행했으며 광복군 창설에 주력했다. 그 결과,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창설되었으며 이후 선생은 오늘날 군 최고 지휘관의 참모관과 같은 대원수부의 막료로 군부부장과 최고 원수부의 판공처장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환국 후인 1948년, 세상을 떠났다.

차리석 선생(1881-1945)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이후 편집국장을 맡았다. 그러나 1922년 2월, 선생은 펜을 내려놓고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존립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었음에도 선생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독립활동의 중심으로 지켜냈다.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 임시정부의 비서장 등을 역임했다. 차리석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이전인 1945년 9월, 중경 임시정부 청사에서 서거하였다.

 

이봉창 의사 무궁화
이봉창 의사 무궁화

 

오늘날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우리말을 사용하며 우리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가꾸어나갈 수 있는 것은 100여 년 전 잃어버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독립운동가의 존재 덕분이다. 독립운동가는 일신의 안녕이나 그의 이름이 후대에 널리 알려지는 것보다도 민족과 조국에게 자유와 영광을 선사하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이렇듯 효창공원은 그 어떤 곤경 속에서도 독립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를 돌아보게 하는 곳이다. 풀내음 가득한 효창공원을 거닐다 보면 무궁화나무를 마주하게 된다. 제각기 효창공원에 잠든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붙여진 무궁화나무는 공원의 작은 풀뿌리 하나마저도 그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끔 만든다. 무궁화에는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담겨 있다. 그리고 효창공원의 무궁화에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친 선조들의 정신이 담겨 있다. 현실의 고단한 삶에 치여 하루하루가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우리이지만 적어도 효창공원을 걷는 이 순간만큼은 그들의 삶과 정신을 기억하고 마음에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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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선 2019-10-10 23:17:48
효창공원 시간내서 가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