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에 남겨진 백제의 기억, 제석사지
익산에 남겨진 백제의 기억, 제석사지
  • 송영대 기자
  • 승인 2019.10.09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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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하늘은 잔인하였고 날씨는 처참했다. 맹렬했던 추위가 잠시 따뜻해지는 것 같았는데, 어디선가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삽시간에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부었다. 마치 온 세상을 쓸어버릴 것 같던 빗줄기 사이로 공포심을 자아내는 백색 섬광이 번득였다. 이와 동시에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은 7층의 목탑 위로 떨어졌다. 곧 목탑의 위가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승려들은 모두들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꼭대기에 내리꽂은 벼락의 불길은 비가 닿지 않는 목탑의 가운데 기둥으로 번졌다. 마른 기둥을 따라 불길이 번져갔다. 탑 바깥의 불은 꺼졌지만, 탑 안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어느새 탑 안의 불길은 바닥까지 내려왔으며, 물동이를 이고 나르던 승려들은 그대로 주저앉아 망연자실하게 불타는 목탑을 바라보았다. 불길은 목탑은 물론, 부처님을 모셔둔 불당(佛堂)과 절을 감싸는 낭방(廊房)까지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렇게 639년 겨울, 제석정사(帝釋精舍)는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관세음응험기>를 통해 밝혀진 제석사지

이 소식은 백제 무광왕(武廣王)의 귀에도 들어갔다. 백제 무광왕은 우리에게 서동요로 잘 알려진 무왕(武王)이다. 그와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다. 무왕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결혼한 배우자가 선화공주가 맞는지, 성장 배경이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익산으로 천도한 사실이 맞는지 등의 문제이다. 제석사지는 이 중에서 익산 천도 논쟁과 깊은 연관이 있다.

<관세음응험기>라는 기록이 있다. 일본 교토대학의 마키타 타이료(牧田諦亮) 교수가 중국의 관음신앙 관련 자료를 수집하다가, 10세기경에 편찬된 <관세음응험기>를 일본 교토에 소재한 쇼오렌인(靑蓮院)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관세음응험기>란 관세음보살이 응험을 베푼 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이다. 여기에서 응험(應驗)이란 일종의 징조를 말한다. 즉 신비로운 징조를 통해 중생에게 깨우침을 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관세음응험기>를 살펴보면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枳慕蜜地) 즉 지금의 익산으로 천도하고, 새롭게 정사(精舍) 즉 사찰을 만들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과 관련하여 익산 천도설과 함께 제석정사의 존재가 주목받게 되었다.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였다면 궁궐로 활용된 유적은 왕궁리 유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왕궁리 유적에서 동쪽으로 1.1km 떨어진 곳에 절터가 있다.<관세음응험기>에서는 천도를 기념하여 사찰을 세웠기 때문에, 근거리에 사찰이 있어야하므로 서로 부합한다. 아울러 이 절터에서 제석사(帝釋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발견되었으며, 예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일대를 ‘제석들’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은 ‘제석면’이라는 행정 단위에 속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근거들로 인하여 절터가 제석정사 즉 제석사지로 밝혀지게 되었다.

 

잿더미가 된 제석사에서 일어난 기적

목탑의 가운데에는 찰주(刹柱)라는 기둥이 있다. 이 기둥은 목탑의 중심을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제석정사의 7층 목탑에도 찰주가 있었으며, 바닥에서부터 천장의 상륜부까지 받치는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찰주의 아래에 초석이 있으며, 여기에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다. 부처님의 사리는 그냥 모셔지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장인이 정성스럽게 보관할 사리함을 만들어 봉안한다.

부여 왕흥사지의 경우에는 금으로 된 작은 병을 만들어 사리를 넣었다. 여기에 다시 은으로 된 병을 만들어서 금병을 보관한다. 그리고 구리로 병을 만들어서 은병을 보관하였다. 마찬가지로 제석정사에서는 채색된 유리병 즉 수정병을 만들어서 사리를 넣었고, 이와 함께 구리로 만든 종이 즉 동판에 금강반야경이라는 경전을 새겼다. 이 유물들을 함께 옻칠을 한 나무함에 넣었으며, 찰주 아래에 정성스럽게 보관하였다.

문제는 벼락이었다. 벼락으로 인해 생긴 불은 목탑뿐만 아니라 불당과 낭방까지 모두 휩쓸어버렸다. 또한 찰주를 따라 내려온 불씨는 나무함까지도 태워버렸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백제인들은 자신들이 정성을 들여 만든 사리함이 모조리 타버리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마의 흔적이 남은 사리함을 꺼내 보니, 불사리병과 금강반야경을 써놓은 동판만 남아 있었다.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었다.

불심이 깊은 무왕에게 이 소식이 알려졌다. 승려들과 신하들은 남은 유물들을 겨우 수습하여 무왕에게 가지고 갔다. 무왕은 자신이 덕이 없음을 통탄하면서 조심스럽게 사리병을 살펴보았다. 사리병은 투명하여 속이 비치는데, 원래 있어야 할 사리 6개가 모두 사라졌다. 다들 이를 괴이하게 여겼으며, 뚜껑은 화재 때문인지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았다.

이에 무왕은 큰스님을 불러 참회를 하였다. 무왕은 신하들과 함께 참회하는 의식을 치른 다음, 다시 조심스럽게 사리병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사리병에 사라졌던 6개의 사리가 모두 갖춰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다들 탄성을 자아냈으며, 무왕의 정성이 부처님을 감동시킨 것이라 여겼다. 무왕은 다시 제석정사를 복구하게 하고 예전처럼 사리함을 목탑 아래에 모시게 하였다. 이 이야기가 앞서 말한 <관세음응험기>에 적힌 내용이다.

참고로 <관세음응험기>에 나오는 사리병과 금강반야경은 왕궁리 오층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차이점도 확인된다. <관세음응험기>에서는 동판에 불경을 새겼음에 반해, 왕궁리 오층석탑 안에서 발견된 유물은 순금제 금판 불경이다. 또한 왕궁리 오층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는 6개가 아닌 16개라는 점도 차이점이고, 나무함이 아닌 금제함 속에 들어있었던 점이 다르다.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제석사

익산 제석사지는 백제 시대의 사찰이다.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왕의 익산 천도와 관련하여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즉 7세기 초반의 사찰로 볼 수 있다. 제석사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1993년에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 진행되어 목탑터·금당터·강당터·회랑 등이 확인되었다. 앞서 말했던 불당이 바로 금당터에 해당한다. 1998년 5월 12일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사적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제석사라는 이름에서 제석은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釋天)을 의미한다. 제석천은 불교의 수호신으로 강력한 신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백제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왕궁평성의 동쪽에 제석사지가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왕궁을 보호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제석사지의 크기는 동서로100m, 남북으로 170m에 달한다. 백제는 보통 1탑 1금당의 가람배치 구조를 가진다고 설명된다. 이는 중문-탑-금당-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는 구조를 의미한다. 매우 정연하게 만들어진 방식으로, 정림사지를 비롯한 백제의 사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제석사지는 1탑 1금당식의 가람배치를 가진 사찰 중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에 해당한다. 발굴조사 이후 이곳의 유적은 다시 흙에 덮어졌다. 그렇지만 유적 정비를 하면서 일부러 유적지 위에 흙을 덮어, 유적의 흔적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과거의 영광이 사라진 한적한 절터

제석사지에도 중문지가 남아 있으며 양쪽에 회랑이 있다. 제석사지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중문지 양 옆의 회랑을 남회랑이라고 부른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 유적이 모두 제대로 남아있지는 않다. 유적의 옆으로 길이 지나가고, 현지 주민의 집이 있기 때문이다. 유적지의 완전한 복원을 위해서는 민가를 허물고 조사해야 하지만, 현재 살고 있는 주민의 동의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중문지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네모진 언덕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에 나타나는 목탑의 터이다. 목탑 터는 발굴 이전에도 다른 지대에 비해 움푹 올라와 있어서 유적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목탑은 이중의 기단구조로 되어 있으며, 하층 기단의 길이가 21m에 달한다. 목탑의 기초는 3m 정도의 높이이며, 흙을 다져서 올리는 판축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사방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중앙으로 올라올 수 있게 되어 있다.

목탑터의 중앙에는 심초석이 2조각으로 깨진 상태로 놓여있다. 길이 182cm, 너비 175cm, 두께 76cm로 제법 큰 편이다. 이곳에 본래 사리함이 놓여 있었다. 돌을 쪼아 만든 솜씨가 매우 정교하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부서진 흔적들도 더러 확인된다. 목탑터에 오르면 주변이 잘 보이는데,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가 눈에 들어온다.

금당터는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이곳에 불상을 안치하고 온갖 행사가 이루어졌다. 제석사지의 금당터에는 제석천의 불상이 모셔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터 또한 목탑터와 마찬가지로 이중기단으로 되어 있다. 상층기단은 길이가 약 30m, 너비가 약 21m이고, 하층기단은 길이가 약 32m, 너비가 약 23m이다. 여기 또한 판축기법을 이용하여 땅을 다져 만들어졌다. 제석사지의 금당터는 백제 시대 금당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가로와 세로의 평면 비율은 부여 금강사지의 기단과도 비슷하다. 이곳에서는 인동당초문 암막새와 수막새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강당터는 승려들의 수행과 교육 등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금당보다 좀 더 큰 규모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뒤편에 자리한다. 기단은 길이 약 52m, 너비 18m의 단층기단이다. 계단은 앞·뒷면과 왼쪽 중앙의 세 군데에서 확인되며, 오른쪽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당터의 규모나 구조는 익산 미륵사지의 강당터와 비슷할 정도로 큰 편에 해당한다.

제석사지 강당터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수많은 석재들이길 건너편의 한쪽에 정리되어 있다. 모두 제석사지에서 출토된 석재로, 발굴조사 및 유적 정비과정에서 수습된 석재들이다. 초석·지대석·갑석 등 다양한 종류의 석재들이 확인되는데, 본래 제석사의 건물에 쓰였던 부재로 추정된다. 이를 이용하여 복원할 수도 있지만, 그 원래의 모습을 명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한쪽에 치워둔 것이다.

 

제석사지에서 발견된 유물들

제석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전시하고 있다. 제석사지와 관련된 다양한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 중에서는 흥미를 끄는 유물들도 많다. 예를 들어 소조악귀상두(塑造惡鬼像頭)라는 유물이 있는데, 이는 악귀의 얼굴을 형상화한 것이다. 제석사지의 폐기장에서 출토되었다.

악귀상은 부리부리한 눈을 가지고 있으며 들창코에 이빨을 드러낸 모습이다. 곱슬머리를 하고 있으며 눈썹이 과장되게 표현되었다. 볼과 입 주변에는 빼곡하게 난 수염이 표현되어 험상궂은 모습을 보여준다. 악귀상은 주로 사천왕의 발밑에 깔려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제석천과 사천왕은 나쁜 기운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보호하는데, 악귀는 그 본보기로 당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달리 매우 자애로운 모습을 한 유물, 즉 소조천부상두(塑造天部像頭)도 출토되었다. 천부는 부처나 보살보다는 아래에 있는 불교의 신들에 해당한다. 눈을 감고 명상하는 듯한 모습이며, 악귀상과는 다르게 코와 입이 작고 단정하게 표현되었으며, 머리도 정갈하게 넘긴 모습이다.

악귀상이나 천부상은 본래 제석정사의 불상 주변을 꾸몄던 조각상들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639년에 화재에 휩쓸려서 파괴되었고, 결국 폐기장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도 1400년 이후 오늘날에 세상에 그 빛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우리에게 백제인들의 정교함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제석사지는 역사적 기록과 설화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절터이다. 현재 이곳을 방문하면 황량한 들판을 마주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석사지 목탑의 주춧돌에 기대어, 백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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